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현장] '미투 한달' 직격탄 맞은 대학로…"파산 위기죠"(영상)
입력: 2018.03.06 05:00 / 수정: 2018.03.21 23:46

연극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던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이 한산하다./종로구=변지영 기자
연극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던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이 한산하다./종로구=변지영 기자

거부감 느껴 발길 끊은 관객들, 신생·영세 공연부터 파산 위기

[더팩트 | 종로구=변지영 기자] "결국 우리 같은 을은 밥 굶는 처지가 됐죠."

지난 5일 오전 11시 서울시 종로구 혜화역 2번 출구. 매일 크고 작은 연극이 열리는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은 조용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웠음에도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이 태반이었다. 문을 연 티켓판매처와 소극장도 찾기 어려웠다.

연극계 미투운동의 여파가 대학로를 잠식한 듯했다. 인근 상인들은 입을 모아 "연극을 보러오는 관객이 줄어 상권이 상당히 위축됐다"고 토로했다. 특히 "주말 관객이 현저히 줄어든 것을 체감하고 있다"고 했다. 대학로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권모(47)씨는 "안그래도 대학로 전반 상권이 침체기"라며 "평일에 연극을 보고 식사를 하러 오던 40~50대 여성 손님들의 발길이 줄었다"고 전했다.

거리에서 음식점 전단지를 배포하던 김모(57) 씨도 텅 빈 대학로 분위기를 실감했다. 김 씨는 "사람이 없어 전단지를 못돌리겠다"고 했다. 대학로에서만 3년간 전단지를 돌렸는데 세월호 사건 다음으로 행인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무래도 요즘 터진 성추문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문화계 미투(Me too) 운동은 지난달 14일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을 맡으며 '연극계 거장'으로 불렸던 이윤택 연출가를 비롯해 지난 15일 극단 '목화'의 대표 오태석 등 연극계 거목들이 연이어 성추문에 휩싸이면서 시작됐다. 이는 사건과 관련이 없는 연극계 전반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연극의 메카'로 불리던 대학로 연극계가 직격탄을 맞았다.

연희단거리패가 해산되면서 사건이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경찰이 최근 미투 파문을 일으킨 이들을 중심으로 수사에 착수하는 등 곳곳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보이콧'으로 진화하는 모양새다.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연극계가 한동안 위기에 몰릴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연극에 애정이 많던 이들을 우선으로 실망한 연극계에 발길을 끊는 조짐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계 성추문에 거북함을 느낀 관객들은 연극 관람 대신 영화관이나 대극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날 대학로를 찾은 박모(43)씨는 "평소 연극을 보러 다니는데 오늘은 영화를 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유에 대해 묻자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연극계에 그런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 했을지 답답하다"면서 "즐겁게 관람하기 어려울 것 같아 당분간은 연극은 보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연극계 성추행 파문으로 대학로 상권이 직격타를 맞았다. / 변지영 기자
연극계 성추행 파문으로 대학로 상권이 직격타를 맞았다. / 변지영 기자

연극계 관계자, 어려운 생계에 따가운 시선까지

오전 11시 30분쯤, 닫힌 소극장 매표소들 사이로 한 매표 관계자가 일찌감치 매표대를 펼치고 있었다. 최근 연극 매출이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매표 관계자 B씨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최근 폭로된 연극계 거장들의 성추문 사건으로 인해 연극계 이미지 자체가 나빠졌다는 것이다.

B씨는 소극장에서 티켓 매표와 공연을 병행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B씨는 "극단 내 성추문이 연극계 보이콧으로도 번져 안그래도 열악했던 극단 관계자들의 생계가 더욱 위기로 내몰린 상태"라며 "연극을 보러 오신 관객들이나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기도 한다"고 했다.

