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이슈] 칸 뒤흔든 세계영화 거장은 복학생 만화가였다
입력: 2019.05.29 05:00 / 수정: 2019.05.29 08:36
봉준호 감독이 25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받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뉴시스
봉준호 감독이 25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받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뉴시스

학보 시사만화로 엿본 봉준호 감독의 대학생활

[더팩트ㅣ송주원 인턴기자] 눈을 지긋이 감아야 끝이 보일 듯 시원스레 뻗은 백양로가 아름다운 서울 연세대학교 캠퍼스. 31년 전 노태우 대통령이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열겠다고 호언장담하고 88서울올림픽 꿈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나던 해, 사람 좋은 인상의 사회학과 새내기가 신촌골에 나타났다. 만화를 잘 그리고 영화도 좋아하지만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던 청년은 뭔가 달랐다. 그러나 아무도 그가 세계적인 영화 거장이 되리라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 했다.

그는 바로 봉준호(50) 감독. 지난 25일 영화 <기생충>으로 한국영화 1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섬세하면서도 당당한 청년이었다는 봉 감독의 대학생활은 어땠을까.

우선 봉 감독의 청년 시절은 만화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어릴 때부터 그의 즐거움은 만화였다. 미술 전공자인 아버지의 미술 도구로 만화를 따라 그렸다. 그 때문일까. 지금도 영화 시나리오를 콘티로 옮긴 스토리보드 대부분을 손수 작업한다. 그의 영화는 한강에 사는 괴물, 유전자 변형 돼지 옥자 등 초현실적 캐릭터부터 작은 소품까지 꼼꼼한 디테일이 돋보인다. 영화 <괴물>의 스토리보드는 영화감독으로서 드물게 작품으로 전시되기도 했다. 덕분에 봉 감독의 애칭은 ‘봉테일’이다.

봉준호 감독이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 교내 학보 연세 춘추 1993년 3월 1일자 신문에 실은 첫 4컷 만화. /송주원 인턴기자(연세춘추 제공)
봉준호 감독이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 교내 학보 '연세 춘추' 1993년 3월 1일자 신문에 실은 첫 4컷 만화. /송주원 인턴기자(연세춘추 제공)

그의 스승인 조한혜정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는 제자 봉준호 감독을 "강의에 꼬박꼬박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영화제작 동아리 ‘노란문’ 활동을 특히 열심히 했던 학생"으로 기억한다. 영화 촬영을 위해 교수 연구실을 빌려 달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조한혜정 교수는 그때 봉 감독이 보여준 영화를 향한 열정이 "지금같은 영화계 거물로 성장한 밑거름"이라고 평가했다.

봉 감독이 동아리 활동 외에 애정을 쏟은 곳은 또 있다. 바로 "유난히 큰 머리 때문에 군모가 안 맞아 힘들었다"는 군 생활을 마친 후 교내 학보 ‘연세춘추’에 연재한 시사만화다. 봉 감독은 1993년 3월 1일부터 7월 26일까지 매주 월요일 만평을 실었다. 신문 2면에 실린 만평, 7면 4컷 만화에는 스물 넷 복학생의 눈에 비친 당시 사회상을 특유의 위트로 표현했다. ‘봉테일’이 싹튼 건 이 때였다.

1990년대 초는 사립대 등록금 자율화로 '상아탑'이 '우골탑'이 된 시대였다. 군사정권이 사회 안정을 위해 무리하게 통제하던 각종 생활물가도 오르기 시작했다. 1993년 3월 1일자 학보에 실린 그의 첫 만평에는 버스 요금 인상에 이어 두자릿수 등록금 인상률에 허덕이는 대학생의 애환이 담겼다. 만평이 실리기 2개월 전 교통부(현 국토교통부)가 버스 요금을 인상하면서 시내버스 기본요금은 210원에서 250원으로 올랐다. 교통카드가 익숙한 요즘과 달리 매표소 창구에서 직접 버스표를 사는 추억의 풍경은 덤이다.

