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전 8시 서울 용산역 앞 열차 매표소엔 설 명절을 앞두고 기차 예매를 위해 모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용산역=문혜현 기자 |
"양심에 털 났냐!" 비판에도 꿋꿋…? 시민들 반응 '제각각'
[더팩트|용산역=문혜현 기자]"혹시 이분 기억나는 사람 있나요?"
철도경찰의 난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사람을 다 기억하고 있거든요?" 멀리서 불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 너희 양심적으로 좀 비켜라" 사람들의 언성이 높아졌다. 어디든 줄을 서다 보면 발생하는 '새치기' 때문이었다.
9일 오전 8시 용산역 기차 매표소 앞. 2019년 설 명절을 앞두고 귀향 열차 예매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 길게 늘어섰다. 이날은 호남, 전라, 강릉, 장한, 중앙, 태백, 영동, 경춘선 예매가 시작된 날이다. 앞에서 세 번째 줄까지 사람들은 역에서 제공한 기다란 돗자리에 앉아 기다렸고, 나머지는 서서 대기했다.
엄청난 인파와 혼돈을 예상했던 취재진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예상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 있었고, 철도경찰과 역무원들이 안내에 나서 시민들의 열차 예매를 돕고 있었다.
설 연휴 기간 본가에 가야 하는 기자도 표를 구하기 위해 줄을 섰다. 이날 오전 7시부터 모바일과 홈페이지에서 예매가 진행됐지만 실패했기 때문이다. 7시 10분, 예매 시작 시간보다 조금 늦게 홈페이지에 접속했을 땐 이미 예매가 끝난 상태였다. '전 국민 수강 신청'의 위력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9일 서울 용산역 열차 매표소 한 쪽 벽면에는 각 노선 열차 시간표와 신청서가 놓여 있었다. /문혜현 기자 |
매표소 한 쪽 벽면에 크게 붙어 있는 기차 노선과 시간을 살펴보고, 시간표와 매표 신청서를 챙겨 서둘러 대기 줄에 섰다. A4용지 가득 적혀있는 상·하행 열차 시간표를 확인한 뒤 날짜와 열차 종류, 차실, 이용구간, 열차 시각과 인원을 적어 넣었다.
예매 대기자들과 함께 서서 귀향을 앞둔 이들의 사연을 들었다. 전남 완도군이 본가인 A 씨는 "내려가는 고속버스는 끊었는데, 올라가는 걸 끊으려고 왔다"며 "집이 완도라 시간이 잘 안 맞는다. 인터넷과 모바일 예매법을 몰라 직접 왔다"고 말했다. 돗자리에 앉은 B 씨는 "가는 건 인터넷으로 끊었는데 ,오는 걸 못 끊어서 왔다"고 했다. 돗자리에 자리를 잡은 이들은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새벽부터 나온 탓에 한 쪽으로 누워 쪽잠을 청하기도 했다.
9일 서울 용산역에서 설 명절 귀향 기차 예매를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돗자리 위에서 열차 시간표를 보고 있다. /문혜현 기자 |
8시 35분, 본격적인 예매를 앞두고 줄을 재정비하면서 조용하던 대기 줄의 평화가 깨지기 시작했다. 지그재그로 서 있던 사람들의 줄 방향을 헷갈린 역무원들이 양 쪽에서 다른 안내를 하면서 뒤에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앞줄로 합류하는 등 혼선이 생겼다.
자신의 뒤에 있던 사람들이 앞으로 오는 걸 본 사람들 사이에선 일제히 항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줄을 제대로 서게 해라", "저희가 먼저 왔다니까요?", "줄이 잘못됐잖아요" 등 사람들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뒤쪽에서 "저 사람들보다 먼저 왔다"고 주장한 한 여성이 앞으로 왔다. 그 뒤에 같이 있었다는 한 남성도 제자리를 찾아왔다. 그들 앞에 있었던 듯한 다른 남성은 "이분들 제 뒤에 있었다"며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하지만 이들을 본 다른 줄의 남성은 "저 여자 뭐냐"라고 언성을 높였다.
