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일홍의 스페셜인터뷰113-서인석] 'B급 개그' 원조, "무대는 사라져도 은퇴는 없다"
입력: 2020.11.02 05:45 / 수정: 2020.11.02 11:05
영원한 B급 개그 자긍심을 지키겠다. 모창 원조 서인석은 밤무대 개그 MC로 활약하며 훗날 폭소클럽 개그콘서트로 이어지는 스탠딩 개그의 씨앗을 잉태한 주역이다. /이선화 기자
"영원한 'B급 개그' 자긍심을 지키겠다." '모창 원조' 서인석은 밤무대 개그 MC로 활약하며 훗날 '폭소클럽' '개그콘서트'로 이어지는 스탠딩 개그의 씨앗을 잉태한 주역이다. /이선화 기자

'욕개그 시리즈' 등 장외무대 뒤집은 코미디클럽 '터줏대감'

[더팩트|강일홍 기자] 서인석(59)은 자칭 '코미디 바보'다. 스스로는 "코미디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말할 만큼 오로지 웃기는 일에만 골몰했다. 신인시절부터 그는 저돌적이었다. 당시 '방송 코미디 1인자'로 군림하던 고 김형곤과 '풍자개그'로 당당히 맞설 만큼 용감(?)했다.

낭중지추 (囊中之錐), 주머니속 송곳처럼 재능은 감추기가 힘들다. 그는 대학가 인기 DJ와 야간업소 MC를 거쳐 'KBS 신인무대'(87년)와 이듬해 'KBS 스타탄생'(88년) 코미디부문 대상을 거머쥔다. 이를 발판으로 KBS 공채 6기(90년) 개그맨에 응시해 금상을 수상하며 정식 개그맨의 길을 걷는다.

방송이 아닌 장외무대에서의 활약은 말 그대로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20년간 '김형곤 코미디클럽' 무대를 휩쓸었다. 이는 당대 코미디언으로 우뚝 선 이주일과 미국 NBC '투나잇쇼' 등 국내 보다 해외에서 먼저 유명세를 떨친 자니 윤이 그의 탁월한 개그감각을 인정한 바 있다.

고 자니 윤과는 KBS '특집 폭소클럽'을 통해 타고난 쇼맨십을 입증했다. 이는 2000년 이후 방송가를 휩쓴 '개그콘서트' 탄생의 밑거름이 됐다. 김형곤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무산되긴 했지만 사상 첫 미국 카네기 홀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을 기획하기도 했다.

'욕개그 시리즈'는 그의 전매 특허였다. 술자리에 유행하던 'Y담' 또는 'EDPS'(음담패설) 등 성인코미디 역시 그가 창작한 내용이 태반이다. 서인석은 "주로 성적 상상력을 유발하는 유머여서 요즘 기준으로는 용납될 수 없는 내용도 많지만 당시엔 누구나 공감대를 이룬 웃음소재였다"고 털어놨다.

7080 콩트 코미디를 대체하며 20여 년간 스탠드업 개그로 인기를 누린 '개그콘서트' 마저 최근 막을 내렸다. 개그 원조를 자처하는 서인석은 어떤 심정일까. 그의 근황과 심정이 궁금했다. 필자와도 오랜만에 만난 그는 타고난 예능인답게 여전히 바빴다. 7080 대표 개그맨이었던 그는 이후 가수 데뷔와 시인 등단에 이어 '웃음릴에이', '웃자 건강클럽', 국내외 NGO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29일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한복집'(서울 서초구)에서 2시간동안 진행됐다.

서인석은 갈수록 웃을 일이 없는 세상이 돼가는 것같아 왕년의 코미디클럽 시절이 더 생각난다고 말했다.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29일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한복집(서울 서초구)에서 2시간동안 진행됐다. /이선화 기자
서인석은 "갈수록 웃을 일이 없는 세상이 돼가는 것같아 왕년의 '코미디클럽' 시절이 더 생각난다"고 말했다.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29일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한복집'(서울 서초구)에서 2시간동안 진행됐다. /이선화 기자

-7080 콩트 코미디를 대체하며 20여년간 스탠드업 개그로 인기를 누린 '개그콘서트' 마저 막을 내렸다. 개그 원조를 자처하는 처지에서 심정이 착찹할 것같다.

미국 등 선진국일수록 조크와 유머에 열광해요. 무명 스탠딩 코미디언들이 활동하는 클럽은 각 도시마다 하나씩은 꼭 있어요. 우린 방송에서 코미디가 퇴출되는 판국이니, 코미디클럽 같은 무대가 사라져도 할말이 없지요. 웃음이 없으면 세상은 삭막해집니다. 사람들이 웃음을 잊고 사는 것만 같아요. 요즘처럼 힘들고 어려울 땐 더 웃을 일이 많은데 웃길 곳도 없고, 웬만해선 잘 웃지도 않아요. 하긴 여의도에 가면 개그맨들보다 더 웃기는 정치인들이 있긴 하죠.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게 아니라, 웃고도 마음에 앙금이 남는 '썩소'(썩은 웃음)를 안겨주는게 문제이긴 하지만요.

