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새벽 0시 10분 술에 취해 쓰러진 노숙자 신모 씨가 병원의 진료거부로 5시간 동안 적절한 응급치료를 받지 못해 끝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두고 환자의 치료를 거부한 병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안산=신진환 기자 |
[더팩트 ㅣ 안산=신진환 기자] '의사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보전하고 증진하는 숭고한 사명의 수행을 삶의 본분으로 삼아야 한다.' '의사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의학 실력과 윤리수준으로 의술을 시행하여야 한다.'
대한의사협회가 지난 2011년 11월 15일 제정·공포한 '의사윤리지침' 5조 1항과 6조의 내용이다. 어렵게 해석할 필요도 없이 '의사는 환자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난 2일 '의사윤리지침'을 무용지물로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경찰은 안산시 단원구 소재의 한 상가건물 1층 화장실에서 쓰러져 있는 노숙자 신모(38) 씨를 발견했다. 경찰은 119에 신고했고 구급대원들에게 신 씨를 인계했다.
구급대원들은 신 씨를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H 병원과 D 병원 O 병원 등을 찾았다. 하지만 병원은 신 씨를 거부했다. 특히 H 병원은 '상습적인 주취 환자'라며 2차례나 거절했다.
신 씨는 3번째 방문한 끝에 받아준 그 병원에서 3일 새벽 0시 10분께 숨을 거뒀다.
환자를 치료해야 할 병원이 위급한 환자진료를 거부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노숙자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8일 오후 <더팩트>는 안산 H 병원과 O 병원, D 병원을 차례로 찾아 병원들의 진료거부 이유를 들어봤다. 또 변호사를 통해 환자를 거부한 병원들의 행동은 적법했고, 위반했다면 어떤 처벌이 가능한지 확인했다.
◆ H 병원 "입원까지 필요 없었다고 판단"
안산에 있는 H 병원은 노숙자 신 씨를 2차례나 입원까지 필요 없다고 판단, 병원에 들이지 않았다./안산=신진환 기자 |
이날 방문한 H 병원은 지하 5층부터 지상 7층까지 있는 본관과 별관 2곳으로 규모가 상당했다.
H 병원 응급실 앞. 코끝으로 병원 특유의 냄새가 난다. 차트를 들고 바삐 움직이는 간호사들과 진료 환자를 부르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그저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치료에 여념이 없다. 여느 병원과 다르지 않다. 환자를 위해 바삐 움직이는 눈앞의 광경만 놓고 보면 신 씨를 거부했다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일주일 전, 신 씨는 응급실 앞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다시 구급차에 올랐다.
H 병원 관계자는 당시 상황에 대해 "신 씨는 3일 새벽 0시 12분에 119구급대원들을 통해 주취 상태로 응급실을 내원했다. 그러나 입원까지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며 "응급의학과장이 환자를 본 결과, 우측 눈의 좌상은 이상 변화가 없었으며, 지난해 12월 31일 본원에서 시행한 검사에서 이상 소견이 없었음을 다시 확인했다"고 제기된 환자 거부 비난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또 신 씨가 병원에 온 뒤 사라짐을 반복한 환자로, 보호조치가 필요한 환자임을 119구급대원에게 설명한 뒤 관계기관으로 이송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두 번째 방문 때는 직전에 응급실 내원 시 구급대원이 설명 들었던 내용을 다시 확인 요청해, 응급의학과장이 다시 설명했다"고 말했다.
H 병원 관계자는 신 씨가 주취 상태로 여러 차례 내원했으나 진료를 거부한 전례가 상당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사진은 신 씨 내원 및 조치 현황 일지./신진환 기자 |
관계자는 신 씨가 주취 상태로 여러 차례 내원했으나 진료를 거부한 전례가 수차례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실제로 신 씨의 진료 차트를 확인한 결과 그는 지난해 11월 28일 길에서 미끄러져 내원했을 때 의료진으로부터 검사 필요성을 설명받았다. 그러나 신 씨는 진료를 거부했다. 그 뒤 H 병원에서 지난해 12월 1일부터 13일까지 입원해 알코올성 간염과 떨림섬망을 치료받았다. 이후에도 지난 1일부터 이틀간 주취 상태로 응급실을 찾았으나 신 씨는 진료를 거부하고 병원을 빠져나갔다.
