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나이 인플레 시대의 나잇값 무게
입력: 2018.01.16 05:00 / 수정: 2018.01.16 06:57

의료기술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류의 수명이 크게 늘어나면서 예순이 됐다고 해서 잔치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사진은 1958년생으로 무술년에 환갑을 맞는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가 지난 4일 사무처 당직자 간담회에 앞서 생일 축하 케이크를 받고 있다. /문병희 기자
의료기술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류의 수명이 크게 늘어나면서 예순이 됐다고 해서 잔치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사진은 1958년생으로 무술년에 환갑을 맞는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가 지난 4일 사무처 당직자 간담회에 앞서 생일 축하 케이크를 받고 있다. /문병희 기자

[더팩트 | 임태순 칼럼니스트] 해가 바뀐 지도 꽤 된다. 또 한 살 더 먹은 것이다. 58개띠생들은 올해 환갑이 된다. 예전 같으면 환갑이 되면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다. 집안 식구는 물론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했다. 수명이 길지 않던 시절 예순은 살 만큼 살았다는 장수의 표징이자 인간적으로도 원숙하다는 표시였다.

공자는 그래서 어떤 말을 들어도 귀가 순해진다고 해서 예순을 이순(耳順)이라고 했다. 그만큼 환갑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100세 시대의 환갑은 무게감이 예전에 비해 훨씬 떨어지는 것은 물론 가볍다는 느낌마저 든다. 이제 예순이 됐다고 해서 잔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신 친구 또는 동료들이 케이크를 놓고 축하할 정도로 여느 생일과 다름이 없게 됐다.

의료기술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류의 수명이 크게 늘어났다. 20세기 초기 전 세계인구의 출생시 기대수명은 40에 못 미쳤으나 지금은 선진국의 경우 80을 넘어 100세를 눈앞에 두고 있다. 불과 100년 사이에 수명이 2배 가까이 길어진 것이다.

한국의 집에서 전통 방식으로 환갑을 축하는 전통 공연. 일상에서 환갑 잔치를 보는 경우는 이제 거의 없는 시대가 됐다./더팩트DB
'한국의 집'에서 전통 방식으로 환갑을 축하는 전통 공연. 일상에서 환갑 잔치를 보는 경우는 이제 거의 없는 시대가 됐다./더팩트DB

수명이 연장된 것은 좋지만 나이가 제 값을 못하는 세상이 된 것 같다. 나이에 비해 나이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나이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 나이에 비해 저(低)연령화돼 있어 나이에 비해 어려진 느낌을 받는다. 옛날에는 ‘나이에 비해 의젓하다’ ‘어른스럽다’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었으나 요즘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된 것은 사회여건의 변화로 학업, 취직, 결혼 등 모든 것이 늦춰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는 20대에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진출해 30세 이전에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지금은 고등교육의 보급이 확대돼 공부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사회에 진출하는 시기도 늦어지고 결혼연령도 덩달아 높아졌다. 아무래도 직장, 가정 등 사회적 굴레가 씌어지면 거기에 맞는 행동과 처신을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똑 같은 30세라도 2018년과 1970년의 서른 살은 다르다. 1970년의 서른 살이 훨씬 더 어른답고 성숙하고 책임감이 있다. 반면 요즘의 30세는 부모에게 얹혀 지내는 ‘캥거루 족’이라는 말에서 보듯 독립심이나 자립심이 약하고 철이 덜 들어 보인다. 공자는 마흔을 세상일에 유혹되지 않는 불혹(不惑)이라고 해 높이 쳤다. 그러나 요즘 40세는 중년의 진중함은커녕 많은 유혹에 흔들리고 있다.

과거에 비해 인간의 건강상태가 좋아진 것도 나이 인플레의 한 요인이다. 1970, 80년대만 해도 운동선수는 서른이 넘으면 대부분 은퇴했지만 이제는 마흔이 돼도 현역생활을 할 정도가 됐다. ‘글로벌 고령화 위기인가 기회인가’라는 책을 보니 “현재 70세는 15년 전의 55세에 버금가는 체력과 건강, 인지력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70세 노인이 55세 장년처럼 팔팔하니 굳이 점잖을 떨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나이에 비해 젊게 지내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잇값을 못 해선 안될 것이다. 피터 팬처럼 영원히 소년에 머물 수도 없고 머물러서도 안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철이 든다는 것이고, 젊은 사람에 비해 좀 더 분별있게 행동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이가 들면 지식은 몰라도 지혜는 생기는 법이다. 집안에 어른이 있어야 하듯이 사회에도 어른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안정이 되고 중심을 잡는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조회시간에는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였다. 그 때 1학년으로서 6학년 형님들을 보면 의젓해 보였다. 그러나 내가 6학년이 됐을 때 후배들이 과연 나를 의젓한 형님으로 여길까 생각해보곤 했다. 나도 머지않아 인생의 ‘6학년’(60대)이 된다. 그리고 ‘7학년’(70대), ‘8학년’(80대)이 된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어른이 되지 못한 인간이 훌륭한 노인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원로, 어른은 아니어도 6학년 나이에 맞는 나잇값은 한다는 말은 듣고 싶다.

thefact@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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