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현장] 고법 "국가가 성매매 방조"…눈물 흘린 '미군 기지촌 위안부' (영상)
입력: 2018.02.09 05:31 / 수정: 2018.02.09 10:32

기지촌 미군 위안부들의 소송을 대리한 변호인단 등 단체가 8일 항소심 선고 결과 뒤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소희 기자
기지촌 미군 위안부들의 소송을 대리한 변호인단 등 단체가 8일 항소심 선고 결과 뒤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소희 기자

1심보다 더 넓은 인정…"정부 관리로 미군에 성매매"

[더팩트 | 서울고법=김소희 기자] "이번 판결은 국가가 사실상 포주 노릇을 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기지촌 위안부 국가배상 소송 원고인들의 공동대리인 하주희 변호사는 8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이번 판결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하 변호사의 발언에 이날 자리한 기지촌여성인권연대 , 한국여성단체연합, 세움터 관계자들을 비롯한 원고들은 환호를 보냈다. 일부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이날 오후 2시 서울고등법원 민사22부(부장판사 이범균)에서 국내 주둔 미군을 대상으로 한 기지촌에서 성매매에 종사했던 이모 씨 등 여성 117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열렸다. 재판 시작 전부터 재판정은 방청객으로 가득찼다. 겨우 방청석에 자리한 기지촌 위안부 당사자는 "오늘 잘 돼야 하는데"라며 옆에 앉은 동료의 손을 잡기도 했다.

이날 재판부는 "정부가 원고 전원은 각각 300만 원에서 700만 원씩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국가의 성매매 방조 책임을 첫 인정한 것이다. 이같은 선고에 기지촌 위안부 당사자들은 짧은 감탄사를 내뱉기도 했다.

재판부는 "주한미군을 고객으로 하는 접객업소의 서비스 개선 등 피고의 행위는 외국군의 사기 진작·양양이나 외화 획득을 위해 외국군을 상대로 한 기지촌 위안부들의 성매매 행위 자체 또는 성매매 영업시설을 개선하고자 한 것으로서 기지촌 위안부의 성매매를 조장했다"며 "이런 행위는 전국 기지촌 운영·관리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판단했다.

또 "애국 교육 등을 통해 국가가 성매매를 정당화·조장했다"는 원고들의 주장도 인정됐다. 재판부는 "위안부들을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로 치켜세우거나 고위 공무원들이 나서 각종 혜택을 약속하며 국가는 기지촌 내 성매매를 방치·묵인하거나 최소한도의 개입·관리를 넘어, 애국 교육 실시 등을 통해 기지촌 내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조장·정당화했다"고 지적했다.

성병에 걸린 여성들을 격리 수용한 부분에 대해서도 1심과 달리 "1심에서 인정한 규정 시행 이후에도 법령 규정 없이 강제 수용한 행위 등은 모두 위법하다"고 밝혔다. 다만 국가가 불법행위 단속 예외지역으로 지정해 성매매 단속을 면제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1심과 마찬가지로 "국가 책임을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선고가 끝나자 재판정을 빠져 나온 이들은 서로를 얼싸안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서로 "축하한다"며 어깨를 두드리고, "이제부터 시작이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소송을 함께 한 신영숙 세움터 대표는 "걱정하는 마음으로 (재판에) 참석했던 많은 원고가 눈물을 흘렸다"며 "법정에서는 가슴 먹먹함과 눈물이 항상 함께했다. 4년간 긴 법정 투쟁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신 대표는 이어 "미군 기지촌 위안부 제도는 군 위안부 제도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한국전쟁시 발생된 한국군 위안부까지 이어질 수 있다"며 "이번 판결로 (피해들이) 명확하게 입증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고 했다.

백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는 "그 어려운 성폭력 피해 경험을 복기하면서 말해주신 (기지촌 위안부) 선생님들 존경하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이어 "우리가 모두 힘을 합쳐서 역사를 한 걸음 진전시켰다"며 "더 나아가서 온전한 피해보상과 구제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지촌 연구자인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번 판결 의미에 대해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이러한 판결 배경에는) 판사님의 훌륭한 판단도 있겠지만, 지금 일어나는 '미투(Me too)' 현상이나 여성들이 지금까지 받은 성폭력 등에 대한 의식 전환이 일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소송에 참여한 박영자(62) 씨는 "3년 7개월을 기다려 판결을 얻었다"며 "우리와 함께 착취와 수치를 벗어나지 못한 기지촌 동료,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아픔이 치유되고 정부가 사과하는 그날까지 계속 싸우겠다"고 했다.

이 씨 등은 지난 2014년 "성매매가 쉽게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가 기지촌을 조성하고, 해당 지역을 불법행위 단속 예외지역으로 지정해 성매매를 단속하지 않았다"며 "그에 따른 신체적·정신적 손해에 대한 위자료를 1인당 1000만 원씩 지급하라"고 소송을 냈다.

지난해 1월 20일 1심인 서울중앙지법 제22민사부(부장판사 전지원)는 정부가 기지촌을 설치·운영한 것을 불법행위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57명(당시 전체 120명)에게만 500만 원씩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원심은 국가가 전염병예방법 시행규칙이 시행된 1977년 8월 19일 이전에 성병에 감염된 기지촌 여성들을 강제로 격리수용한 것만 불법이라고 판단했다. 국가가 미군 기지촌 위안부들의 성매매를 조장한 점, 경찰이나 공무원 등이 기지촌 성매매 알선업자와 유착해 각종 불법 행위를 방치한 점, '애국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기지촌 여성들에게 성매매를 가요한 점 등은 인정하지 않았다.

ks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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