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롯데·현대·신세계百, '생명 위협' 할로겐 소화기 사용 (영상)
입력: 2018.04.10 17:01 / 수정: 2018.04.10 17:01

롯데·현대·신세계백화점이 심하면 목숨까지 앗아가는 할로겐 화합물(HCFC-123) 소화기를 점포 내 비치하고 있는 것으로 취재 결과 확인됐다. /안옥희 기자
롯데·현대·신세계백화점이 심하면 목숨까지 앗아가는 할로겐 화합물(HCFC-123) 소화기를 점포 내 비치하고 있는 것으로 취재 결과 확인됐다. /안옥희 기자

백화점 곳곳에 'HCFC-123 소화기'…환경오염·독성 우려에도 '청정' 표기 빈축

[더팩트│안옥희 기자] 롯데·현대·신세계 등 국내 유수 백화점이 인체에 치명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할로겐 소화기를 매장에 비치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더팩트>가 지난 2월부터 2개월간 서울 시내 주요 백화점(롯데백화점 노원‧영등포점·현대백화점 디큐브시티‧압구정점·신세계백화점 강남‧영등포점 등)을 취재한 결과 3곳 모두 '할로겐 화합물(HCFC-123)' 소화기를 매장 곳곳에 설치한 것으로 확인됐다. 전국에 롯데백화점 56개(아울렛, 영플라자 포함), 현대백화점 15개, 신세계백화점 13개인 점을 고려하면 총 84곳의 백화점에서 해당 소화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소화약제(消火藥劑: 불을 끄는 화학물질)인 HCFC-123은 사람이 흡입하면 산소결핍을 일으켜 의식을 잃게 하거나 심하면 사망을 일으킬 위험이 있는 물질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는 HCFC-123 물질을 소화 목적으로 사용할 때 반드시 야외에서 환기가 되는 곳이나 사람이 없는 방호공간에만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 롯데·현대·신세계百, 환경오염·유해성 논란에도 'HCFC-123 소화기' 사용

백화점은 대표적인 실내 공간이다. 이에 따라 화재가 발생해 HCFC-123 성분이 담긴 소화기를 사용할 경우 인체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게 관련 전문가들 지적이다.

특히 소방안전 전문가들은 HCFC-123 소화기가 화재를 진압하는 능력이 뛰어나 빨리 불길을 잡는 장점이 있지만 독성이 있어 밀폐된 장소에서 사용하면 자칫 목숨까지 위협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8월 HCFC-123 소화기 제조업체에서 약제를 충전하는 작업을 하던 20대 근로자가 HCFC-123 흡입으로 급성 독성간염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전자제품과 고가품을 판매하는 백화점은 미관상 이유로 HCFC-123 소화기를 선호한다. 이 소화기를 사용하면 잔여물이 남지 않아 실내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흔히 접하는 빨간색 분말형 소화기는 사용할 때 분말이 나와 백화점내 상품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그러다보니 인체에 치명적인 HCFC-123 소화기를 비치하면서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기다.

이들 백화점은 화재안전기준도 무시하고 있다. 화재안전기준에 따르면 HCFC-123 소화기는 밀폐된 공간, 지하층, 창문이 없는 무창층에 두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런 규정에도 불구하고 일부 백화점은 HCFC-123 소화기를 지하층에 배치하고 있는 실정이다.

◆ HCFC-123, 밀폐 공간에서 고농도 노출되면 사망까지

그동안 국내 대표적인 소화 약제는 '하론 1211(하론소화기)'이었으나 현재는 생산이나 수입이 금지됐다. 금지된 이유는 지구온난화지수(GWP) 및 오존파괴지수(ODP) 때문이다. 하론 물질이 오존층을 파괴하는 것으로 드러나 국내에서는 2010년부터 하론 소화 약제를 생산하거나 수입할 수 없다.

이에 따라 하론 대체물질 가운데 하나인 HCFC-123이 대중적인 소화 약제로 사용되고 있다. HCFC-123 소화기는 하론소화기 대체품으로 주목받아 판매량이 급증했다. 2006년부터 현재까지 시중에서 판매된 HCFC-123 소화기는 약 55만대로 추정된다.

한국산업안전공단의 물질안전보건자료(MSDS)에 따르면 HCFC-123 물질은 사람이 흡입할 경우 산소결핍을 일으켜 의식상실이나 사망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

이에 따라 미국 국립산업안전보건연구원(NIOSH)은 HCFC-123을 '급성 간 기능 유발 및 눈자극성 유발' 물질로 규정하고 있다. 환경부가 지난해 공개한 해외 동물실험 연구자료에서도 HCFC-123에 노출되면 '눈 자극성 물질로 염색체 이상을 일으킬 가능성', '이 물질에 노출된 근로자에게 간 손상 보고' 등의 부작용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대형마트와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HCFC-123 소화 약제가 들어간 가정용‧차량용 에어로졸 타입 소화기를 별다른 규제 없이 판매하고 있어 경종을 울리고 있다.

