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현장] '묻지마 범죄'라 쓰고 '여혐 범죄'라 읽는다
입력: 2019.05.18 00:01 / 수정: 2019.05.18 06:58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3주기 추모제가 17일 오후 7시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인근에서 열렸다. 사진은 한솔 불꽃페미액션 활동가가 사회를 보는 모습. /송주원 인턴기자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3주기 추모제가 17일 오후 7시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인근에서 열렸다. 사진은 한솔 불꽃페미액션 활동가가 사회를 보는 모습. /송주원 인턴기자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3주기…"약자 목소리가 세상 바꾼다"

[더팩트ㅣ송주원 인턴기자] 2016년 5월 17일, 20대 여성 하 모 씨는 서울 서초구 한 노래방 화장실에서 살해됐다. 범인은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인근 주점에서 일하는 30대 남성이었다. 그는 하 씨를 공중화장실에서 기다리다 흉기로 찔러 죽였다. 경찰 수사결과 김 씨는 화장실에서 약 30분간 머물렀으며 그 사이 화장실을 이용한 남성 6명은 무사했다. 여성단체를 비롯해 범죄전문가들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명백한 여성혐오 범죄라고 규정했다.

그로부터 3년. 여성단체 '불꽃페미액션'은 17일 오후 7시 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강남스퀘어에서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3주기 추모제 ‘묻지마 살해는 없다’를 열었다. 행사장 대형 스크린에는 “묻지마 살해는 없다”라는 문구가 크게 띄워졌고 무대 우측에는 같은 내용의 대형 현수막이 설치됐다. 현수막에는 2008년 수원 오원춘 살인사건부터 2019년 안인득 방화사건까지 10여 년에 걸쳐 발생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 사례들이 빼곡히 적혔다. 그러나 사건명 중 “묻지마”라는 단어에만 오답을 적은 시험 문항처럼 하나같이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사회를 맡은 한솔 불꽃페미액션 활동가는 “이 세상에 ‘묻지마 범죄'는 없다. 범죄 표적은 여성과 아이, 노인 같은 절대적 약자”라며 “강자의 약자 살해가 분명한데 아직도 많은 언론이 여성 대상 범죄를 '묻지마 범죄'로 치부한다”고 붉은 줄의 의미를 설명했다. 지난 1월 한 남성이 서울 신림동에서 여자친구를 흉기로 살해한 사건을 언급하며 "여성혐오 범죄가 분명히 실재한다는 기본적 사실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3주기 추모제 참가자들이 행사장 맞은 편 강남역 10번 출구까지 침묵 행진을 하고 있다. /송주원 인턴기자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3주기 추모제 참가자들이 행사장 맞은 편 강남역 10번 출구까지 침묵 행진을 하고 있다. /송주원 인턴기자

오후 7시 추모제는 불꽃페미액션 활동가가 지은 추모시를 낭송한 후 피해자의 사망 날짜를 의미하는 5분 17초의 시간 동안 침묵 시위를 했다. 자유발언자의 발언도 이어졌다. "지정성별상 여성"이라 소개한 익명의 발언자는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을 두고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빨간 약(페미니즘 입문)’을 먹기 전인데도 여성혐오 범죄라고 확신했다"며 "여성혐오라는 저열한 범죄를 정신질환이라는 딱 좋은 도구로 덮으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신질환은 절대 범죄의 원인이 될 수 없다"며 여성혐오성 범죄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정신질환자라는 또 다른 사회적 약자를 혐오한다고 꼬집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 따르면 전체 범죄 중 조현병 환자 범죄율은 0.04%에 불과하다.

3년이 지났지만 여성을 혐오하는 사회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또 다른 발언자는 여성 고객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버닝썬 사건, 아내를 때려 숨지게 한 유승현 전 김포시의회 회장 등을 언급하며 여성을 향한 범죄가 끊이지 않는데도 국가적 대책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버닝썬 유착의혹 경찰이 무혐의 처리된 점, 남편이 아내를 때려죽인 사건 등을 보며 왜 같은 인간인데 여자라는 이유로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면서도 "항상 약자의 목소리가 사회를 바꾼다. 지금 우리의 분노와 행동으로 정치, 문화, 사회 전반을 바꿔야 한다"고 의지를 다졌다.

발언이 끝난 후 약 250명의 참가자들은 행사장 맞은 편 강남역 10번 출구까지 침묵 행진을 했다. 손에는 "묻지마 살해는 없다", "우리의 두려움은 용기가 돼 돌아왔다"는 피켓을 들고 ‘불금’을 즐기러 온 인파로 빽빽한 좁은 인도를 가로질렀다. 행인들도 조용히 멈춰서 바라봤지만 "페미니스트네, 페미니스트야" 라며 사진 촬영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날 행사는 취재진을 제외하고 사진 촬영이 금지돼 동행한 경찰들이 주의를 줬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3주기 추모제가 끝난 후 오후 10시 30분경 강남역 10번 출구 모습. 몇몇 시민과 관광객은 멈춰 서 메모와 꽃을 바라보기도 했다. /송주원 인턴기자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3주기 추모제가 끝난 후 오후 10시 30분경 강남역 10번 출구 모습. 몇몇 시민과 관광객은 멈춰 서 메모와 꽃을 바라보기도 했다. /송주원 인턴기자

강남역 10번 출구에 도착한 참가자들은 피해자를 위한 헌화를 하고 추모 메시지와 여성혐오 범죄 근절을 촉구하는 포스트잇을 붙였다. 수백 송이 꽃 옆의 포스트잇에는 "저는 여성이지만 운 좋게 살아남았습니다. 여성의 죽음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래도 분명히 세상은 바뀌고 있습니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날 행사에는 서울대학교, 인천대학교, 명지대학교 등 대학 내 페미니즘 소모임도 다수 참석했다. 대학생 A씨는 "페미니즘 입문 계기가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이라 추모 행사 때마다 꼭 참석한다"며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자라서 죽은 걸 인정하지 못하고 그저 비이성적 행위자의 범죄 행위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해 안타깝다"고 했다. 또한 "남성은 자신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여긴다며 (여성혐오 범죄를) 인정하기 싫어한다"면서도 "여성혐오 범죄는 인정 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라고 했다.

한편 강남역 10번 출구 앞 헌화 현장을 지켜보던 한 남성은 경찰에게 “얘네들 다 어떤 애들인지 아시잖나. 피해자의 죽음을 이용해먹는 거다”라고 행사를 방해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놓인 국화와 메모들은 이날 하루 내내 전시될 예정이다.

ilraoh_@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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