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데 옷을 벗는다. 상식에 어긋난다. 하지만 사람이 추운 날씨에 옷을 벗고 죽는 현상은 의외로 잦다./MBC 뉴스데스크 갈무리 |
[더팩트|황신섭 기자] 바지와 속옷이 벗겨졌다. 윗옷 단추도 뜯어졌다.
그 곁에 신발과 양말, 술병이 나뒹군다. 여기저기 긁힌 상처, 얼굴엔 멍자국도 보인다.
한 겨울 밤 서울 외곽의 한 농수로에서 발가벗은 여성의 사체가 나왔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
잠시, 사체를 발견한 두 형사의 대화를 들어보자.
김 형사: 기온은 영하 3도. 옷이 벗겨지고 상처가 있는 걸로 봐서 성폭행 살인이네요.
이 형사: 그래, 맞아. 잔인한 살인 사건이야. 빨리 상부에 보고해!!
경찰은 부랴부랴 수사본부를 꾸려 범인 추적에 나섰다. 언론도 앞다퉈 '성폭행 살인'을 보도했다.
하지만 부검 결과는 뜻밖이었다. 여성의 사망 원인이 '이상탈의 현상에 따른 저체온증(동상)'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법의학에서는 추운데 옷을 벗은 현상을 '이상탈의'라 부른다. 주로 술 먹은 사람에게 나타난다./MBC 뉴스데스크 갈무리 |
경찰은 부검 결과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추운데 옷을 벗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되레 옷을 입어야 맞는 게 아닌가. 우리 몸은 온도가 떨어지면 심장과 뇌를 보호하려고 팔 다리에 피(혈류)를 공급하지 않는다. 그러면 급격하게 팔 다리가 차가워진다. 이후 우리 몸은 생체기능 파괴를 막고자 다시 따뜻한 피를 공급하는데, 이 때 열이 확 난다.
추위에 떨다 갑자기 열이 오른 사람은 스스로 옷을 벗는다. 그 뒤 체온이 점점 떨어져 죽는다. 법의학에선 이를 '이상탈의 현상'이라 하는데 주로 술 먹은 사람에게 나타난다.
이 여성의 사망 과정은 이렇다. 그녀는 술병을 들고 버스를 탈 정도로 취했다. 버스에서 내린 뒤 취기가 올랐다. 추운 날씨 탓에 체온은 떨어지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러다 발을 헛디뎌 논두렁에 굴러떨어졌다. 이 때 얼굴과 팔, 다리에 상처가 생겼다. 바닥에 쓰러진 그녀는 한동안 추위에 떨다 열이 오르자 양말을 벗었다. 그 다음엔 바지, 그리고 속옷, 급기야 윗옷까지 벗어 제쳤다.
결국 체온이 떨어진 그녀는 논두렁에 누운 채 숨이 멎었다.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도 저체온증으로 숨졌을 가능성이 크다. 양말과 신발은 모두 벗었고 바지와 윗옷도 일부 벗어 제친 상태였다. 술병도 있었다./YTN 뉴스 화면 갈무리 |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도 이상탈의 현상 뒤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역시 양말과 신발, 윗옷과 바지도 벗어 제친 상태였다. 소주와 막걸리 술병도 있었다.
기온이 포근한 5월 말에 저체온증이 말이 되느냐는 의심도 많았다. 타살 의혹마저 일었다. 하지만 밤 기온은 뚝 떨어지는데다 당시엔 비가 오고 바람까지 불었다. 체온이 떨어진 그의 의식은 혼미해졌을 테고, 다시 더위를 느낀 그는 옷을 벗었다. 끝내 체온이 떨어졌다. 유 전 회장은 그렇게 사망했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의 이유는 이처럼 상식과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죽은 자에게도, 산 사람에게도 법의학은 중요하다. 날씨가 춥다. 매서운 강추위는 한풀 꺾였다고 해도 아직은 겨울이다. 음주는 적당히, 옷을 벗지 않을 정도로만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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