서인석은 '코미디클럽'의 추억과 향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서울 인사동에 '만원의 행복'이라는 클럽을 오픈했다. 일종의 '코미디클럽'의 후신이었다. 하지만 불과 두 달 만에 문을 닫았다. 그는 "하필 사회적 갈등과 반목이 심할 때 딱 걸렸다"면서 "거리에 반대를 위한 반대 시위가 넘쳐나고 세상이 증오로 가득 차 있는 상황에서 돈 내고 웃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갈수록 웃을 일이 없는 세상이 돼간다는 생각에 왕년의 그 추억 속 '코미디클럽'이 더 그리워진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90년대 이후 고 김형곤과 함께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코미디클럽'은 한때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 밤무대 웃음 트렌드였다. 부활을 시도하지 않았나.

'코미디클럽' 하면 김형곤 선배를 빼놓을 수가 없죠. 미국에서 먼저 유행하던 장르를 국내에 정착시킨 건데 처음엔 성공여부를 장담못해 많이 망설었어요. 시끄러운 술집에선 가수들이 노래 부르는 거 말고는 청중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힘들었으니까요. '코미디클럽'의 성공은 일단 재미와 즐거움이었어요. 술자리에 걸맞는 '야담'(야한 개그)에 뜨겁게 반응을 했거든요. 재작년에 '코미디클럽' 명맥을 이어갈 무대를 인사동에 어렵게 마련했어요. 많은 분들이 호응해줘 분위기가 좋았는데 정치 사회적 후유증(클럽 앞에 데모대가 연일 진을 쳤다고 함)으로 부득이 중단할 수 밖에 없었어요.

서인석에게 '코미디클럽'은 분신과도 같다. 그 열정과 애착은 원조를 자처했던 고 김형곤을 능가했다. 89년 김형곤은 서울 신사동에 처음으로 '코미디클럽'을 오픈했다. 방송에서 할 수 없는 '비방용'(非放用·19금 성인) 이었다. 김형곤은 가장 먼저 서인석을 영입했다. 그가 바로 EDPS(음담패설)로 장착한 욕개그 시리즈 1인자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선배들에 비하면 대중적 인지도가 낮았어도 그는 늘 중심에 서 있었다. '코미디클럽'은 서인석을 포함해 풍자개그의 1인자(김형곤) 모창&성대모사(오재미) 달변개그(엄용수) 허당유머(심형래) 등이 핵심이었다.

서인석은 코미디클럽의 추억과 향수가 그리워 서울 인사동에 만원의 행복이라는 클럽을 오픈했지만 사회적 갈등과 맞물려 두 달만에 문을 닫았다고 한다. /서인석 제공
서인석은 '코미디클럽'의 추억과 향수가 그리워 서울 인사동에 '만원의 행복'이라는 클럽을 오픈했지만 사회적 갈등과 맞물려 두 달만에 문을 닫았다고 한다. /서인석 제공

-고 김형곤과는 누구보다 가깝게 지낸 절친 선후배이면서 갈등도 많지 않았나. 한 마디로 애증의 관계였는데 그가 떠난 지 벌써 15년이 됐다. 소회가 궁금하다.

(김)형곤이 형님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개그 판도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선 개그맨이라면 모두가 인정할 만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았어요. 욕심이 많아 동료 개그맨들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웃음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분명했어요. 당시엔 방송사가 '절대 갑'이었는데 설령 방송사와 이견이 생겨도 관철시키는 힘이 있었죠. 그 힘을 앞세워 독단을 부리다 폭력 등 불미스런 일도 벌였지만요. 저도 그 피해자 중 한명이었지만, 알고보면 형곤이 형님이 후배들의 울타리 역할을 많이 해준 것도 맞거든요.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네요. 코미디가 푸대접 받는 세상이 되고보니 더 그립고 아쉬워요.

1988년 가을 LA 할리우드 거리의 코미디클럽 '래핑팩토리'에 30대 초반의 한국 청년 두 명이 들어선다. 한 사람은 덩치가 크고 배가 나온 뚱뚱보였고, 또 한 사람은 왜소하지만 다부지고 얼굴엔 온통 익살스러움이 묻어나는 사내였다. 둘은 래핑팩토리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속삭이듯 얘기를 주고받더니, 곧이어 진행된 스탠딩 코미디쇼를 관람하는 청중들의 박장대소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그들은 바로 정치 풍자 코미디의 대가이자 한국 코미디클럽 창시자인 고 김형곤과 그의 단짝 파트너 서인석이었다. 김형곤은 2006년 3월 46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바늘과 실처럼 떼놓을 수 없는 사이였는데도 둘은 '개그 폭력사건'의 중심에 서고, '방송사 이적' '19금 개그 시도' 등 여러 논란과 구설에 오른 적이 있지 않나.

