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화의 낭중지추] 그해 5월, 노무현과 쇠고기국밥
입력: 2019.05.19 00:01 / 수정: 2019.05.19 00:01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얼 23일 오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도식에서 인사말을 한 후 단상에서 내려오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얼 23일 오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도식에서 인사말을 한 후 단상에서 내려오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모두가 슬펐던 10년 전의 기억을 꺼내어

[더팩트ㅣ송은화 기자] "당장 회사로 나와야겠어!"

2009년 5월 23일 오전. 당시 근무하던 회사에서 이런 내용의 전화를 총괄국장으로부터 받았다.

이날은 토요일이었다. 모처럼 휴일의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던 터라 짜증부터 났지만, 2년차 기자였던 나는 아무런 소리도 못한 채 서둘러 준비해서 회사로 출근했다. 당시만 해도 '10분 대기조'였던 터라 선배가 부르면 아무 생각없이 나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는 식으로 지냈기에, 회사로 이동하면서야 사안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인지할 수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투신 자살', '노무현 사망'

너무 놀라 동기에게 전화하니, 이미 노 전 대통령이 실려간 양산부산대병원이라고 했다.

그리고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국민장이 치러진 29일까지 매일 김해 봉하마을로 출근하는 날들이 시작됐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전직 대통령의 죽음, 그것도 극단적 선택이라는 충격적인 사실 앞에 모두가 놀랐고 슬퍼했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추모 행렬에 그 슬픔과 아픔을 오롯히 느낄 짬도 없었다.

봉하마을을 찾은 조문객들은 낮 최고 30도 가까이 오르는 뙤약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분향소 입구부터 길게 늘어서 차례를 기다렸다. 초반에는 다소 어수선하고 우왕좌왕했던 봉하마을은 조문객들의 질서 의식과 관계자 및 봉사자들의 노력 속에 조금씩 안정감을 찾아갔다.

기자들도 분향소를 중심으로 여기저기 콘센트를 꼽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시멘트 바닥을 기자실 삼아 취재를 했다. 5월 말의 날씨는 생각보다 너무 더웠고 취재 환경도 매우 열악했지만, 누구하나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원래는 봉하마을 내 분향소까지 차로 들어올수 있지만, 이 기간 동안 차량이 통제되면서 마을 입구에 차를 주차해둔 뒤 30~40분 가량을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부산에서 김해 봉하마을까지는 1시간 가량이 걸려 매일 출퇴근 시간만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 때 일주일은 유달리 길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슬펐지만 취재 경쟁과 열악한 환경, 유달리 더웠던 날씨, 매일 쇠고기국밥만 먹자니 슬슬 체력적, 정신적 한계가 왔다. 특히 당시 국민장을 치른 날이 기자의 생일이었던 터라 미역국도 먹지 못하고 새벽까지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자 꽤 서글퍼 했던 것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지금 돌이켜보면 매년 돌아오는 생일을 왜 그리도 중요하게 생각했나 싶지만, 10년 전만 해도 생일을 꽤 중요하게 여기던 때여서 그랬던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왼쪽)과 문재인 대통령(당시 변호사)이 2009년 4월30일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 들어서고 있다. /공동취재단
노무현 전 대통령(왼쪽)과 문재인 대통령(당시 변호사)이 2009년 4월30일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 들어서고 있다. /공동취재단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10년 전인 2009년 5월 23일,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봉하마을에는 정말 상상할 수없이 많은 수의 조문객들이 매일같이 찾아왔다. 특히 영결식이 치러진 29일은 조문객들이 밤까지 봉하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다들 질서를 잘 지키는 등 차분한 모습을 보였지만, 사실은 모두가 매우 예민했다.

물론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이 같은해 4월 30일 검찰 조사를 받은 뒤 23일 만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유서에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밝히는 등 큰 고통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은 본인 뿐 아니라 자녀들까지 검찰 조사를 받게 된 것을 더 힘들어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거 일주일 전 비서관으로부터 입원이 필요할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 쪽에서 병실을 준비하기도 했으나, 노 전 대통령이 입원을 원치 않아 예약을 취소했다고 언론에서 보도했다. 하지만 기자가 소속됐던 언론사의 특별팀이 취재한 결과 노 전 대통령이 양산부산대병원측에 입원을 요청했으나, 병원측에서 VIP룸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한 것으로 확인됐다.

노사모 자원봉사자들은 2009년 5월 24일부터 '모든 언론사의 철수를 요구한다. 노무현 대통령 가치를 부정했던 모든 정치인과 언론인의 방문을 거부한다'고 밝히며 날 선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박희태 대표를 비롯해 정몽준·허태열·공성진·박순자 최고위원 등 당시 한나라당 지도부는 5월 26일 낮 노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봉하마을을 찾았으나 지지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조문을 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다들 슬픔과 화를 억누른 채 장례를 마무리할 때까지 악으로 버틴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2009년 5월 29일 봉하마을에서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갈 때 공포감을 느꼈다. 노 전 대통령에 적대적이었던 보수 매체 소속도 아니었으나 노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무서웠다. 밤이었고, 그들에게서 살기 어린 눈빛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을 만난다면 당시와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으나, 10년에는 어렸고 기자 경험이 부족했던 때라 더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어찌됐건 기억 속에는 '극심한 공포'로 저장돼 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지난 4월 2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노무현재단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 준비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남용희 기자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지난 4월 2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노무현재단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 준비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남용희 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10일 취임 이후인 23일 노 전 대통령 8주기 추모식에 참석해 "앞으로 임기 동안 (노 전 대통령을) 가슴에만 간직하겠다. 현직 대통령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밝혔다.

올해 취임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지난 4월 23일 서울 마포구 노무현재단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 준비 기자간담회'에서 "지난 10년간 상당히 긴 애도와 추모의 시간을 가져왔으니, 이제 시대적 과제를 재발견하고 사람 사는 세상을 실현하자는 뜻에서 발랄한 추모 행사를 준비했다"고 전했다.

노무현재단은 10주기 추모행사 표어를 ‘새로운 노무현’으로 정하고, 지난 11일 대전을 시작으로 광주와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시민문화제를 열고 있다. 공식 추도식은 오는 23일 오후 2시 김해 봉하마을 대통령 묘역에서 엄수될 예정이다. 10주기 추도식에는 조지 H.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가장 먼저 추도사를 할 예정이어서 관심이 쏠린다.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이었던 김경수 경남도지사는 5월 23일 추도식에는 참석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날 김 지사는 '드루킹 댓글 조작' 혐의로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리는 자신의 항소심 공판에 출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무슨 놀라운 평행이론인가.

재판 기일을 잡다 보니 우연으로 그렇게 됐겠지만 노 전 대통령의 서거일인 5월 23일 자신의 공판에 출석해야 하는 김 지사의 마음은 어떨까? 두 사람의 운명이 새삼 놀랍다.

기자 역시 매년 이 맘때가 되면 저절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각난다. 그리고 삼시세끼를 먹어서 물릴 때로 물렸던 봉하마을 쇠고기 국밥이 그립고 그립다. 마치 환한 노 전 대통령의 미소가 그리운 것 처럼.

2019년 5월 23일 김경수 경남지사의 공판이 끝나는대로 쇠고기국밥 한 그릇 먹어야겠다.

happy@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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