봉준호 감독이 당시 노동환경을 꼬집은 1993년 3월 8일자 연세 춘추 신문 2면에 실린 1컷 만평(왼쪽), 같은해 5월 1일자 신문 2면에 실린 1컷 만평(오른쪽). /송주원 인턴기자(연세춘추 제공)
봉준호 감독이 당시 노동환경을 꼬집은 1993년 3월 8일자 '연세 춘추' 신문 2면에 실린 1컷 만평(왼쪽), 같은해 5월 1일자 신문 2면에 실린 1컷 만평(오른쪽). /송주원 인턴기자(연세춘추 제공)

봉 감독은 '노동'의 가치에도 일찌감치 눈을 떴다. 사회학과 선배인 김경욱 영화평론가는 “봉 감독은 대학 시절부터 노동자와 노동환경 등 노동 문제 전반에 관심이 많았다”고 귀띔했다. 그가 만평을 연재한 1993년 3~7월은 군사독재가 막을 내리고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출범한 때였다. 문민 대통령에 건 기대도 잠시, 변함없는 노동 현실을 비판하는 날카로움이 만평 곳곳에서 드러난다. 당시 노동계의 극심한 반대에도 국회 상정을 앞둔 노동법 개정을 알리는 신문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남성의 모습, 흐뭇한 표정으로 신문을 보는 양복 신사와 해고된 노동자의 침울한 표정의 대비가 인상 깊다.

봉 감독의 노동인권 의식은 20년 후에도 변치 않았다. 봉 감독은 영화 <기생충>을 촬영하며 모든 스태프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정해진 회차 내에 촬영을 마치는 등 열악하기로 소문난 영화계 노동환경 개선의 모범 사례를 제시했다. 그는 28일 서울 용산구에서 열린 영화 <기생충> 시사회에서 “특별히 선구자적 노력을 한 것은 아니다. 규정을 잘 지켰을 뿐”이라고 겸손해 했다.

봉준호 감독의 사회비판 의식을 읽을 수 있는 1993년 5월 3일자 연세춘추 4컷 만화/송주원 인턴기자(연세춘추 제공)
봉준호 감독의 사회비판 의식을 읽을 수 있는 1993년 5월 3일자 연세춘추 4컷 만화/송주원 인턴기자(연세춘추 제공)

어느덧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닌 봉 감독에게도 반전은 있다. 그는 1991년 민주화 시위 도중 연행돼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 <옥자> 등 그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풍자와 사회비판 정신은 치열했던 대학 시절의 흔적이다. 1993년 5월 3일자 연세춘추 4컷 만화에는 당시 국회의원 부동산 투기 등 국민의 분노를 산 사회지도층의 부정부패를 대학생의 커닝에 견줘 비꼬았다. 무거운 주제지만 웃음을 이끌어내는 그의 솜씨는 지금도 여전하다. 봉 감독의 작품이 관객과 평론가 모두에게 찬사를 받는 이유다.

실제 박근혜 정부 시절 사회참여적 발언으로 '문화계 블랙리스트' 피해자가 되기도 했던 봉 감독은 이번 칸영화제에서 "블랙리스트는 한국 예술가들을 깊은 트라우마에 잠기게 한 악몽이었다"라며 "표현의 자유가 회복된다면 미래는 더욱 밝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칸영화제에서 찬사를 받고 금의환향한 그의 영화 <기생충>은 30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백수인 가족이 IT기업 CEO 집안을 만나며 벌어지는 블랙코미디다. 봉 감독의 선배 김경욱 영화평론가는 “이번 수상으로 흥행과 오락성에만 치우친 경향이 있는 최근 한국 영화시장의 빈 곳을 메울 것”이라며 “2000년대 초반 웰메이드 한국 영화의 전성시대가 회복되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ilraoh_@tf.co.kr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이메일: jebo@tf.co.kr
▶뉴스 홈페이지: http://talk.tf.co.kr/bbs/report/write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AD
인기기사
실시간 TOP10
정치
경제
사회
연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