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굿바이! 어머니의 ‘남존여비’
입력: 2017.09.19 11:42 / 수정: 2017.09.19 16:42

‘내 아들은 귀하고 남의 딸은 귀하지 않다’는 어머니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은 균형을 이루기 어렵다. 사진은 가족친화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는 KT&G./KT&G 제공
‘내 아들은 귀하고 남의 딸은 귀하지 않다’는 어머니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은 균형을 이루기 어렵다. 사진은 '가족친화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는 KT&G./KT&G 제공

[더팩트 | 임태순 칼럼니스트]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높고 여자는 천하다는 뜻으로, 남성 중심의 전통적인 유교관이 반영된 말이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진출이 확대되고 지위가 향상되면서 남존여비의 의미도 퇴색되고 있다. 대신 세태가 반영된 새로운 ‘남존여비’가 많아지고 있다. 인터넷을 보니 ‘남존여비’ 건배사가 인기라고 한다. 송년회에서 건배사로 이 말을 선창하면 여성들이 ‘우’ 하며 야유를 퍼붓다 “남자의 존재는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데 있다”고 하면 환호로 바뀐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남존여비’는 ‘남자의 존재는 여자한테 (살살) 비는데 있다’라는 뜻이다. 20여 년 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로, 점점 아내의 위세에 눌려 지내는 공처가들의 현실을 애교있게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는 “힘이 있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 죽어 지낸다”는 남편들의 허풍 또는 애교도 담긴 듯 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부부관계를 빗댄 좀 야한 ‘남존여비’도 있지만 생략한다.

신종 ‘남존여비’가 쏟아지는 것은 남성 우위의 남녀 관계가 동등하거나 양성평등으로 균형추를 맞춰가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새로운 ‘남존여비’는 전통적인 남존여비의 뜻을 극적으로 반전시키는 재미도 있다. 건배사 남존여비처럼 나 역시 내가 아는 남존여비로 힘든 상황을 넘기거나 분위기를 바꾼 적이 한두 번 있다.

몇 년 전 사촌 형이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해 병문안을 갔다. 호스피스는 말기 암 환자들이 치료 대신 통증을 완화하며 지내다 임종하는 곳이다. 사촌 형 역시 예순의 많지 않은 나이였지만 말기 암이어서 이 곳에 가게 됐다. 회복 불능인 환자를 위문해야 하는 힘든 자리여서 동생 부부와 함께 찾아뵀다. 승용차를 몰고 가면서도 무슨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고민했지만 뾰족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빨리 완쾌해야 한다’거나 ‘힘내라’라는 일상적인 인사말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죽음 대기소’여서 어둡고 착 가라앉아 있을 것으로 여겨졌던 호스피스 병동은 예상과 달리 밝고 제법 활기찼다. 여기저기서 찬송가 소리가 들리고 간호원, 의사들도 분주히 움직였다. 비록 생을 얼마 남겨두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오는 곳이지만 여기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며, 아무리 시한부 인생이라도 죽기 전까지 삶은 계속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분위기에 마음이 누그러져 자연스럽게 인사말을 건넸다. 그리고 “병수발을 들고 있는 형수한테 잘 하라”면서 “‘남존여비’가 무슨 뜻인 줄 아느냐”고 농담을 던졌다. 남자가 우위라는 말 아니냐는 그에게 요즘은 그런 뜻이 아니라면서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자 사촌형은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난 그렇게 비굴하게 살지 않겠다”며 호기를 부렸다. 뜻하지 않은 ‘남존여비’ 논쟁으로 우리들은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는 까맣게 잊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중에 형수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그는 실은 암 투병생활을 하면서 ‘고생만 시키고 함께 해외여행 한 번 가보지 못해 미안하다’며 고백을 했다고 하니 동생들 앞에서 허풍을 떤 것이다.

얼마 전 질녀 결혼식이 있었다. 폐백을 받으면서 작은 아버지로서 뭔가 덕담을 해야 할 텐데 고민하다 불쑥 ‘남존여비’가 무슨 말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순간 신랑이 어리둥절해 하고, 폐백을 도와주던 아주머니도 ‘요즘 분위기에 맞지 않게 웬 생뚱맞은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신랑에게 뜻을 설명해주고 항상 ‘신부에게 살살 빌면서 살라’고 하자 폐백장에 웃음꽃이 ‘팡’ 터졌다.

며칠 전 찜질방에서 중년 여성들의 대화를 듣게 됐다. 불가마에서 땀을 빼고 있는데 50대 초반의 여성이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요리를 배우고 있는데 맛난 음식을 해줘 아주 예뻐 죽겠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아들이 결혼해 아내에게 음식을 해 갖다 바치면 그런 꼴은 못 볼 것 같다”면서 옆 사람의 동의를 구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남존여비란 말인가. ‘내 아들은 귀하고 남의 딸은 귀하지 않다’는 뜻 아닌가.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구닥다리 남존여비의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아무래도 사회 분위기에 어울리는 남존여비가 정착되려면 어머니들부터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다. 어머니가 아들과 사위, 딸과 며느리를 차별하지 말고 내 자식처럼 똑같이 공평하게 대해주면 사위와 장모, 며느리와 시어머니간의 갈등과 분란이 없어질 것이다. 내 아들은 누군가의 사위가 되고, 내 딸은 누군가의 며느리가 된다. 어머니의 ‘남존여비’가 균형을 맞춰야 진정한 남녀평등이 이루어지고 가정도 잘 굴러가지 않을까.

thefact@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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