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씨는 자신 외에도 주변 사람들이 A씨가 자신의 아들을 키워주기로 약속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증언했다. /더팩트 DB |
고소인 "아들 연예인 시켜준다고 해 수십억 원 건넸지만 물거품"
[더팩트ㅣ이승우 이한림 기자] "아들을 키워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 대가로 수차례 돈을 가져갔다. 술값과 여행경비는 수시로 대행했다. 반신반의하다 속은 걸 알았지만 연예인을 지망하는 아들이 잘못될까 봐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닐 수 밖에 없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한결같다. 아들의 연예인 데뷔와 성공을 바랐던 H(57)씨가 최근 전 지상파 PD A(60)씨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이른바 연예인을 시켜주겠다는 댓가로 금전을 갈취한 사건의 일단이다.
H씨는 15년 여 전 아들의 연예계 진출 뒷바라지를 위해 A씨와 처음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수년이 지난 지금은 그게 악연의 고리가 됐다. 지난 18일 서울 양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H씨는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용한 금액만 수십억 원에 달한다"고 털어놨다.
최동훈 감독의 영화 '범죄의 재구성'에서 사기꾼 서인경(염정아 분)은 "사기는 상대방이 무엇을 두려워하는 지 알면 게임이 끝난다"고 말한다. A씨는 H씨가 무엇을 원하는 지 알고 있었고 H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는 뒤늦게 속은 걸 알았지만 이미 '빗나간 부정'의 씁쓸함까지 털어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영화처럼 '억소리' 나는 금액이 말 한마디에 오가기란 흔한 일이 아니다. 무엇이 H씨로 하여금 수십억 원을 쓰게 만들었을까. 바로 자식의 성공을 바라는 간절함이다. 아들을 연예인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말은 철석같은 믿음이 됐다.
A씨는 오랜 기간 방송사 PD를 하며 쌓은 연예계 인맥을 등에 업고 H씨의 아들을 연예인으로 키워줄 것처럼 약속했다. 실제로 A씨는 모 지상파 예능국 PD로 근무하며 연예인들과 교감이 깊고, 방송사를 떠난 뒤엔 TV 등에 연예관련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알렸다.
호언장담은 공염불에 불과했다. H씨는 '더 이상 연예인을 하고 싶지 않다'는 아들의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3월 서울서대문경찰서에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사기혐의로 A씨를 고소했다. <더팩트>가 경찰 조사중인 H씨를 만나 사건의 내막을 취재했다.
전 방송국 PD A씨를 사기 혐의로 고소한 H씨가 지난 17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한 건물에서 더팩트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승우 기자 |
H씨의 아들은 서울예대를 입학해 배우를 꿈꾸던 연예인 지망생이다. 예능프로그램과 영화 등에 단역으로 출연한 적은 있지만 그를 기억하는 대중은 아무도 없다. H씨는 아들을 톱스타 버금가는 연예인으로 만들어주겠다는 A씨에게 쏟은 노력들이 결국 물거품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 자신의 발등을 찍고 싶었다고 한다.
H씨는 A씨가 유명 방송사 PD라는 후광을 업고 자신 앞에 나타난 지난 2007년을 회상했다. 그는 "A씨가 '아들을 연예인으로 키워 성공시켜주겠다. 내가 장근석 등 수많은 연예인을 키웠다'고 말하면서 나에게 접근했다. 그 때부터 2019년 말 까지 수십 회에 걸쳐 여행경비, 접대비, 향응 등 다양한 명목으로 금전을 지불했다"고 말했다.
H씨는 A씨의 자신만만한 장담에 금방 막역한 '호형호제' 사이로 발전했다. 아들을 A씨에게 맡긴 H씨는 그의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고 그를 보좌했다. A씨가 방송사를 퇴사한 뒤 차린 글로벌 유통 사업체에서 해외 출장은 물론 사업 미팅도 수차례 함께 했다. 그리고 웬만한 비용 결제는 모두 H씨의 몫이었다.
H씨에 따르면 A씨가 자신과 사이가 가까워지자 금전을 투자해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여러가지 사업 제안을 했다. 그중 A씨는 2014년 경 중국 모 그룹과 영화 드라마 등 10편을 제작하는 계약을 맺었다면서 H씨에게 사업자금을 꿔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H씨는 아들을 해당 작품에 출연시켜주겠다는 말에 속아 2년 여간 9억 원 가량을 A씨와 그의 회사에 건넸다.
H씨는 지난 3월 서울서대문경찰서에 전 방송사 PD A씨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혐의(사기)로 고소했다. 사진은 <더팩트>가 입수한 H씨의 고소장 중 일부. /H씨 제공 |
일이 틀어진 뒤 H씨는 빌려준 돈이라도 받겠다는 심정으로 A씨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이 때부터 전화나 문자를 받지 않았다. 그는 "잠적한 A씨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모으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고 답답해 했다.
H씨는 자신 외에도 A씨를 사기 혐의 고소를 하거나 금전 및 정신적 피해를 입은 사람이 여럿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뒤늦게 알고보니 이런 식으로 돈을 줬다가 받지 못한 사람이 많더라. 작정한 사기꾼이다. 빌려준 돈은 받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편 <더팩트>는 고소를 당한 전 방송사 PD A씨의 입장을 듣기 위해 입수한 연락처와 그가 일했던 회사 등에 연락을 취했으나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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