[TF이슈] 맨살을 찍어야 범죄라는 '레깅스 사법부'
입력: 2019.11.13 05:00 / 수정: 2019.11.13 05:00
지난 2016년 서울지방경찰청이 서울도시철도공사와 함께 지하철 5·6·7·8호선 중 승하차 인구가 가장 많은 가산디지털단지·광화문·공덕역에 설치한 몰카 아웃 계단을 시민들이 이용하는 모습. /더팩트DB
지난 2016년 서울지방경찰청이 서울도시철도공사와 함께 지하철 5·6·7·8호선 중 승하차 인구가 가장 많은 가산디지털단지·광화문·공덕역에 설치한 '몰카 아웃' 계단을 시민들이 이용하는 모습. /더팩트DB

'성적 수치심 유발할' 신체 부위에 머물러…"범의에 집중해야"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버스 안에서 레깅스를 입은 여성의 뒷모습을 8초간 영상으로 촬영한 남성이 항소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의정부지법 형사1부는 지난해 피해 여성 승객이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뒷모습을 녹화한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앞서 1심은 유죄를 선고했지만 2심에서 뒤집혔다. 상고심을 남겨뒀지만 후폭풍이 크다.

◆몰래 촬영해도 "헐벗은 은밀한 부위" 아니면 무죄?

1심 재판부는 가해 남성에게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성폭력 특례법') 제14조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 혐의를 유죄로 보고 벌금 70만원과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24시간 이수 명령을 선고했다. 그러나 2심은 가해 남성이 피해자를 몰래 촬영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헐렁한 상의와 발목까지 오는 레깅스 차림으로 피해자의 노출된 신체 부위는 목 윗부분과 발목 일부였다는 점 △피해자 뒷모습을 촬영했지만 엉덩이 부위를 부각시켜 촬영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무죄를 선고했다. 몰래 촬영한 신체가 노출된 상태가 아니었고, 그나마 드러난 부분 역시 가슴과 엉덩이 등 '은밀한 부위'가 아니었다는 취지다.

판결 논란이 뜨거운 반면 법 전문가들에 따르면 같은 불법촬영이라도 노출 수위에 따라 유무죄가 갈리는 것은 일반적이다. 2심 재판부가 근거로 제시한 2016년 대법원 판례 역시 같은 맥락이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스키니진을 입거나 스타킹을 신은 여성의 하반신을 촬영해 벌금 100만원형을 선고받은 남성을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바 있다. 피해자의 노출 부위가 거의 없고 특정 부위를 부각시킨 사진이 아니라는 이유다. 익명을 요청한 서초동의 한 중견 변호사는 "통상 불법촬영 범죄사건 중 피해자가 옷을 입은 경우는 기준이 애매하다. 치마 속을 촬영하거나 신체일부분을 촬영하는 행위가 아니라면 논란이 된다"고 설명했다.

현행법은 불법촬영을 "카메라나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갖춘 기계장치를 이용하여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촬영대상자의 의사에 반한 촬영 행위"로 정의한다.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하는 신체 부위라는 설명이 전부다보니 유무죄를 가를 중요한 쟁점인데도 법관의 주관적 해석이 개입돼 같은 혐의내용이라도 정반대 판결이 나오기도 한다.

장윤미 변호사는 "법원은 기본적으로 법문을 사안에 적용해 결정하는 기관이다. 법문에서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하는 신체라고만 명시하다보니 해당 신체가 수치심이나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지 법원에서 판단해야 한다"며 "이마저도 어느 부위가 집중돼 촬영했는지, 각도는 어떤지도 고려해야 하니 대중이 보기에 판결이 제각각 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레깅스를 입은 여성의 하반신을 몰래 촬영했지만 지난해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이 대법원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은 대법원 내에 비치된 정의의여신상. 더팩트EB
레깅스를 입은 여성의 하반신을 몰래 촬영했지만 지난해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이 대법원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은 대법원 내에 비치된 정의의여신상. 더팩트EB

◆피해자 신체보다 가해자 범의에 더 집중해야

신체부위와 성적 수치심 등 피해자 피해 수준보다 가해자의 범의와 범죄행위를 중심으로 사건을 판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불법촬영 범죄는 직장동료부터 가족의 일상사진을 몰래 촬영해 온라인상에서 성희롱하거나 합성하는 등 유형이 다양해졌다"며 "한국 사법부는 여전히 치마 밑으로 카메라를 넣어 맨살을 찍는 특정한 행동만 범죄행위로 인식한다. 불법촬영에 대한 국민감정은 고조됐지만 법관의 시야는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윤김지영 건국대학교 몸문화연구소 교수 역시 "궁극적으로 범죄 구분을 피해자가 느낄 성적 수치심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 역시 문제다. 범죄를 당한 피해자의 감정을 성적인 부끄러움으로만 환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타인의 의사에 반한 촬영 행위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할 필요성도 있다. 김태연 태연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는 "사실 2010년 4월 성폭력 특례법이 시행하면서 몰래 촬영한 행위를 범죄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몰래 신체를 촬영해도 처벌할 법적 근거조차 없었다"며 "지금도 성적인 목적없이 몰래 촬영하는 행위를 처벌할 조항이 없어 민사소송에만 의존한다"고 지적했다. 장윤미 변호사는 "이 사건도 결국 몰래 촬영한 고의성은 인정되지만 죄는 안된다는 판결"이라며 "몰래 촬영한 행위 자체를 엄중히 보고 법제화한 다음 촬영된 부위는 양형 요소로 감안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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