자리를 옮긴 여성은 "저 일찍 온 거 맞다. 아저씨 몇 시에 오셨냐"며 반발했다. 이들은 잠시 '새치기'가 맞는지 아닌지 실랑이를 벌이다 조용해졌다. 역무원들도 다시 줄을 정렬했다.
9일 오전 용산역에선 설 기차 표 예매를 위해 기다리던 사람들 사이에 잘못된 안내가 이어지면서 새로운 줄(?)이 생기거나, 뒤에 있던 무리가 한꺼번에 앞으로 오는 등 혼란이 발생했다. /문혜현 기자 |
기자도 보기에도 뭔가 이상했다. 처음 왔을 때보다 앞에 사람이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이런 기분은 기자뿐만이 아니었다. 털모자를 쓴 한 여성은 코레일 측에 전화를 걸어 "새벽부터 기다린 사람도 있는데, 줄을 잘못 서는 사람들을 걸러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옆에 있던 중년 여성은 "내 뒤에 있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 앞에 있네"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털모자를 쓴 여성은 이날 새벽 5시부터 나와 줄을 섰다고 했다. 그는 철도 경찰을 불러 "저기 저 앞에 제 뒤에 있던 20여 명이 무더기로 서 있다"며 항의했다. 6시부터 나와 서 있던 중년 여성도 "양심적으로 나오라고 하라"며 지도를 요구했다. 줄 정리를 다시 해야 하는 상황.
철도 경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새치기 한 사람들이 몰려있다는 곳으로 간 그는 "언제 여기로 오셨냐" 묻고 정돈을 시도했다. 털모자를 쓴 여성은 뒤에서 "앞사람을 다 기억하고 있거든요?"라며 언성을 높였고, 다른 사람들도 "맨 뒤로 보내 맨 뒤로"라며 질서를 어지럽힌 사람들을 꾸짖었다.
털모자를 쓴 여성은 "저렇게 편하게 할 것 같으면 6시 반에 와서 했겠죠, 이렇게 새벽부터 서 있는데…"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사이 자신이 새치기한 것을 몰랐던 노부부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들은 "갑자기 나오라고 해서 나왔는데, 저기까지 가버렸다"며 다시 줄을 섰다. 주위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지"라며 노부부를 다독였다.
하지만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급기야 철도 경찰은 "혹시 이분 기억나는 사람 있나요?"라며 서로의 얼굴을 확인해줄 것을 물었다. 앞뒤로 서 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인상착의를 알 수밖에 없다. 때문에 누가 줄을 앞서갔는지도,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 있다.
9일 오전 서울 용산역에는 설 명절 기차 예매를 위해 모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들 줄 사이에 혼선이 생기자 새치기를 했다며 곳곳에서 반발이 나오기도 했다. /문혜현 기자 |
결국 젊은이들은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웅성웅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중년 여성의 외마디가 울려퍼졌다. "양심에 털 난 것들아, 너 때문에 표가 몇 개가 날아가냐!"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 일부는 웃기도 했고,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며 다시 줄을 서기도 했다. 9시가 되고 사람들은 순서대로 표를 끊기 시작했다. 기자도 줄을 선 지 한 시간 반 만에 표를 얻을 수 있었다.
새치기는 '순서를 어기고 남의 자리에 슬며시 끼어드는 행위. 또는 그런 사람'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이날 모인 시민들은 자의 혹은 타의로 새치기한 사람들 때문에 아침잠을 포기한 대가를 충분히 받지 못했고, 역 안에는 고성과 말다툼이 오갔다.
주변을 정리하던 역무원은 오늘 같은 상황이 흔하지는 않다고 했다. 그는 "간혹 있기는 하지만 오늘은 조금 소란이 있었다"며 대기줄을 주시했다. 이를 지켜보던 한 남성은 "누구 탓할 것 없어요. 다들 집에 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관리를 잘해야지"라며 철도 당국의 철저한 관리감독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