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취재기] 시멘트 암매장 사건, "기자님도, 여자잖아요"
입력: 2015.05.30 05:30 / 수정: 2015.05.29 22:43
마음 따뜻한 우리 누나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울 관악경찰서는 지난 20일 헤어지자는 여자 친구 김모(26) 씨의 말에 목을 졸라 살해한 뒤 충북 제천의 야산에 시멘트를 부어 시신을 은폐한 혐의로 이모(26) 씨를 구속했다. 생전 고인의 밝은 모습./유족 SNS
'마음 따뜻한 우리 누나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울 관악경찰서는 지난 20일 헤어지자는 여자 친구 김모(26) 씨의 말에 목을 졸라 살해한 뒤 충북 제천의 야산에 시멘트를 부어 시신을 은폐한 혐의로 이모(26) 씨를 구속했다. 생전 고인의 밝은 모습./유족 SNS

'나였더라면, 내 어머니였더라면….'

요 며칠 술기운에 잠을 청한다. 입가에 맴도는 술맛은 유독 쓰다. 사흘 전 그날, 그리고 그 사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지난 26일 충북 제천의 한 야산, 이른바 '시멘트 암매장 사건' 현장검증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보다 앞서 후배로부터 전화 한 통이 왔다. "얼마 전 사랑하는 친구가 죽었다"고 힙겹게 속내를 털어놨다. 지난 2일 밤 헤어지자는 이별 통보에 피의자 이 모 씨로부터 살해 당한 뒤 시멘트로 뒤덮인 채 야산에 묻힌 민주(가명·26) 씨 얘기였다. '아….' 짧은 탄식과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민주 씨의 사진과 사연들이 휴대 전화에 전송됐다. 사건에 발을 내딛기로 마음먹었다.

서울에서 충북 제천까지 차로 약 2시간 30분, 160㎞. 시신 유기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자연 환경은 아름다웠다. 잔인하게 시체를 유기한 현장이라기엔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현장으로 가는 내내 민주 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착잡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엔 "왜 시신을 여기까지 와서 유기했을까"라며 취재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딸아, 얼마나 아팠니 지난 26일 충북 제천의 한 야산에서 진행된 현장검증 전 피해자의 어머니가 딸이 묻혔던 장소를 들여다보고 있다./충북 제천=오경희 기자
'딸아, 얼마나 아팠니' 지난 26일 충북 제천의 한 야산에서 진행된 현장검증 전 피해자의 어머니가 딸이 묻혔던 장소를 들여다보고 있다./충북 제천=오경희 기자

오전 8시. 도착해 보니 짐작이 갔다. 시신 유기 장소는 인적이 드물었다. 또 수풀이 우거져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취재진도 주민들의 도움으로 겨우 찾았다. 예정된 현장검증 시각은 오전 9시~10시께였다. 민주 씨의 어머니와 남동생도 일찌감치 현장을 찾았다. 무표정하지만 남동생의 눈빛에서 누나를 살해한 이 씨에 대한 분노가 고스란히 와 닿았다.

피의자 이 씨가 도착하기 전, 딸이 묻혀 있던 장소를 이제야 눈으로 확인한 어머니는 오열하고 또 오열했다. 깊이 1m 구덩이에 작은 캐리어 하나가 놓였던 시멘트 구조물을 몇 번이고 헤집었다. 혹시나 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기다림 끝에 이 씨는 유족과 취재진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덤덤하고 태연하게 시신 유기 장면을 재연했다. 어머니는 현장 검증을 마친 이 씨에게 울분을 토했다. 어머니의 목소리만이 산 속 허공을 갈랐다. 묵묵히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취재진도 고개를 돌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했고, 차마 더는 볼 수 없었다.

'15분'. 사랑하는 딸의 평생을 앗아간 이 씨가 현장 검증을 재연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억울함과 원통함을 호소하다 지친 어머니는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고, 빈속을 게워냈다. 취재진은 어머니의 표정, 말 한마디 놓칠세라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이 씨가 가지고 있던 딸의 유품을 받아든 어머니는 기자를 가리켰다.

태연한 현장검증 피의자 이 씨가 시신 유기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충북 제천=오경희 기자
'태연한 현장검증' 피의자 이 씨가 시신 유기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충북 제천=오경희 기자

"기자님도 여자잖아요. 내 딸은요…. 정말 착하고 예뻤어요. 중학교 때부터 혼자 외국 생활을 하면서도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속 한 번 안 썩힌 아이에요. 그러면 뭐 해요. 그런 자랑스러운 내 딸이 죽었어요. 힘없는 여자라는 이유로 그놈(이 씨)한테 무참히 짓밟혔어요."

순간, 취재진의 시선이 기자에게 쏠렸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어머니의 말대로 여자였고, 민주 씨처럼 고향을 떠나 타지 생활을 하고 있으며 같은 나이의 여동생이 있다. 결국, 현장검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꾹 참았던 눈물을 쏟고 말았다.

민주 씨는 스물여섯 꽃다운 나이에 가족의 곁을 떠나야 했다. 어머니의 손에 들린 사진 속 그는 정말 밝고 예뻤다. 하지만 다신 볼 수 없다. 영영….

[더팩트 | 오경희 기자 ari@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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