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외교부, 정부서울청사 전경. /더팩트 DB |
사법농단 재판 출석 외교부 간부 “강제징용 의견서 압박 받았다”
[더팩트ㅣ송주원 인턴기자] 사법농단 재판에 전·현직 판사들이 줄줄이 불려나온다. 판사 못지 않게 법정 출입이 잦은 게 외교부 전·현직 간부다. 위로는 전 장관부터 아래로는 사무관까지 직급은 차이가 있지만 비슷한 점은 있다. 대부분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일본 전범기업의 손을 들어주려던 청와대와 법원행정처에 시달렸다.
“주철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외교부가 적극적으로 일을 안 한다고 꾸중했습니다.”(강정식 당시 외교부 국제법률국 국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의견서를 제출하라고 역정 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김인철 당시 외교부 국제법률국 국장)
강정식(57) 전 외교부 국장은 29일 서울중앙지법 36형사부(윤종섭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에 증인 출석해 당시 청와대에 들볶이기는 했지만 강제징용 피해자 재판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사법농단' 관련 24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시스 |
강 국장은 2013년 5월~2014년 10월 외교부 국제법률국에서 근무했다. 국제법률국은 국가 간 법적 다툼을 관할한다. 강 국장은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 승소 취지로 원심을 파기한지 꼭 1년이 된 2013년 5월 이곳으로 왔다. 당시 서울고등법원에서 재판이 한창이었다.
그는 외교부가 작성한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 대응방안'이라는 보고서를 놓고 청와대가 주재하는 대책회의에 참석했다. 다만 “대법원 판결에 영향을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보고서도 “국제법적 관점에서 대법원 결정을 검토한 것 뿐”이라고 했다. 재상고심 선고 지연을 위한 여러 방안도 “아이디어 차원”이라고 의미를 축소했다.
강 국장은 주철기 전 청와대 수석에게 외교부가 강제징용 재판 대응에 소극적이라고 혼난 사실은 인정했다. 주 전 수석은 2013년 7월 서울고법이 피해자 1인당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뒤인 9월 초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에서 회의를 열었다. 강 국장에 따르면 주 전 수석은 “외교부가 적극적으로 일을 안한다”며 “(정부 입장을) 여기저기 뿌리고 설명하고 다녀야 한다. 개인적으로라도 사법부에 접촉하라”며 강 전 국장을 압박했다. 주 전 수석이 위안부, 원폭 피해자 등 한일 갈등 현안을 두고 “외교부는 한일문제에 항상 일관적 입장을 유지해야 할 것”이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주철기 전 외교안보수석이 2013년 현직에 있을 당시 서울 삼청동 인수외원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주 전 수석은 지난 2월 지병으로 작고했다. /더팩트 DB |
꾸중을 듣고 온 강 전 국장은 이같은 사실을 정 모 사무관(변호사)에게 전했다. 이때 정 사무관이 회의 내용을 기록한 업무 수첩에는 “주 수석, 외교부 문제多(많을 ‘다’)”, “중재가면 개망신”, “가능하면 전원합의체 회부” 등의 내용이 담겼다. '중재간다'는 표현은 검찰이 압수수색으로 확보한 관련 문건을볼 때 친정부적 성향이 아닌 대법관이 재판을 맡게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강 전 국장은 2014년 10월 물러났다. 후임자는 8월부터 인수인계를 받으며 실질적 국장 업무를 수행한 김인철 현 외교부 대변인이다. 김 대변인 역시 지난 9일 임 전 차장의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국장직과 함께 의견서 제출 압박이라는 바통 역시 이어 받았다. 김 대변인은 2015년 상반기에 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었던 임 전 차장에게 ‘역정’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밥 한번 먹은 사이인 임 전 차장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 안부도 안 묻고 의견서를 제출하라며 역정을 내더라”며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불쾌했다”고 당시 심경을 밝혔다. 임 전 차장은 반대신문 시간을 빌어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마시라”며 사과했다.
강 전 국장을 질타한 주 전 수석은 뇌종양 투병 끝에 지난 2월 73세로 별세했다. 강 전 국장은 주 전 수석을 두고 “재상고심에 관심은 많았지만 법리를 잘 몰랐다. 우리가 볼 때 합리적이지 않은 이야기도 많이 했다”고 회고하며 “그래서 크게 시리어스(serious, 진지한)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꾸중을 들었으니 상황을 모면할 생각만 들었다”고 했다. 재판거래에 관해서는 언론보도를 통해 알았다며 “당시 일을 처리할 때는 대법원 판결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고 했다. 재판부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냐는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없다”고 짧게 답하고 증인석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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