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아시아 최초 시민혁명이자 성공한 혁명
입력: 2017.04.19 09:04 / 수정: 2017.04.19 09:04
419혁명 57주년. 419혁명 발발 57주년을 맞아 419혁명의 의미 등이 주목 받고 있다. /국가보훈처
419혁명 57주년. 419혁명 발발 57주년을 맞아 419혁명의 의미 등이 주목 받고 있다. /국가보훈처

419혁명 도화선 된 3·15부정선거는?

[더팩트ㅣ박대웅 기자] 1960년 4월19일 '4·19혁명'이 발발했다. 아시아 최초의 시민혁명이자 6·25 전쟁 휴전으로 일단락된 지 불과 7년 만에 일어난 성공한 혁명이다.

오늘(19일)은 제57주년 4·19혁명 기념일이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이 자행했던 3·15부정선거로 촉발된 이날의 외침으로 이승만 장기 독재체제는 붕괴됐다.

이승만 정권 붕괴의 단초가 됐던 3·15부정선거는 모두 9개의 주요 부정행위가 있었다. ▲전국적인 유령유권자 조작 ▲4할 사전투표 ▲입후보 등록의 폭력적 방해 ▲유권자 협박 ▲야당인사 살상 ▲투표권 강탈 ▲3~5인조 공개투표 ▲야당투표관인 축출 ▲부정개표가 그것이다. 말 그대로 3·15부정선건는 민주주의를 유린한 '부정선거 백화점'이다.

3·15부정선거 직후 마산에서 이에 항거하는 대대적 시위가 발생했다. 평화적 시위였음에도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8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했다. 이후 국회조사단 조사에서 이기붕 당시 부통령은 "총은 쏘라고 줬지 갖고 놀라고 준 게 아니다"라며 발포 명령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4·19혁명의 배경으로 높은 교육열을 꼽을 수 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이후 1960년까지 대학생 수는 9만7000여명으로 해방과 비교해 12배 이상 늘었고, 높은 교육열로 한국인의 문자 독해율은 22%에서 79%로 껑충 뛰었다. 감시자로서 시민의 역할이 강화된 셈이다.

아울러 높은 청년 실업율도 혁명에 일조했다. 대학에 진학한 청년은 늘었지만 당시 청년 실업율은 50%에 달할 정도로 극심했다. '대학은 예비 실업자 양성소'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1960년 4월19일 '피의 화요일'이 밝았다. 경찰은 맨몸의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이날 하루 서울에서 104명, 부산에서 13명, 광주에서 6명이 사망했다. 모두 123명이 민주주의를 외치다 산화했다.

사망자 중에는 초등학생도 있었다. 수송국민학교(현 초등학교) 6학년 전한승(당시 13세) 군이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그러자 1960년 4월25일 시위에는 초등학생들까지 나서 '부모 형제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참여했다.

남녀노소를 망라한 전 국민적 저항에 결국 이승만 독재정권은 막을 내렸다. 이어 1960년 7월29일 총선에서 이른바 '장면 내각'으로 불리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다. 내각책임제를 채택해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으로 윤보선 전 대통령이, 총리는 장면 총리가 취임했다. 하지만 1961년 5·16쿠데타로 장면 내각은 붕괴됐다.

bdu@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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