◆ 노숙자에겐 '희망·사랑·봉사'는 없었다
안산 소재 D 병원 정문 옆 비석에 '희망·사랑·봉사'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안산=신진환 기자 |
같은 날 찾은 O 병원 측은 사건에 관해 답변서를 제출한 관청(단원보건소)에 문의하라며 직답을 피했다. O 병원 관계자는 "2일 새벽에 전화 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신 씨의 치료를) 거부하지 않았다"면서 "6일 관청에서 확인해 보니, 직원이 전화받고 인계해준 내용과 119구급일지 내용이 일치하고 있지 않다. 확인해야 하는 부분이라 왈가왈부할 수 없다"고 말을 아꼈다.
신 씨의 진료를 거부한 또 다른 병원을 찾았다. 밤늦게 찾은 D 병원에는 관계자가 퇴근한 상태다. 원무과 직원 1명과 입원 환자 몇 명을 제외하고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1층 로비의 조용한 정적이 유독 신경 쓰인다. 이내 발길을 돌려 정문으로 나왔다. 눈에 띄는 비석이 보인다. '희망·사랑·봉사'가 쓰여 있다. '희망·사랑·봉사'는 문구에 불과했다. 노숙자였던 신 씨는 D 병원이 내세운 희망과 사랑 그리고 봉사를 받지 못했다.
◆ "치료가 필요하다 판단"…'신 씨 사망 사건' 의료법 저촉?
안산소방서 관계자는 "구급대원은 신 씨의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노숙자 쉼터부터 병원까지 몇 군데 다녔다. 하지만 거부됐다"며 "여기저기 다니다가 5시간 동안 방치된 셈"이라고 말했다./안산=신진환 기자 |
당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신 씨를 직접 병원으로 이동시킨 구급대원이다. 과연 신 씨를 병원으로 데려간 구급대원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신 씨를 병원으로 이송시킨 구급대는 H 병원과 불과 500m의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구급대에 도착했다.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만큼 취재진들이 보인다. 상황실은 어수선하고 소방관들은 피곤한 표정이다.
수많은 취재진의 방문 때문일까. 당시 출동했던 구급대원은 출동을 나가 자리에 없었다. 구급대 측은 출동을 나간 대원이 언제 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구급대 측은 결국, 안산소방서에 문의하라고 말을 바꿨다.
소방서 측은 "공무원이기 때문에 언론에 직접 얘기할 수 없으니 안산소방서 측에 문의하라"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소방서 관계자는 "구급대원은 신 씨의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노숙자 쉼터부터 병원까지 몇 군데 다녔지만 거부됐다"며 "여기저기 다니다가 5시간 동안 방치된 셈"이라며 "의사 선생님께서 환자가 아니라고 판단을 했기 때문에 진료를 거부한 거니까 뭐라 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을 두고 국민들은 "신 씨가 만취 상태였지만, 처음 도착한 병원에서 적절한 조처를 취했다면 사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진료를 거부한 병원들을 비판했다. 그렇다면 신 씨의 진료를 거부한 의사는 책임이 있을까.
법무법인 '주원'의 한경택 변호사는 사실관계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아 위법 여부를 명확히 가리기는 어렵다고 전제했다.
한 변호사는 "의료법 15조 1항에 명시된 내용은 정당한 사유 없어 진료를 거부할 수 없다"며 "정당한 사유에 대해서는 보건복지부의 유권해석이나 관련 유사 판례를 가지고 해석되는 판례가 있기는 하나, 과거 술에 취해 진료를 거부한 적이 있다고 해서 (의사가 환자의) 진료를 거부하는 것은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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