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현장] '파기환송'이 가장 쉬웠던 대법관들
입력: 2019.09.28 05:00 / 수정: 2019.09.28 08:18
대법원 청사 내 정의의 여신상,/문병희 기자
대법원 청사 내 정의의 여신상,/문병희 기자

사법농단 33회 공판…현역 부장판사 "상상하기 힘든 일"

[더팩트ㅣ장우성 기자] "내가 검토한 사건은 다른 사건과 다르게 진행됐다. 파기만을 목적으로 고집을 부려 몇차례 보고했다. 하지만 그 대법관님은 기어이 사건을 파기했다."

한 현역 부장판사가 지난해 7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려 파장을 일으켰던 글이다. 여기서 언급된 사건은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판결'이다. 또 다른 글도 있었다.

"대법원이 자신이 내린 판결의 정당성을 같은 사건에서 스스로 부정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검토되고 있었는데도 재판연구관실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미쓰비시중공업 사건 대법원 판결을 인용한 의견서와 보고서를 주심 대법관에게 보고했는데, 난데없이 수석연구관이 미쓰비시중공업 사건을 다시 파기환송하기로 했으니 판결 이유가 그렇게 나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글은 강제징용 피해자가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사건에 얽힌 내용이다. 대법원이 2012년 강제징용 피해자 승소 취지로 파기환송한 판결을 양승태 대법원이 부정하려는 과정이 드러난다.

이 글을 쓴 이모 부장판사는 2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박남천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의 33회 공판에 증인으로 나왔다.

이 부장판사는 2014~2016년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일했다. 재판연구관은 대법관이 맡은 사건을 연구 검토해 판결문 초안(보고서)을 쓰는 일을 한다. 양승태 대법원이 숙원인 상고법원 입법을 위해 박근혜 정부와 재판 거래 대상으로 삼았던 굵직한 사건들이 그에게 맡겨졌다.

그는 판결문을 쓰듯 논리적이고 차분하게 '존경했던 대법관'들에 대한 씁쓸한 기억을 증언했다.

2013년 고용노동부는 전교조에 법외노조 처분을 내렸다. 해직교직원은 조합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교원노조법 조항에 따른 것이다. 전교조는 고용부를 상대로 법외노조 처분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과 취소소송을 냈다. 1,2심은 전교조의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으나 대법원은 파기환송했다.

파기환송 당시 주심은 고영한 전 대법관이었다. 이 부장판사는 고 전 대법관이 "국가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며 직접 파기환송 문제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 부장판사는 "이례적이었다"고 말했다. 보통 대법원에 올라온 사건은 처음부터 결론을 확정하지 않고 양론을 검토하는 것이 원칙인데 전교조 사건은 아예 파기를 전제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양승태 대법원은 숙원인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박근혜 정부와 전교조 사건 등 주요 재판의 거래를 추진했다. /성남=임영무 기자
양승태 대법원은 숙원인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박근혜 정부와 전교조 사건 등 주요 재판의 거래를 추진했다. /성남=임영무 기자

2015년 그는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의 의견서도 쓰게됐다. 그런데 "이 사건은 파기환송 가능성이 있으니 2012년 대법원 판결을 인용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는다.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손을 들어준 1,2심과 달리 2012년 강제징용 피해자 승소 취지로 파기환송한 대법원 판결을 인용해선 안 된다는 말이었다. 이 판결을 뒤집는다면 "대법원 판결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며 난리가 날 일"이었다.

이 사건의 주심은 이인복 전 대법관이었다. 2012년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 당시 참여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보고를 위해 찾아간 그의 말은 이랬다.

"이 사건이 한일관계 파장이 크고 국제사법재판소로 가면 패소할 가능성이 있다. 50년 이상 지난 사건인데 손해배상 책임 소멸시효체를 무력화할 수도 있다."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파기환송'을 전제로 검토하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이 부장판사는 초고를 쓰기 시작했지만 기존 대법원의 논리를 뒤엎는 글이 나오질 않았다. 애써 근거를 찾아봐도 일제강점기 반인권적 불법행위는 국가간 조약으로 개인청구권을 소멸할 수 없다는 논리만 더욱 풍부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받은 지시와는 다른 의견서를 쓰고 말았다.

그러나 이인복 전 대법관은 이후 검찰 조사에서 "내가 (강제징용 사건) 파기환송을 염두에 두고 (이 부장판사에게) 이야기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어이가 없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검찰 쪽에서 이 전 대법관의 이같은 진술 내용을 건네들은 이 부장판사의 목소리는 허탈했다.

"제가 착오할 수가 없다. 2018년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뒤 몇달 뒤 사법연수원에서 이인복 대법관님을 마주쳤다. 차 한 잔 마시며 파기환송 이야기가 언론에 나가도록 한 건 잘못이라는 질책을 받았다. 이 일을 기억 못하시진 않을 것 같다."

이인복 전 대법관은 이 부장판사의 사법연수원 시절 스승이었다. 지도교수는 아니었지만 "존경하는 대법관님"이었다.

지난해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 흔적이 담긴 법원행정처 문건이 잇따라 발견되자 대법관들은 대법원과 법원행정처는 분리돼 재판에 영향을 받을 수 없다는 취지의 반박 성명을 냈다. 이 부장판사는 "국민은 물론 (후배) 판사들까지 오도하는 일이었다"고 잘라 말했다.

leslie@tf.co.kr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이메일: jebo@tf.co.kr
▶뉴스 홈페이지: http://talk.tf.co.kr/bbs/report/write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AD
인기기사
실시간 TOP10
정치
경제
사회
연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