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인터뷰] '韓 최초 재즈 빅밴드' 신관웅 "'K재즈' 꽃피우는 게 목표"
입력: 2016.11.16 05:00 / 수정: 2016.11.16 05:00

재즈 피아니스트 신관웅이 국내 최초 재즈 빅밴드를 결성한 배경에 대해 인터뷰했다. /이덕인 기자
재즈 피아니스트 신관웅이 국내 최초 재즈 빅밴드를 결성한 배경에 대해 인터뷰했다. /이덕인 기자

[더팩트 | 김경민 기자] '최초'라는 단어만큼 위엄 있는 수식어가 또 있을까. '최초'는 역사의 출발점이다. 또한 그에 뒤따르는 역경과 희생을 감내한 영웅에게 부여되는 증표와 같다. 재즈 피아니스트 신관웅(70)은 '최초'라는 수식어와 가장 걸맞은 음악계 영웅이다.

신관웅은 1955년 국내 유일 정통 재즈 빅밴드를 처음으로 결성한 주인공이다. 재즈라고 하면 전형적인 외국 음악으로 생소하게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 그는 클래식 오케스트라와 같은 재즈 빅밴드의 필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재즈 불모지'를 개척했다. 그의 발자국을 따라 국내에서도 재즈라는 음악의 뿌리가 단단히 내려졌고, 누구나 재즈라는 단어를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현재가 만들어졌다.

최근 <더팩트> 취재진은 신관웅과 만나 선구자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눴다. 그에게서 한국에 빅밴드라는 문물을 심기까지 고달팠던 삶과 'K재즈'의 세계화를 꿈꾸는 희망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살아 있는 역사였다.

신관웅이 재즈의 창조적인 변주를 매력으로 꼽았다. /이덕인 기자
신관웅이 재즈의 창조적인 변주를 매력으로 꼽았다. /이덕인 기자

- 시대적으로 생소했던 재즈에 빅밴드를 만들 생각을 한 이유는.

"클래식은 피아노 트리오 사중주 같은 실내악이 있다. 마찬가지로 재즈에도 빅밴드가 있어야 오케스트라 같은 웅장한 사운드가 나올 수 있다. 그런 걸 원했는데 불행하게도 한국에는 없었다. 일본에 빅밴드 페스티벌을 구경하러 간 적이 있다. 하루종일 하는데 오전에 다섯 밴드, 오후에 다섯 밴드가 공연을 하더라. 사운드보다 밴드에 겹치는 사람이 있는지 유심히 봤는데 다 다르더라. 재즈 인구가 많고 사운드도 좋았다. 빅밴드는 그야말로 재즈의 꽃인데 없으면 안 되겠더라. 그래서 한국에 와서 빅밴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최초였던 만큼 그 과정도 험난했을 것 같다.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다. 고(故) 이봉조 전 TBC 관현악단장 등과 함께 방송국 악단을 위주로 빅밴드를 시작했다. 엄청난 시련이 닥친 거지. 경제적인 문제도 있고 연주하거나 연습할 장소도 없었다. 어렵게 끌고 왔다."

- 지친 적은 없었나.

"지쳤던 것은 생활이 어렵다는 점이다. 들어주는 사람도 없고 일할 장소가 없다. 한번은 하도 일할 곳이 없어서 주점에서 공짜로 재즈를 연주했다. 그런데 업주가 '왜 맨날 연습만 하느냐'고 하더라. 그가 듣기엔 그게 그거였던 거지. 댄서들도 재즈의 엇박자에 춤을 추기 어려워해서 쫓겨났다. 쌀이 떨어지니까 가수 반주를 하며 외도한 적도 있다. 그래도 얼마 있지 못하고 나왔다.

개척자처럼 힘든 삶이 없다. 개척자가 황무지를 개간하려면 얼마나 힘들겠나. 그래도 땅을 닦아놓으면 후배들이 기름지게 만들겠지. 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재즈 1세대가 험한 역경에도 그런 길을 닦아놨다. 지금은 학교에서 교편도 잡고 교수님 소리도 듣고 흐뭇하다."

신관웅이 재즈를 공부하는 데 어려웠던 경험을 털어놨다. /이덕인 기자
신관웅이 재즈를 공부하는 데 어려웠던 경험을 털어놨다. /이덕인 기자

- 재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사연이 있나.