90년대까지만 해도 방송가 연기자 선후배들 사이에는 성희롱성 발언이나 폭력 등 비민주적 관행들이 많았어요. 더구나 개그계는 강압적인 위계질서가 특히 강했어요. 공채나 특채 등 데뷔 기수로 질서가 짜여지다보니 '잘나가는 선배' 중심으로 줄을 서야 당연한 걸로 알았죠. 아이디어 회의를 하다가 볼펜이나 재떨이가 날아다니는 건 예삿일이고, 툭하면 부당한 일을 강요당하기 일쑤였어요. '감자골 4인방'(김국진 김용만 박수홍 김수용)은 저의 KBS 개그공채 바로 아래 기수인데 오죽하면 못 견디고 MBC로 옮겠어요.

서인석은 90년 KBS 코미디탤런트(6기)로 김지선 서현선 배동성 등이 동기다. 이듬해인 91년 김국진 박수홍 김수용 김용만 양원경 최승경 등이 대학개그제(1기)로 명칭을 바꾼 공채에 선발됐다. 나이가 어려도 데뷔 기준으로 엄격히 선후배(기수제)를 가르다보니 갈등도 많았다. 서인석은 칸막이 술집에 불려가 선배 개그맨인 김형곤으로부터 무차별 폭행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언론에 대서특필 된 뒤 '논란의 당사자'란 이유로 가해자와 나란히 6개월 활동 정지를 당한다. 이후 타사 이적 및 복귀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서인석(원안)은 선배개그맨 고 김형곤과 누구보다 가깝게 지낸 사이면서 갈등도 많았다고 한다. 90년 대 초 희극인 해외 야유회 당시 모습. 고 김형곤(가운데)과 심형래 이경규 엄용수 등이 함께 했다. /서인석 제공
서인석(원안)은 선배개그맨 고 김형곤과 누구보다 가깝게 지낸 사이면서 갈등도 많았다고 한다. 90년 대 초 희극인 해외 야유회 당시 모습. 고 김형곤(가운데)과 심형래 이경규 엄용수 등이 함께 했다. /서인석 제공

-정식 시인으로 등단한 데 이어 직접 작사한 곡으로 음반을 내고 가수로도 데뷔했다. 변화를 시도하려는 의도가 있는지 궁금하다.

방송활동을 쉬는 동안 다양한 외도를 해봤어요. 식당을 운영해봤고, 방송 외주제작도 해봤어요. 안타깝게도 모두 다 끝을 보지 못했죠. 대중스타는 카메라를 떠나는 순간 존재감이 사라지고, 자존감은 바닥에 추락합니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뛰어보지만 매번 쉽지 않다는 걸 깨닫곤 제자리로 돌아오곤 해요. 언제부터인가 시를 쓰면서 제 안에 문학적 소양이 내재돼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 연장선상에서 직접 작사한 곡을 들고 가수로 데뷔한 건데요. 변화의 시도라기보다는 뒤늦게나마 제가 진짜 잘할 수 있는 걸 하겠다는 의지라고 보시면 되요.

서인석은 지난해 월간 순수문학 제312회 시부문에 당선되면서 정식 등단했다. '내 얼굴' 외에 '어른 숲' '아버지의 등' '아버지 노래' 등이 선정됐다. 그의 시는 모두가 남 탓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세속에서 밖으로만 향하는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 자신을 돌아보는 성숙한 미덕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근엔 자신이 직접 쓴 시를 바탕으로 가사를 만들어 '꽃청춘'(박성훈 작곡, 정동구 편곡)이란 트로트 곡을 냈다. 그는 "애초 송해 선생님과 듀엣으로 부르기로 하고 만든 노래"라면서 "환갑이 된 아들과 90대의 건강한 아버지가 활력 넘치는 인생을 찬양하는 신나는 곡"이라고 귀띔했다.

-평소 '태어나서 코미디 외에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자신을 낮추는데 사실 다방면에 재능이 있다. 여러 매체에 칼럼을 쓰고 책도 내지 않았나.

