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리는 정경심(57) 동양대학교 교수와 시조카 조 모 씨 재판에서 열람등사권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사진은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남용희 기자 |
'수사기록 열람등사권'이 뭐길래…"칼집 낸 기록 받아본 적도"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서울 서초동에서 근무하는 중견 변호사 A씨는 어느 날 깜짝 놀랐다. 의뢰인의 재판 절차가 시작돼 검찰에 요청한 수사기록을 받았는데 사건 관계자명이 모두 문구용 칼로 패여 있었다. 그동안 어렵에 받아든 수사기록이 'A, B, C' 등으로 비실명화 처리됐을 때도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밤낮없이 사건을 들여다 본 덕분에 어느 정도 내용 유추가 가능했다. 그러나 군데군데 칼집이 난 수사기록은 변론을 준비하지 말란 소리와 다름없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등이 들어서 있는 서울 서초동에서 수사기록 열람등사권에 불만을 품은 변호사들의 목소리가 높다. 조국(54) 전 법무부 장관 일가가 투자한 사모펀드 의혹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정경심(57) 동양대학교 교수와 5촌 조카 조 모 씨의 재판에서 열람등사를 두고 검찰과 변호인의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조 씨 측은 지난달 25일 첫 재판에서 수사기록을 열람하지 못했다며 모두진술을 거부했다. 6일로 잡힌 2차 준비기일에서도 같은 이유로 재판이 공전됐다. 재판 절차 지연은 피고인은 물론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 모두에게 고된 일이다. 열람등사권이란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무기대등의 원칙' 지키는 열람등사권
지난달 8일 법무부에서 발표한 연내 추진과제에도 포함된 열람등사권은 검찰 수사기록을 피고인 측에서 검찰 허가 하에 사본으로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이다. 기소된 피고인으로서는 자신이 어떤 수사를 거쳐 확보된 증거로 재판을 받는지 알아야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다. 피고인 방어권 보장과 무죄추정의원칙을 존중하는 한국 사법체계에서 필수적인 권한이다. 이충윤 대한변호사협회 대변인(법무법인 해율)은 "변호인으로서는 피고인이 어떻게 기소됐는지 수사기록을 열람해야 방어할 수 있는데, 이는 형사법의 대원칙인 '무기대등'의 원칙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며 "수사기록과 증거가 무엇인지 모르면 피고인이 방어권을 행사하는데 상당히 불리하기 때문에 열람등사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재판의 궁극적 목적인 '실체적 진실 규명' 측면에서도 열람등사권은 필요하다. 피의자의 기소, 피고인 변론이라는 검찰과 변호인 각각에 주어진 역할에서 벗어나, 법정에서 재판부 심리 아래 진행되는 신문에서 객관적 진실이 드러날 수도 있어서다. 검찰 출신 이승혜 변호사(변호사 이승혜 법률사무소)는 "재판 단계에서는 수사기록을 보고 검찰에서 잘못 파악한 사실관계나 증거가 있는지 밝힐 필요가 있다. 실제로 검찰이 참고인 조사를 한 후 기소해 법정에서 증인신문을 할 때, 검찰과 재판부, 변호인 세 명이 신문하다보면 기소 때와 다른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며 "피고인 방어권 보장은 물론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도 중요한 권한"이라고 강조했다.
사법 농단 의혹 사건으로 구속기소 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해 3월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첫 정식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이선화 기자 |
◆열람등사 못 해서 사임한 '사법농단' 변호인단
조 전 장관의 동생이 연루된 웅동학원 비리에서 배임수재 등 혐의로 기소된 박 모 씨와 조 모 씨의 첫 재판에서도 열람등사권이 화두였다. 이들의 변호인은 "기록 복사를 청구했는데 거부당해 아무 기록도 보지 못했다. 열람등사 이후 검찰 측 공소사실에 대해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다.
정 교수 측이 지난달 2일 수사기록 열람등사를 신청하며 든 선례였던 임종헌(60) 전 법원행정처 차장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사법농단 사태 초기에 기소된 만큼 수사기록은 20만 쪽에 달했다. 직접 수사한 기록을 정리한 검찰과 달리 일일이 허가받아 자료를 받아야 했던 11명의 변호인단은 결국 집단 사임했다. 새롭게 선임된 변호인 역시 제한적인 열람등사권에 비해 촉박하게 잡힌 재판일정에 혀를 내둘렀다. 변호인은 "검사님들은 다 본 내용이지만 우리는 완전히 처음 보는 문건들"이라며 재판장에게 얼굴을 붉히며 항의하기도 했다.
열람등사권으로 검찰과 변호인이 갈등을 빚은 건 오래된 일이다. 2005년 서울 강동 시영아파트 재건축조합의 뇌물공여 혐의 관련 재판에서도 수사기록의 열람등사가 논란이 됐다. 공판중심주의를 선보인 첫 재판이기도 한 해당 사건의 변호인은 검찰의 열람등사 신청에 맞서 헌법소원을 내겠다고 거세게 반발했다. 증거인멸 혐의로 기소돼 12월 선고를 앞두고 있는 삼성바이오 임직원 8명의 1차 공판준비기일 역시 열람등사권 문제로 공전한 바 있다.
2009년 1월 새벽에 점거농성을 하던 철거민 시위대를 경찰이 진압과정 중 시위대5명, 경찰1명이 사망한 서울 용산 한강로의 빌딩 현장을 국립과학수사대가 현장검식 작업을 하고 있다. /뉴시스 |
◆'수사기밀' 중요해도 피고인 방어권 위한 법제화 필요
검찰의 열람등사 거부 사유도 일리는 있다. 특히 사법농단 사태와 삼성바이오 분식회계‧증거인멸 의혹 등 규모가 큰 사건은 재판 절차에 돌입해도 추가 수사가 불가피하다. 수사기밀을 지켜야 하는 검찰로서는 피고인 측의 수사기록 열람등사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 또 성범죄 사건처럼 피해자 인적정보와 진술이 피고인 측에 노출될 경우 보복 범죄 우려가 있어 수사기록 중 극히 일부만을 공개하는 경우도 있다. 이승혜 변호사는 "변호인 측에서 신청한 내용이 아직 수사단계에 있다면 검찰은 이를 거부할 수 있다. 특히 공범자 관련 내용이 포함돼 있다면 수사가 종결되기 전에 공모해 증거를 인멸할 염려도 있다"며 "기밀한 수사 진행을 위해 검찰로서도 불가피한 부분"이라고 했다.
그러나 피고인 방어권과 실체적 진실 측면에서 열람등사권 허가권을 쥔 검찰을 통제할 장치도 필요하다. 2009년 용산 재개발 지역 주민에 대한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자가 발생한 '용산 참사' 역시 변호인들의 수사기록 열람을 검찰에서 거부해 헌법재판소 판단을 받게 된 사례도 있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검찰의 열람등사신청 불허는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열람등사로 재판이 헛바퀴를 도는 일이 여전하다는 점은 되짚어볼 문제다. 서초동의 A 변호사는 "열람등사권 자체는 법으로 보장돼 있지만 비실명화 처리나 일부 내용을 가리는 것은 법적인 기준이 뚜렷하게 없다. 수사기밀성은 지키면서도 피고인 방어권이 침해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한 세밀한 법제화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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