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현장] '우리가 증거에 손을 댔다고?' 검사는 단단히 화가 났다
입력: 2019.11.09 06:00 / 수정: 2019.11.09 10:56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7월2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에 대한 17차 공판에 출석하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뉴시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7월2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에 대한 17차 공판에 출석하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뉴시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법행정권 남용' 43회 공판

[더팩트ㅣ장우성 기자] 서울중앙지법 서관 311호 중법정. 매주 금요일 여기서 '사법농단' 공판이 열린다. 피고인석에는 전 대법원장, 전 대법관 등 쟁쟁한 법조계 원로들이 잔뜩 웅크리고 반전의 계기를 노린다. 특별공판팀으로 투입된 정예 검사 십수명의 대어를 놓치지 않으려는 눈매도 매섭다. 이곳은 양보없는 양 진영이 치열한 수싸움을 벌이는 막다른 골목이자 '콜로세움'이다.

그 중량감 만큼 재판이 늘어지고 지난해서일까. 방청석은 이 빠진 옥수수처럼 군데군데 비어있고, 말 한마디 놓칠까 신경을 곤두세우는 기자들이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 총성처럼 울린다.

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부장판사 박남천) 심리로 열린 양 전 대법원장 등의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 제 43회 공판 법정은 평소의 이런 모습과 달리 검찰청 조사실이 된 듯 후끈했다.

이날 증인석에 앉은 이모 서울중앙지법 판사가 불을 지폈다. 그는 2016~2018년 법원행정처 전산정보관리국(전정국) 정보화심의관으로 일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에 전산국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겠다. 하지만 그는 등장하는 시간은 짧지만 역할은 가볍지 않은 조연 배우와 비슷하다.

그가 주목된 이유는 당시 전정국 직원에게 보낸 한 이메일이다. 보낸 시간은 2016년 5월 10일 오후 10시 54분.

'○ 계장님께. 최 변호사의 2014년 이후 사건을 확인 부탁드립니다. 신속한 대응이 필요하여(CJ) 내일 오전 중에 답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최 변호사는 판사 출신 변호사가 개입된 전관예우 법조비리 '정운호 게이트'의 핵심 인물 최유정 변호사를 말한다. 이 판사가 이메일을 쓰기 하루 전(9일) 최 변호사는 검찰에 긴급체포 됐다.

그보다 앞선 4월 25일에도 이 판사가 보낸 이메일이 있다. 여기에는 '(임종헌) 차장님 지시사항임'이라고 쓰여있다.

'윤감실(윤리감사관실) 급한 요청입니다. 법원에 계류되었거나 종료된 정운호의 모든 사건을 확인해주세요.'

당시 양승태 대법원은 '정운호 게이트'를 향한 사회적 비난이 법원 전체로 번지지 않도록 TF를 조직해 수사기밀 확보 등 전방위적 수단을 동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메일 본문 괄호 속에 쓰인 'CJ'(Chief Judge)는 법원에서 대법원장을 뜻하는 이니셜이다. 양 대법원장이 직접 개입했다는 정황 증거인 셈이다. 증인 신문에 나선 검사가 이 판사에게 캐물었다.

"차장님 지시사항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직접은 아니고 윤감실 통해 들었습니다."

"이메일에 CJ라는 건 양승태 대법원장을 뜻하죠?"

"제가 쓴 기억이 없습니다."

"증인이 발신한 이메일인데요?"

"(다른 사람에게) 수정되거나 편집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검찰은 밤 10시가 넘어 보낸 이메일 요청대로 다음날 아침 즉시 답이 돌아온 것 역시 이례적인 것 아니냐고 따졌다. 대법원장의 지시였으니 '빛의 속도'로 처리한 것 아니냐는 심증이다. 이 판사는 "전정국은 새벽 1시까지도 근무하고 어떤 실·국의 요청이든 즉각 신속하게 처리했다"며 일축했다.

이쯤 되자 검사들은 화를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까지 사법농단 공판에는 수많은 판사들이 증인으로 나왔다. 그들은 이메일을 증거로 제시하면 거의 다 "기억은 나지않지만 내 이메일에 그렇게 쓰여있다면 사실일 것"이라고 인정했다. 만약 이 판사의 주장대로 이메일이 편집·수정됐다면 증거능력도 인정받을 수 없다.

검찰 측은 "누가 (이메일 내용을) 수정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은 대법원 서버에 있는 것을 수정했거나 검찰이 (임의로) 수정했다는 것"이라며 "법원의 전산 전문가이시지 않느냐"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점심 휴정 시간에 자료를 챙겨온 검찰은 이메일의 해시값을 제시하며 수정·편집 여지가 없다는 점을 입증했다. 이 판사는 그래도 쉽게 수긍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제가 CJ라고 굳이 쓸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이렇게 작성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검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증인, 이렇게 포렌식 증거를 제시했는데도요?"

"해시값을 보면 제가 작성한 건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대법원 전경 / 남용희 기자
대법원 전경 / 남용희 기자

이 판사는 양승태 대법원장의 눈엣가시였던 진보적 판사들의 모임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의혹에도 이름을 올린다. 2017년 2월 김민수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현 창원지법 마산지원 부장판사)이 작성한 '전문분야 연구회 중복가입 해소 조치' 안내 공지글을 법원 내부 전산망인 '코트넷'에 올리는 실무를 담당했기 때문이다. 이 공지글은 기획조정실에서 썼는데도 이모 전자정보관리국장 이름으로 게시됐다.

이 판사는 '중복가입 해소조치'가 인권법연구회를 고사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점을 부정하는 취지로 증언했다. 이미 2016년 초 평소 알고 지내던 김민수 부장판사에게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중복 가입을 금지한 법원 예규를 어기고 운영되며 예산 중복 지원 문제로 국회와 감사원의 지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정치적 목적은 없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검찰은 조목조목 반박했다. 2016년 고영한 당시 법원행정처장이 전문분야 연구회 지원 예산 증액을 추진해 이듬해 2배로 늘어 곳간이 넉넉했다는 것이다. 2016~2017년 국회나 감사원이 중복 가입 조치에 따른 예산 문제를 지적한 사실이 없다는 점도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김민수 부장판사도 검찰 조사와 법정에서 "당시 예산은 문제될 게 전혀 없었다"고 증언했다고도 했다.

"피의 칼바람이 분다."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의혹을 거론할 때 자주 소환되는 말이다. 이 주인공 역시 이모 판사다.

김민수 부장판사는 2017년 2월 연구회 중복가입 해소 조치를 본격 시행하기 위해 이 판사에게 공지글을 전산망에 올리는 기술적 검토를 부탁했다. 당시 이 판사가 "이제 시행하는구나. 피의 칼바람이 불겠구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는 김 부장판사의 증언으로 알려졌다. 이 조치가 국제인권법연구회를 타깃으로 했다는 정황인 셈이다.

하지만 이 판사는 이날 법정에서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런 말을 했다면 "그때 연구회 중복가입자가 7000명에 달했기 때문에 조치가 시행되면 누구든 피해를 볼 것이라는 취지에서 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임 시절 재판 전산 시스템을 안착시키는 등 의욕적으로 일했다고 평가한 이 판사 역시 '중복가입 해소 조치'에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중복가입 해소 조치로 연구회 지원을 중단해도) 법원 전산망에서 커뮤니티를 만들지 못 할 뿐 다른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면 되거든요. 왜 이런 조치를 하는지 의아했습니다. 기조실이 결정했다고 하니 따른 것 뿐입니다."


leslie@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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