나훈아 선배님이 느닷없이 '테스형'을 부른 뒤 기원 전에 살았던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소환됐잖아요. 저도 그 시대 인물 한 분 얘기를 인용해볼까 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면 웃음은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다'. 웃음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만사형통이자 만병통치약입니다. 포복절도의 웃음은 적당한 환경과 분위기가 조성돼야 가능하지만, 일상의 유머와 위트는 매일 공기를 흡입하고 물을 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야 해요. 모두가 공감하는 웃음코드는 가까이 있어도 인식을 못하는거죠. 대신 누군가 살짝 건드려만 줘도 금방 활짝 꽃이 핍니다.

서인석은 자신의 코미디 삶을 조망한 '나는 코미디언이다'(2017년)를 출간했다. 현직 대통령 탄핵을 몰고 온 '최순실 국정농단사태' 이후 정치 사회 이슈를 분석한 각종 연재 칼럼들을 특유의 풍자 시각으로 엮었다. 날카로운 해학과 함께 개그맨으로 살아온 애환들을 진솔하게 풀어냈다. 그는 한때 필자가 몸담았던 스포츠조선에도 콩트를 고정 필진으로 연재해 꾸준한 인기를 끌었다. 이 연재물은 훗날 '앗 세상이 뜨겁다'란 제목의 코미디 콩트집으로 출간된 바 있다.

서인석은 개그맨을 웃기는 개그맨이다. 밤무대 개그MC로 활약하며 훗날 폭소클럽 개그콘서트로 이어지는 스탠딩 개그의 씨앗을 잉태한 주역이기도 하다. /이선화 기자
서인석은 '개그맨을 웃기는 개그맨'이다. 밤무대 개그MC로 활약하며 훗날 '폭소클럽' '개그콘서트'로 이어지는 스탠딩 개그의 씨앗을 잉태한 주역이기도 하다. /이선화 기자

『어떤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100 미터 밖에서 아내를 불렀는데 대답이 없으면 아내가 조금 늙은 거고, 50미터 밖에서 불러도 무반응이면 많이 늙은 거다. 10미터 밖에서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으면 심각한 상태다.'

한 남자가 이 글을 보고 자신의 아내가 어느 정도 늙었을까 궁금해 직접 시험을 해보기로 했다. 퇴근을 하면서 100 미터 쯤에서 집을 향해 큰 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모야?" 대답이 없었다. 다시 50 미터 쯤 다가가 불러봤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아, 내 마누라가 이렇게 늙었나?' 이번엔 10 미터 밖에서 불렀다.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모야?" 또 대답이 없었다. '내 마누라가 완전히 맛이 갔구나'.

탄식을 하며 집안에 들어서는데 아내가 주방에서 음식을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애처롭고 측은한 마음에 뒤에서 아내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 안으며 나직이 물었다.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모야?" 드디어 아내가 대꾸를 했다. "으이그, 인간아, 내가 수제비라고 몇 번을 말했냐."』(서인석의 '나는 코미디언이다' 중에서)

서인석은 스스로 자신을 B급 개그맨으로 부른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웃음 소재의 제약이나 장애물을 걷어내기 위해서다. 사진은 Inet 서인석의 그시절 음악싸롱. /Inet 제공
서인석은 스스로 자신을 'B급 개그맨'으로 부른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웃음 소재의 '제약'이나 '장애물'을 걷어내기 위해서다. 사진은 Inet '서인석의 그시절 음악싸롱'. /Inet 제공

서인석은 스스로 자신을 'B급 개그맨'으로 부른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웃음 소재의 '제약'이나 '장애물'을 걷어내기 위해서다. 그는 "누구라도 기왕에 웃을 바엔 체면이나 품위를 내려놔야한다"고 말한다. 그가 마이크를 잡으면 금방 박장대소에 빠져드는 건 이 때문이다.

"코미디는 글로 보면 재미없다. 같은 내용도 대본으로 보면 재미가 훨씬 덜하다. 하지만 서인석의 코미디는 글로 봐도 재밌다." SBS '웃찾사'를 연출한 바 있는 박 모 PD가 '나는 코미디언이다' 추천사에서 언급한 이 말은 서인석의 특별한 필력을 새삼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웃으면 몸에 좋은 엔돌핀이 배출되고, 스트레스가 감소하고, 혈압이 내려가고, 우울증이 날아가고, 면역력이 증진 되며, 폐와 호흡기에 맑은 산소가 채워진다. 부작용없는 모르핀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 바로 웃음이다."(마단 카타리아, 인도의 '웃는 사람 클럽' 창시자)

웃음에는 등급이 없다. 서인석은 '개그맨을 웃기는 개그맨'이다. 밤무대 개그 MC로 활약하며 훗날 '폭소클럽' '개그콘서트'로 이어지는 스탠딩 개그의 씨앗을 잉태한 주역이기도 하다. 인터뷰 말미 그는 항변하듯 말했다. "무대는 사라져도 은퇴는 없다, 영원한 'B급 개그'의 자긍심을 끝까지 지키고 싶다."

eel@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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