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인터뷰]"남북이 외면한 영웅, 약산 김원봉을 다시 평가하자"
입력: 2019.03.08 05:00 / 수정: 2019.03.10 18:59
약산 김원봉(1898~1958)의 외조카인 김태영(63)씨가 6일 경남 밀양시 의열기념관에서 약산의 사진을 어루만지고 있다./장우성 기자
약산 김원봉(1898~1958)의 외조카인 김태영(63)씨가 6일 경남 밀양시 의열기념관에서 약산의 사진을 어루만지고 있다./장우성 기자

약산 복권운동 벌이는 외조카 김태영씨..."진정한 독립유공자, 남북평화시대 상징"

[더팩트ㅣ밀양=장우성 기자]"돼지국밥 무을(먹을) 줄 압니꺼."

악수를 하는 둥 마는 둥 인사를 나누자마자 들려온 첫 마디는 시쳇말로 ‘츤데레’한 경상도 사투리였다. 서울에서 경부선을 타고 내려오는 내내 희뿌연 미세먼지와 함께 달렸다. 그런데 밀양에 내리자 다른 세상이 마중 나왔다. 추적추적 비가 먼지를 씻어내더니 이내 따뜻한 봄볕이 정수리를 어루만졌다. 그래서 ‘밀양’(密陽)일까.

김태영(63)씨는 "밀양사람이요"라는 말을 달고 다녔다는 전설적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1898~1958)의 외조카다.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의열단장 외삼촌을 둔 탓에 '빨갱이 가족'으로 몰리며 고단한 일생을 보냈다. 얼마 전에는 자신보다 더 한 많은 삶을 산 어머니를 잃었다. 약산의 막내동생인 고 김학봉 여사다.

재미사업가이면서 약산 김원봉 독립운동가 서훈 지정 운동을 해온 그는 상주로서 고향 경남 밀양에 돌아왔다. 두 해 전 찾아왔다가 뜻하지 않게 교통사고를 당한 뒤로 한동안 발길이 뜸했다고 한다. 불편해 보이는 다리를 옮기면서 "나랑 밀양은 서로 안 맞는 모양"이라고 너털웃음을 짓던 김씨는 약산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깊어졌다.

6일 더팩트와 단독 인터뷰를 가진 그는 "약산은 남북이 모두 외면했던 독립투사"라며 "약산의 독립유공자 서훈 포상은 남북 화해, 평화의 새 시대를 여는 상징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아직 정부의 반응은 차갑다. 김씨는 "(정부와) 공식적으로 서훈 문제를 이야기나 협의한 것은 전혀 없다"며 "국가보훈처 자문기구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가 약산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하라고 권고했던 게 전부"라고 말했다. 보훈처는 이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인 2015년 광복 70주년 때 "약산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 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 잔 바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유족들은 실망이 클 수밖에 없다. 김씨는 "서로 반목하고 증오하는 시대를 하루빨리 마감해야 한다"며 "언젠가 약산의 서훈이 이뤄질 수 있도록 시민들께서 힘을 모아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절기인 경칩에 가졌다. 밀양의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를 거닐며 약 2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는 다시 조명되고 있는 약산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긴 시간을 지나 땅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돌아가신 김학봉 여사가 남긴 유언이 있습니까.

어머니 평생 소원이 오빠(약산)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는 거였습니다. 대한민국이 항일운동 공적을 인정해주길 바랐죠. 그런데 삼일절 100주년 앞두고(2월24일)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가 서명운동도 벌이고 줄곧 노력했는데 결실을 못 보고 가셔서 안타깝습니다. 지난해 말 큰 수술을 받으셨지만 경과도 좋고 건강하셨어요. 갑자기 심장마비가 온 탓에 유언을 남길 틈도 없었죠.

-해방 후 지금까지 약산 후손들이 겪은 고초가 컸다던데요.

약산은 9남2녀 중 장남이었어요. 남동생 4명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이승만 정권에 처형됐죠. 사촌 5명도 그때 목숨을 잃었어요. 약산의 아버지는 산 속에 유기되다시피 했다가 사망했고요. 나머지 살아남은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잠적했어요. 약산의 가족이란 걸 숨겨야 살 수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유독 우리 어머니만 달랐죠.

