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곡(149)] 댄싱 디바 김완선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입력: 2023.12.07 00:00 / 수정: 2023.12.07 00:00

'나만의 것' '가장무도회' 등 싱글 3곡 연달아 히트
이모이자 매니저였던 故 한백희 씨는 애증의 관계


김완선에게 영원한 인생곡으로 남아있는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는 댄싱 디바라는 화려한 가면 뒤에서 울고 있는 슬픈 운명의 페르소나다. 요즘도 후배들 사이에 커버송으로 자주 불리고 있다. /더팩트 DB
김완선에게 영원한 인생곡으로 남아있는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는 댄싱 디바라는 화려한 가면 뒤에서 울고 있는 슬픈 운명의 페르소나다. 요즘도 후배들 사이에 커버송으로 자주 불리고 있다. /더팩트 DB

[더팩트ㅣ강일홍 기자] 90년대 초반 대중가요계 여가수의 대세는 누가 뭐래도 김완선이었다. 이선희, 강수지, 하수빈, 김혜림, 양수경, 이지연 등 많은 스타 여자 가수들이 있었지만, 김완선의 인기 원톱 자리를 빼앗지는 못했다. 한 마디로 김완선의 시대였다.

김완선의 존재는 매니저였던 故 한백희 씨의 절대적인 영향력이 한몫을 했다. 이모이기도 한 한백희 씨는 희자매, 인순이, 리듬터치 등 여성 가수들을 데뷔시킨 경험을 토대로 김완선을 기획형 아이돌 댄스가수로 탄생시켰다.

한백희 씨는 김완선의 1집 '지난이야기, 오늘밤'(86년)과 2집에서 산울림의 김창훈과 신중현을 작곡가로 초빙해 '오늘밤'이라는 특색 있고 개성 넘치는 가요를 부르게 했다. 첫 출발부터 돋보이는 시도로 대중의 시선을 이끌어냈다.

3집 이후로도 하광훈 등 쟁쟁한 뮤지션들을 참여시켜 완성도를 높여갔다. 그리고 손무현과 만난 5집에서 절정을 이룬다. '가장 무도회'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여가수 최초로 음반 판매 100만 장을 돌파한다.

김완선은 90년 발표한 5집에서 가장 무도회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여가수 최초로 음반 판매 100만 장을 돌파한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시기다. /더팩트 DB
김완선은 90년 발표한 5집에서 '가장 무도회'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여가수 최초로 음반 판매 100만 장을 돌파한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시기다. /더팩트 DB

김완선에게 영원한 인생곡으로 남아있는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는 댄싱 디바라는 화려한 가면 뒤에서 울고 있는 슬픈 운명의 페르소나다. 요즘도 후배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거나 커버송으로 자주 불리는 단골 레퍼토리가 됐다.

'빨간 모자를 눌러쓴 난 항상 웃음 간직한 삐에로/ 파란 웃음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눈물/ 초라한 날 보며 웃어도 난 내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중략)/ 술마시며 사랑 찾는 시간 속에 우리는 진실을 잊고 살잖아/ 난 차라리 웃고 있는 삐에로가 좋아/ 난 차라리 슬픔 아는 삐에로가 좋아'(김완선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가사)

5집 타이틀곡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작곡자 손무현은 김완선의 6집까지 프로듀서로 활약했다. 87년 록그룹 외인부대의 기타리스트로 데뷔해 영화음악 감독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같은 앨범의 수록곡 '가장무도회'도 그가 썼다.

김완선에게 이모 故 한백희 씨는 지금도 애증으로 남아 있다. 이모의 죽음 이후 그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동안 연예계를 떠나기도 했다. /나무위키
김완선에게 이모 故 한백희 씨는 지금도 애증으로 남아 있다. 이모의 죽음 이후 그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동안 연예계를 떠나기도 했다. /나무위키

이 곡 작사는 '주사위' 멤버로 활동한 적이 있는 이승호다. 89년 한백희 씨의 제안으로 김완선의 백밴드 실루엣의 키보디스트로 활동하다 90년 발표된 김완선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와 이승철의 '소녀시대'를 쓰며 작사가로 전업했다.

김완선의 대표곡으로 꼽히는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는 같은 앨범 '나만의 것'에서 출발해 '가장무도회'까지 총 세 곡이 연달아 히트하는 기록을 남겼다. 한 앨범에서 3장의 싱글이 연달아 방송 가요순위 프로그램 1위에 오른 것도 독보적인 일이다.

김완선에게 이모 故 한백희 씨는 지금도 애증으로 남아 있다. 이모는 최고 뮤지션들과의 협업, 혹독한 연습 등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자 그를 스타가수로 발돋움해준 은인이면서 한편으로는 전횡과 독단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6집 '애수'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국내 활동을 접고 해외 진출을 강요받아야 했다. 실제로 대만과 일본 등에서 활동하지만 여러 악재에 겹쳐 결국 잘못된 선택으로 결론이 났다. 이모의 죽음 이후 그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동안 연예계를 떠나기도 했다.

eel@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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