◆ 백화점 곳곳 '청정소화기' 표시 믿어도 되나···소비자 혼란

관련법이 미비한 점을 악용해 HCFC-123 소화기 제조·유통업체들이 '잔여물이 남지 않는다'는 의미의 '청정(Clean agent)'이라는 용어를 마치 인체에 무해하고 친환경적인 것처럼 허위과장 광고를 하는 점도 문제다. G마켓·옥션·11번가·인터파크 등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HCFC-123 소화기를 '청정소화기', '친환경 소화기'라는 문구로 홍보하는 업체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할로겐 화합물(HCFC-123) 소화 약제가 담긴 소화기들이 유해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청정소화기,친환경 소화기라고 홍보되고 있어 소방당국의 관련법 개정이 속도를 내고 있다.  /안옥희 기자
할로겐 화합물(HCFC-123) 소화 약제가 담긴 소화기들이 유해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청정소화기','친환경 소화기'라고 홍보되고 있어 소방당국의 관련법 개정이 속도를 내고 있다. /안옥희 기자

HCFC-123 소화기의 허위과장 광고 실태는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도마 위에 오른 바 있다. 당시 국감에서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소화기 제조·유통업체들이 유해성 논란을 빚고 있는 HCFC-123 소화기를 '청정소화기' 등으로 허위과장 광고를 해 국민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이 가운데 심지어 일부 백화점에선 '청정소화기'라고 쓰인 소화기 거치대를 사용하거나 몸통에 '청정' 스티커를 부착해 소비자 혼란만 부추기고 있다. 취재진이 백화점 고객 20여 명에게 '청정소화기' 표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고 묻자 모든 고객이 "소화기 성분이 인체에 무해하다는 뜻으로 안다"고 말했다. 매장에서 만난 한 주부 고객은 "화재 때 필수품인 소화기가 인체 해로운 물질로 만들어졌다면 화재 진압하려다 사람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하기도 했다.

박청웅 세종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청정소화기'라는 용어는 사용자가 '청정이니까 안전하다'고 오인할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진선미 의원실 관계자는 "소방청이 지난 국정감사 이후에 허위과장 광고 금지 등 여러 대책을 약속했는데 현재 관련 실태조사나 대책들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 살펴볼 예정이다"고 말했다.

소방청은 국감 때 지적 사항을 바탕으로 '청정소화약제소화설비의 화재안전기준(소방청 고시)' 개정을 진행 중이다. '청정'이라는 용어가 소방 관련 법규 안에 들어 있어 '청정소화기'라는 말을 사용해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소방청은 '청정'이라는 단어를 삭제하는 작업을 모두 끝낸 후 공정위 공정거래법상 광고표시 관련 위반 여부를 따져볼 예정이다.

◆ 정부 늑장대처에 비난… 백화점 "당장 교체 예정 없고 향후 정부 지침 따를 것"

HCFC-123 소화기가 유해성과 허위 광고 등으로 논란이 되고 있지만 정부는 성분 및 유통실태 조사에 늑장 대처해 빈축을 사고 있다.

소방청 산하 한국소방산업기술원은 HCFC-123이 인체에 치명적이고 위험성을 알려야 하지만, 사용을 전면 금지할 정도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한국소방산업기술원 기술관리부 관계자는 "지난해 환기시설이 미비한 밀폐된 상태에서 고농도로 노출돼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고 이로 인해 HCFC-123 유해성이 이슈가 됐다"며 "그러나 소화기 조작자나 사용자가 일반적으로 사용할 때 치명적일만큼 고농도로 노출될 가능성은 적다"고 설명했다.

최근 밀양 화재 등 다중이용시설 대형 화재가 이어지는 가운데 초기 화재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소화기에 대한 정확한 실태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지난 2월 3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세 세브란스병원 본관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 /임세준 기자
최근 밀양 화재 등 다중이용시설 대형 화재가 이어지는 가운데 초기 화재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소화기에 대한 정확한 실태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지난 2월 3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세 세브란스병원 본관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 /임세준 기자

백화점들은 HCFC-123 소화기가 인체에 유해하고 청정 소화기 명칭에 대한 논란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정부 행정 지침이 아직 없다는 이유로 문제의 소화기를 계속 비치하고 사용하겠다는 입장이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HCFC-123 소화기 유해성에 대한 정확한 조사 결과가 아직 없고 정부 지침도 없어 당분간은 교체할 예정이 없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도 "소화기뿐 아니라 모든 소방기기는 국가공인기관인 한국소방산업연구원 인증을 받은 제품만 사용 중"이라며 "정부 지침에 따라 해당 제품에 대한 인증이 철회된다면 교체할 것"이라고 밝혔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원래 하론소화기를 비치하고 있었으나 2010년 청정소화기로 교체하라는 정부 지침에 따라 교체한 것이 HCFC-123 소화기"라고 해명했다.

정부가 HCFC-123 소화기 관련 논란에 사실상 뒷짐을 지고 있어 당장 백화점 등에서 소화기 사용에 따른 흡입 사고가 발생해도 명확한 처벌 근거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최근 밀양 화재,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등 다중이용시설 대형 화재가 잇따르는 가운데 초기 화재 진압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소화기와 관련해 정확한 실태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청웅 세종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독성이 있는 HCFC-123 소화 약제가 인체에 끼치는 위험성이 어느 정도인지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며 이후 소화 성능이 뛰어나고 환경오염과 인체 유해성이 없는 소화기로 바꿔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ahnoh05@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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