지난달 90세로 별세한 고 김학봉 여사는 약산의 34살 터울 막내동생이었다. 영화 '암살', '밀정' 등으로도 소개된 의열단 활동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약산은 해방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부장 신분으로 귀국해 동생을 처음 만났다. 김 여사는 당시 전설적인 독립운동가를 맞이하는 환영인파로 발 디딜 틈 없었던 밀양 거리 현장을 생생히 증언하기도 했다. 1947년 8월 중학생 시절 서울 종로구 수표동에 있던 약산의 거처를 방문했다가 들이닥친 경찰에 연행돼 고문을 당하는 악몽도 겪었다. 평생 월북자의 동생이라는 멍에에 고통당하면서도 2005년 국가보훈처에 서훈 신청을 하는 등 약산의 복권을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어머니는 왜 그랬을까요?

우리 어머니 성격이 대단합니다.(웃음) 기가 세셨죠. 제가 외할머니 등에 업혀서 컸어요. 저를 업고 말없이 우시던 기억이 나요.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약산의 유품을 어머니께 맡겼어요. 귀한 사진 몇 장과 해방 후 중국에서 귀국할 때 장개석이 친필로 써서 선물한 족자였다고 해요. 그걸 물려받으면서 사명감 같은 게 있으셨던 것 같기도 해요. 약산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평생 고생했으니 죽기 전에 한을 풀고 싶기도 하셨을 테고요.

-생존한 약산 자손도 적지않겠군요.

자손은 많은데 약산 이야기만 나오면 숨는 분들이 많죠. 요즘도 절대 관여하지 않으려 해요. 돌아가신 사촌형 한 분은 사법시험에 합격했는데 신원조회에서 떨어지기도 했어요. 제 형도 육군사관학교 입학 꿈을 포기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살다가 50대 초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나마 이민간 제가 제일 형편이 나았으니까 약산 복권을 주장하는 거죠. 어머니도 장개석이 선물로 준 족자를 태워 없앴다고 해요. 혹여 우리들이 다칠까봐 그런 거죠. 우리 집이 이사를 수십번 했는데 조그마한 장롱이 있었어요. 그 안에 명주보자기로 싸놓은 약산 사진이 있었죠. 어머니가 보여주면서 "너희 외삼촌이 굉장한 독립운동가였는데 친일파 때문에 이북에 올라가셨다"고 했어요. 물론 바깥에서는 말하지 말라는 말도 잊지않았고요.

-김 선생도 고난을 많이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외할머니도 돌아가시고 먹고 살 방법이 없으니 저랑 3형제를 고아원에 맡겼죠. 초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약산 동생인 봉철이 외삼촌이 있었어요. 경남 도의원이었고 재산도 좀 있어서 우리 가족을 도와줬죠. 4.19혁명 후 장면정부 때 그 외삼촌이 집단학살당한 동생들과 밀양 사람들 유골을 수습해서 밀양공설운동장에서 합동제사를 지내줬어요. 선산에 묘도 모셨고요. 그런데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하고 나서 군인들이 유골을 다 파갔다고 해요. 부관참시한 거죠. 봉철이 삼촌도 잡아가서 우리 생계가 끊겼죠. 결국 외할머니도 굶기를 밥먹듯하다 비참하게 돌아가셨고 우리는 고아원밖에 갈 곳이 없었던 거에요. 어머니는 자식들을 고아원에 맡기고 절에서 밥도 해주면서 돈을 모았어요. 가끔 찾아와서 강가에서 한끼 해먹이고 용돈을 쥐어주는데 전 원망스러워서 쳐다보기도 싫었어요. 특히 저한테는 도망가지 말고 잘 버티라고 신신당부했죠. 제가 고아원 탈출했다가 잡혀서 두들겨맞기를 반복했거든요. 그러다 재혼해서 교편도 잡고 생활이 안정되니 우릴 데리러 왔죠. 고아원에 온 지 꼬박 6년 됐을 때였습니다.

일제 경찰이 확보했던 의열단의 사진. 오른쪽 끝이 약산 김원봉이다/국사편찬위원회
일제 경찰이 확보했던 의열단의 사진. 오른쪽 끝이 약산 김원봉이다/국사편찬위원회

-그 뒤로는 생활이 좀 나아졌나요.