"클래식 학도였는데 유명한 피아니스트 한동일을 보고 롤모델로 삼았다. 불행하게도 집이 시골이었고 피아노도 없어서 풍금을 가지고 시작했다. 교본도 없이 무턱대고 쳤다. 중학교에 가서 60 건반밖에 없는 '베이비 피아노'로 연습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집안 사정이 너무 어려워서 그만뒀다. 아버지 병환으로 공부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러다가 우연히 미국 흑인의 연주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새로운 세계였다. '필'이 꽂혔지."

- 재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매력이 무엇인가.

"재즈는 마약과 같다. 한번 맛을 보면 헤어나오지 못한다. 클래식은 악보대로 쳐야 한다. 악상을 틀리면 안 되지만 재즈는 연주자의 음악이다. 자기가 알아서 치는 거다. 멜로디나 하모니를 바꿔 연주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모든 연주를 테마에 맞게 즉흥적으로 해야 한다. 머릿속에 있는 것들은 연주하는 매력에 빠져들었다. 작곡가가 아닌 연주자의 의도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동료들 중에 재즈를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다른 분야로 간 사람도 있다. 나는 꿋꿋하게 남아서 이 자리를 지켰다고 할까. 남는 건 숱한 고생만 하고 명예만 남았다(웃음)."

- 아직 재즈를 어렵게 생각하는 대중이 많다.

"재즈는 어느 순간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연주자의 철학이 나올 수 있으니 관객이 듣기엔 어렵고 난해하다. 하지만 K팝처럼 자주 듣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다."

신관웅이 음악 후배들에게 자신만의 색깔을 담은 음악을 구축하라고 제시했다. /이덕인 기자
신관웅이 음악 후배들에게 자신만의 색깔을 담은 음악을 구축하라고 제시했다. /이덕인 기자

- 재즈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설 자리가 없다고 하지 말고 연주할 장소를 찾아다녀야 한다. 무료 공연도 하고 팬을 만들어야 재즈가 산다. 일단 연주를 최고로 여겨야 한다는 게 중요하다. 한국에서 언제부턴가 유학파가 생겼다. 그런데 외국 뮤지션 프로필을 보면 학벌이 절대 안 나온다. 누구와 어떤 연주를 했는지 적힌 경우는 있다. 빅밴드에서 연주를 해봐야 훌륭한 재즈 뮤지션이 될 수 있는데 실상 한국에서는 그런 현실이 안 된다. 기초가 안 되니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한마디로 뭘 해야한다고 가르친 적은 없다. 재즈는 연주하면서 자기가 듣고 배우는 거다. 국악에서 득음을 한다고 하는 것처럼 수없이 많은 소리를 내서 터득해야 한다. 재즈도 독특한 필을 익혀야 한다. 또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너무 카피를 많이 한다. 빨리 그걸 탈피하고 자신만의 사운드를 찾아야 한다."

- 그런 후배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요즘엔 세상이 좋아져서 재즈를 공부하는 한국 사람이 많다. 혼자 독학할 때를 생각하면 억울하다. 지금처럼 교본이 있으면 복사하면 되는데 예전엔 그걸 빌리려고 술도 사주고 애인도 소개해주고 밤새워 펜으로 썼다. 어렵게 공부했기 때문에 잊어버리지 않나 보다."

- 선구자로서 앞으로 목표는 무엇인가.

"재즈는 노예 생활을 했던 흑인의 음악이다. 우리도 한의 민족이다. 재즈 정서와 딱 맞아 떨어진다. 일부 사람들은 국악과 다른 음악의 콜라보레이션은 안 된다고 하는데 음악은 국경이 없다. 젊은이들이 리듬을 잘 타니까 재즈에서 통용되는 리듬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계획을 조용히 정리하고 남은 건 'K재즈'를 어떻게 꽃피울 것인가에 대한 연구다. 재즈스러운 음악을 섞으면 진보된 사운드가 나올 것이다. 새롭게 'K재즈' 악단을 만들어서 연주하고 싶다. 'K재즈'가 세계를 지배할 날이 오지 않겠나."

shine@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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