이윤택 성추문으로 연극계에 몸담고 있다는 것 자체로도 심리적으로 위축되지만 생계가 더 걱정이라는 설명이다. 제 2의 이윤택이 언제든지 연극계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관객들의 불신 때문에 티켓 불매 운동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B씨는 "성추문 사건 때문인지 하루 6만 원 정도 벌 수 있던 현장티켓 구매도 사라졌다"면서 "몇몇 관객들은 인터넷으로 티켓을 미리 구매하고 연극만 보고 가는 편"이라며 "당장 한 달에 40만 원을 손에 쥐기도 어려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제 2의 이윤택, 조증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관객들의 불신에 연극계 관계자는 따가운 눈총에 시달렸다. /변지영 기자
제 2의 이윤택, 조증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관객들의 불신에 연극계 관계자는 따가운 눈총에 시달렸다. /변지영 기자

최근 연극계 불어닥친 성추행 파문으로 극단을 지키고 있던 젊은 배우들 사이로 이제 '모 아니면 도'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특히 관객이 적었던 신생 공연들은 존폐 위기에 놓였다. 빠듯한 비용으로 운영되는 소극단의 구조상 새로운 공연을 시작했거나 관객이 적은 공연은 극장 대여비, 관계자 비용 등 각종 비용을 메꿔야하다보니 열약한 곳일 수록 문을 빨리 닫게되는 구조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또 다른 극단 배우 C씨는 "한 공연은 문 닫기 직전이다. 한 공연 당 5만 원 안팎을 받는데, 공연 취소가 이어져 공연비 없이 지내는 날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는 "이 업계에선 '버티는 게 살아남는 법'이라고 서로 위로한다"며 썰렁한 대학로 분위기를 전했다.

연극애호가들, 특정 배우의 연극 보이콧 하기도

이처럼 대학로 상권이 얼어붙은 것에는 대학로를 꾸준히 찾았던 연극애호가들 사이에 퍼진 회의감과 배신감이 주요인으로 거론된다. 연극애호가 박지선(29)씨는 "최근 대학로 갈 맘이 나지 않는다. 같은 작품을 수차례나 볼 정도로 좋아했는데, 연출가가 성추문과 연루됐다는 것을 알고나니 작품들이 더 이상 좋은 작품으로 보이지 않게 돼 속상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박 씨는 "이런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문화가 뿌리뽑히지 않는다면 존중했던 연극을 의심하거나 연민하게 될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연극애호가이자 연극배우 지망생인 이해나(28) 씨 역시 "열정 있는 배우지망생과 연극애호가들 사이에서 허탈함과 배신감이 팽배하다"고 했다. 열악한 환경에 있던 이들을 이용했던 미투 가해자들이 다시 한 번 연극계에서 묵묵히 연기하는 관계자들을 힘들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에 배신감이 커진다는 것이다. 대학생 임재민(26)씨는 "열정있는 배우들이 공연한다고 믿었는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연극에 대한 보이콧 움직임으로 대학로 일대를 찾는 발길이 뚝 떨어졌다. / 변지영 기자
연극에 대한 보이콧 움직임으로 대학로 일대를 찾는 발길이 뚝 떨어졌다. / 변지영 기자

연극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성추문과 연루된 배우나 관계자가 포함된 특정 연극들을 보이콧 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이 씨는 "연극애호가들은 보통 선호하는 연극의 1~2열은 미리 예매하는 편이라 경쟁이 치열하다. 하지만 3주 전부터 특정 배우의 1~2열 자리가 풀려 온라인 예매가 수월해졌다"면서 "더블캐스팅인 작품이었는데 그 배우 작품만 앞자리가 풀렸다는 것은 일부러 연극을 보지 않는 연극애호가들의 보이콧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연극계 관계자들은 '미투운동'이 열정적으로 예술에 임하고 있는 연극 배우 및 관계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지는 않을지 우려하는 눈치다. 관객이 감소하면서 신생 연극이나 작은 극단들이 무너지는 등 연극계의 흐름이 끊길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로 일대 공연장 임대업자 D씨는 <더팩트>와 통화에서 "지난해 비해 올해는 임대 문의가 한 건도 없었다"면서 "소극장에서 수 년을 버텨왔던 극단 관계자들도 미투 운동의 여파로 새로운 공연 기획은 꿈도 못 꿀만큼 생활이 퍽퍽해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결국 시간이 약일까. 서울연극센터 관계자는 "연극계에 오랜기간 암묵적으로 진행됐던 성추행 문제가 조속히 해결돼 대학로가 활력을 되찾았으면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연극계의 부도덕성과 팽배한 불합리가 대충 무마되기보다 제대로 개선되길 바란다"며 "성실히 연극에 임하던 분들이 다시 서는 대학로 무대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hinomad@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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