고아원에서 나온 뒤로는 그런대로 살았죠. 하지만 친아버지 때문에도 연좌제가 있었어요. 제 아버지도 밀양 사람인데 약산의 열렬한 지지자였어요. 어머니도 약산 동생이라서 접근했다고 해요.(웃음) 전쟁 때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처형당할 뻔 했는데 생김새가 닮은 큰아버지가 대신 잡혀 목숨을 잃었죠. 죽을 고비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적도 많았다고 해요. 도망다닐 때 거름더미에 숨었다가 우익청년들이 찌른 쇠스랑이에 찔려서 크게 다쳤는데 후유증에 시달리다 결국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죠. 겨우 서른여섯살이었어요. 지금도 앓으시던 모습이 기억나요.

-그러다 미국으로 간 건가요.

고아원 시절부터 한국에 살기 싫었어요. 아니, 살 수가 없었죠. 고아원에서 미국 잡지를 많이 봤는데 왠지 가고 싶더라고요. 꽃다운 청춘 시절에 고민을 많이 했죠. 군 제대하고 26살에 결혼하고 나서 유학비자를 받아 일단 저부터 혈혈단신 미국에 들어갔어요. 대학에 입학했지만 가족을 데려오니 돈을 벌어야겠더라고요. 학업을 중단했다가 다시 재개하길 되풀이하다가 다행히 사업도 자리를 잡고 졸업장도 받았어요. 그 뒤로 미국생활은 비교적 편한 편이었죠. 친일파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사는 건 내 대로 끝이길 바랍니다. 제 아들도 외증조 할아버지(약산)의 존재를 알아요. 하지만 왜 그 일 때문에 아버지가 고생해야 했는지 이 사회를 이해 못 하죠. "아빠가 코뮤니스트 후손이라고 손가락질 당했다"고 하면 의아하고 우습다고 합니다.

-외삼촌 약산의 복권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어릴 때부터 약산에 대한 생각이 깊었어요. 어머니도 제가 나서길 간절히 원하고 나 역시도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문제의식이 컸어요. 제대로 된 역사를 알려야 하지 않느냐, 역사의 팩트는 뭐냐 끊임없이 질문했어요. 미국에 있었지만 한국 돌아가는 상황도 관심있게 보면서 언젠가 명예회복을 할 때가 오리라고 믿었죠. 그것도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40대 중반 정도 되니까 가능해지더라고요. 그래서 미국에서 약산김원봉장학회를 만들게 됐어요.

-정부는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약산 유공자 지정을 반대합니다.

약산은 친일파 때문에 내키지 않은 곳(북한)을 간 거에요. 당연히 부모형제 다 있는 남한에 살고 싶었죠. 자료로 확인된 것도 있고요. 당시 북에는 약산과 독립운동하던 동지가 많았어요. 그 분들이 친일파가 판치는 남한에서 살 수 있었겠습니까. 친일파는 적인데 적의 손아귀에 잡혀있고 싶었을까요. 당시 분위기에서는 독립투쟁 하신 분 상당수가 사회주의에 거부감이 강하지 않았죠. 요즘 사회주의 사상과 달라요. 백성을 노예처럼 부리는 왕정이나 귀족정에 반대하는 정치철학이 나오니 지식인들은 열광했죠. 프랑스 혁명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약산은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와 힘을 합치면서 자본주의적 강령을 받아들이고 귀국했는데도 친일파들이 위협한 거에요. 그럼 조선 땅에서 갈 데는 이북밖에 더 있었겠어요.

약산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되던 1948년 4월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몽양 여운형이 암살 당하는 등 테러가 난무하고 다음 표적은 약산으로 지목되던 상황이었다. 북한에서는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을 지냈으나 6.25전쟁 후 남측에서 넘어온 독립지사들과 민족화해·평화통일을 주장하다 김일성과 갈등을 빚어 1958년 10월경 숙청된 것으로 전해진다.

-약산 복권 문제를 놓고 현 정부와 논의하신 적은 있나요.

공식적으로 이야기나 협의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국가보훈처 자문기구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가 약산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하라고 권고했던 게 전부에요.(보훈처는 거부했다) 정부도 서훈을 줄지 말지 갈등이 있지 않겠어요. 어머니 빈소에도 찾아오지 않았어요. 내가 아는 한 이번뿐 아니라 지금까지 약산 문제에 관심을 보인 정치인은 드물었어요. 문재인 대통령이 박근혜 정부 시절 약산을 독립유공자로 모시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게 사실상 유일했던 것 같아요.

-문 대통령이 ‘빨갱이’ 공격은 친일잔재라고 한 3.1절 축사도 논란이 컸습니다.

