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 당쟁 원인된 '기축옥사'의 중심 인물
입력: 2015.02.15 17:37 / 수정: 2015.02.15 17:37
정여립, 기축옥사 당시 자결. 정여립이 KBS 징비록에서 재조명돼 관심을 받고 있다. 정여립은 기축옥사 사건의 중심 인물로 알려졌다. / KBS1 역사스페셜 방송 화면 캡처
정여립, '기축옥사' 당시 자결. 정여립이 KBS '징비록'에서 재조명돼 관심을 받고 있다. 정여립은 '기축옥사' 사건의 중심 인물로 알려졌다. / KBS1 '역사스페셜' 방송 화면 캡처

정여립, 자결해 '기축옥사' 미궁 속으로 빠뜨려

정여립에 대한 네티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정여립은 조선시대 인물 가운데 가장 첨예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다. 정여립이 조선시대 당쟁의 중심적 사건이 기축옥사를 불러온 장본인이면서도 여러 의문을 남긴 채 사망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정여립이 일으킨 '기춘옥사'에 대한 견해는 지금까지 조작과 진실의 양론으로 팽팽하게 맞서 있다.

기춘옥사는 1599년 10월 일어난 사건으로 정여립의 운명을 결정 지은 사건이다. 당시 정여립은 대동계의 무리와 함께 황해도 호남에서 동시에 서울을 공격해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려는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조정에서는 즉시 선전관과 의금부 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로 파견했다. 정여립은 제자 조구가 자백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안 죽도로 도망쳤다가 자결했다.

이후 같이 피신했던 정옥남은 체포돼 문초를 받은 끝에 길삼봉이 주모자고 해서 출신 김세겸과 박연령, 이기, 이광수, 변숭복 등이 공보했다고 자백했다. 때문에 옥사는 점점 확대됐고 동인의 영수 이발은 정여립의 집에서 자신이 보낸 편지가 발견돼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그뒤 3년 동안 옥사로 사망한 사람은 무려 1000여 명에 달했다. 이런 대규모의 희생을 겪으면서 동인과 서인은 화해할 수 없이 결별하게 됐다.

이 사건을 '기축옥사'라고 불렀다. 애초에 '기축옥사'의 중심 인물로 생각됐던 정여립은 가장 먼저 죽음을 선택하며 사건의 전말을 미궁으로 빠뜨렸다.

'기축옥사'와 관련 정여립에 대해 들은 누리꾼들은 "정여립, 왜 먼저 죽었어" "정여립, 죽은 거 보니 역모 사실이었네" "정여립, '기축옥사' 때문에 당쟁 일어났구나" "정여립, 한 일에 책임을 져야지"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더팩트 | 김문정 인턴기자 sseoul@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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