맞는 말을 했죠. 해방 당시는 지금과 사상적 잣대가 완전히 달랐어요. 지식인 다수가 사회주의에 호감이 있던 때죠. 해방이 되니 친일파가 만들어낸 프레임이 ‘빨갱이’ 아닙니까. 그런 흑백논리로 정권을 차지해서 70여년간 내려온 거죠. 이제는 버려야 할 프레임입니다. 그런 낙인이 내 젊은 청춘도 비참하게 만들고 조국을 떠나게 만들었어요. 결혼식날에도 어떤 하객이 "알고 보니 빨갱이 집안이네"라는 거에요. 이성을 잃을 뻔 했지만 참았죠. 우리 어머니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중앙정보부에 6개월에 한 번씩 가서 조사를 받았어요. 정말 빨갱이라는 손가락질 많이 받았죠. 이제 수십년 지났는데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네요. 한때 우리와 전쟁했고 지금도 공산당이 집권한 중국, 베트남과도 잘 지내잖아요. 잊을 건 잊어야 해요.

약산 김원봉의 외조카인 김태영씨(63)가 6일 경남 밀양시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에 설치된 조선의용대 벽화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씨 오른쪽에 색으로 부각된 인물이 약산 김원봉이다. /밀양=장우성 기자
약산 김원봉의 외조카인 김태영씨(63)가 6일 경남 밀양시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에 설치된 '조선의용대' 벽화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씨 오른쪽에 색으로 부각된 인물이 약산 김원봉이다. /밀양=장우성 기자

-북한도 약산을 핍박하지 않았습니까.

북에 결코 좋은 감정은 없어요.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에 오래 산 영향도 있고요. 북한은 1인 독재정권인데다가 경제시스템도 문제가 많은 나라죠. 하지만 남북이 소모적 싸움을 멈추고 여건이 되면 북한도 인권을 개선하려고 하지 않겠어요. 그럼 약산 문제도 풀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북에서도 복권이 된다면 그게 바로 역사의 정상화죠.

-북미-남북관계가 호전되는데 기대도 됩니까.

약산을 서훈한다면 남북화해 시대의 상징이 될 겁니다. 남과 북이 모두 버린 독립투사이니까요. 약산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는 시대가 진정한 화합과 평화의 새로운 시대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친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줄 수도 있어요. 약간 주춤했지만 남북, 북미관계도 잘 되리라고 봐요. 지금은 ‘딜’ 단계니까 서로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밀고당기는 거죠. 남이든 북이든 미국이든 모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갈겁니다.

-약산의 최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데 어떤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믿습니까.

옥중 자결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봐요. 약산 비서였던 소설가 고 김학철 선생(1916~2001)의 증언이죠. 북에서 중국으로 탈출한 분이니 북 사정에 가장 정통하고 한중수교 전까지 북과 접촉도 빈번했죠. 집단수용소에 갇혔는데 어느날 수용소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내용의 옛 소련 비밀문서도 있었다고는 해요. 북에 묘소가 있다는 소문도 들었고요.

약산이 북에서 숙청당한 이후 생사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는 실정이다. 북한의 국립묘지 격인 평양 애국열사릉에는 김규식, 조소앙 등 북으로 넘어간 독립지사는 물론 춘원 이광수의 묘도 조성됐으나 약산의 묘소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때문에 비밀리에 처형됐거나 옥중 자결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된다.

-약산기념사업회 출범 준비는 어떻게 진행중입니까.

의열단 결성 100주년인 올해 11월 출범 목표로 현재 이사진을 섭외 중입니다. 유족은 직접 간여하지는 않고요.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애쓰고 계시죠. 요즘 젊은이들이 역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 하잖아요. 그들에게 의열단 정신, 의열단의 업적을 알리려고 해요. 전국 역사기행이라든가 대북 인도적 지원 등도 펼칠 계획이에요. 특히 독립운동 역사의 팩트를 밝히는 운동을 하려고 해요. 지금까지 정치적 왜곡이 많았잖아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창립한 흥사단 같은 위상과 역할을 하는 단체가 됐으면 합니다.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한핏줄끼리 서로 반목하고 증오하는 시대를 하루 빨리 마감했으면 좋겠습니다. 약산이 걸었던 길, 독립운동사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언젠가는 약산의 서훈이 이뤄지리라 믿습니다. 시민들께서 힘을 모아주십시오.

leslie@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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