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출신의 가수 장미화는 '안녕하세요' '헬로아' 등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70년대 '멀티 스타'로 각광을 받다가 이혼 후 30년간 100억 가까운 빚을 갚으면서도 마음을 비우며 부드러움을 잃지 않고 있다./남윤호 기자 |
"나이는 숫자, 살아보니 이제서야 세상 이치를 좀 알 것 같다"
[더팩트|강일홍 기자] 가수 장미화(74·본명 김순애)는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여장부다. 매사 시원 시원한 스타일 덕분에 따르는 가요계 후배들이 많다. 성격상 화통하고 넉살이 좋은 데다 거침없이 쏟아내는 달변으로 TV 주부 대상 토크프로그램 단골 게스트 이미지를 굳히고 있다.
요즘 그는 시청자들의 가려움을 긁어주고, 궁금증을 해소하는 청량제 같은 방송인으로 맹활약 중이다. 매주 KBS1 '아침마당' 생생토크 '만약의 나라면', MBC '기분 좋은날', SBS '좋은 아침' 등을 번갈아가며 출연한다. JTBC, TV조선, MBN 등 종편채널 토크 프로그램에서도 그는 단골 감초 이미지로 사랑받고 있다.
"살아보니 70살을 넘긴 지금에야 세상 이치를 좀 알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사실 저는 20대 나이에 최고 스타가수로 정점을 찍은 뒤 줄곧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았어요. 오랜 시간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오면서 오히려 마음은 평온해졌어요. 마치 긴 시간 돌고 돌아 제자리에 선 느낌이에요. "
장미화는 70~80년대 남성들의 우상이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 시절인 73년 데뷔곡 '안녕하세요'가 폭발한데 이어 같은 앨범에 있던 '헬로아' '어떻게 말할까' 등이 동시에 히트하면서다. 주체할 수 없는 인기에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배우로도 활동했다.
"국내 데뷔 전에 미국과 동남아 등에서 걸그룹 활동을 6년간 했어요. MBC 악단장 출신인 여대영 씨가 작곡한 '안녕하세요'를 밀었는데 사실 음악적으로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어요. 노래가 맘에 들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그때부터 부르는 곡마다 히트를 하고, 인기가 치솟으니 거침없는 물줄기에 휩쓸려가더라고요."
데뷔 직후 짧은 기간 3~4곡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마치 달리는 호랑이 등에 앉은 듯 스스로의 의지와 관계없이 스타가수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다 결혼(79년)과 이혼(83년)을 거치며 굴곡의 소용돌이에 내몰린다. 걸그룹을 포함해 그의 '가수 인생 55년 스토리'를 직접 들어봤다.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11일 서울 상암동 <더팩트> 사옥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장미화는 성격상 솔직하고 옳고 그름이 분명하다. 돌직구 스타일의 '센여자' 이미지에도 그만큼 따르는 후배들이 많다고 한다.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11일 서울 상암동 <더팩트> 사옥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남윤호 기자 |
-만나면서부터 표정이 밝아보여 덩달아 유쾌해지는 것 같다. 코로나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다들 울적한 분위기인데 어떤 비결이라도 있는지?
저는 매사 무조건 긍정마인드예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안달복달하며 고민하지 않아요. 오늘 해결이 안 되면 내일 다시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죠. 설령 앞 뒤가 꽉 막히는 상황이 와도 절대 겁먹지 않아요. 살면서 여러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어서인지 삶의 지혜를 저절로 터득하게 되더라고요. 누구보다 힘들게 살았지만 마음 한편엔 늘 저보다 더 어려운 분들을 생각해요. 혼자 다 가지는 것보다 이웃과 나누는 여유를 갖는 게 훨씬 값지고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나이를 먹으면 얼굴에 지나온 삶이 그려진다고 하잖아요. 기자님한테 밝아보인다는 얘길 들으니 괜히 기분이 좋네요.
-오래 전부터 연예인 자선바자회를 이끌며 나눔을 실천해오고 있는데 마음의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인가.
네 맞아요. 저한테는 물질적으로 넘쳐나는 것보다 따뜻한 마음을 담은 작은 사랑이 더 중요해요. 계획하고 준비하기까지는 힘들어도 막상 누군가와 나눔을 공유하기만 하면 한순간 모두 씻겨나가더라고요.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땀 흘려 봉사하면서 얻는 행복은 금전적 가치로 따질 수 없어요. 경험해보니 그래요. 처음엔 몰랐는데 결국 저 자신을 위하는 일이더라고요. 제가 더 크게 보람을 느끼고 만족하는 걸 느끼며 스스로 놀라곤 하죠. 행복은 나누고 공유하는 것이지, 결코 남을 위한 희생이나 헌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장미화는 매년 자선바자회를 한 차례씩 갖고 수익금 전액을 불우 독거노인들과 함께하는 일에 쓴다. 그가 서울 서초구청의 후원을 받아 진행해온 '장미화의 아름다운 손길'은 올해로 19년째를 맞았다. 조항조 배일호 현숙 설운도 진성 영탁 주현미 서지오 등 후배 가수들이 번갈아 재능기부 형식으로 동참하고, 강부자 정혜선 등 원로배우들이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준다고 한다. 장미화는 "옷과 액세서리, 화장품 등 20여종의 기부 물품을 받아 바자회를 연다"면서 "10여년간 한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후원해주신 형지어패럴 최병오 회장님께 이 자리를 빌어 꼭 감사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장미화는 요즘 KBS1 '아침마당' 등을 비롯해 주부 대상 토크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하며 시청자들의 가려움을 긁어주고 궁금증을 해소하는 청량제 같은 방송인으로 맹활약 중이다. /남윤호 기자 |
-요즘 방송에서 예능감 넘치는 '유쾌한 인생 컨설턴트'로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전성기 시절 인기가 어느정도였는지 말해줄 수 있나.
글쎄요, 제 자랑을 하는 것 같아 쑥스럽네요. 엄청났죠. 지금 젊은 특급스타들을 만나도 주눅이 들지 않는 건 그 이상 인기를 누려봤기 때문이에요. 당시 최고 비싼 세단(시보레 1700)을 타고 다녔고, 가장 핫한 장소인 명동이나 무교동엘 나가면 구름 인파가 몰려들 만큼 팬심을 흔들고 다녔어요.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안타깝게도 기자님이나 저나 실감이 나진 않네요, 하하. 인기는 한번 빠지면 좀처럼 부풀기 힘든 거품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잘나가던 시절은 한 두번씩 있게 마련이고, 나이를 먹으면 그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사는 것 같아요.
장미화는 73년 정규 데뷔 앨범에 수록된 '안녕하세요' '헬로아' 등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일약 스타가수로 부상했다. 이후 70년대 후반 결혼 직전까지 남진 나훈아 이미자 김추자 혜은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정식 데뷔에 앞서 그는 1965년 KBS 연말 톱싱어대회에서 대상을 받으며 신중현 사단 1호 가수로 발탁됐다. 5인조 걸그룹 '레이디버드' 싱어 겸 리더로 미국과 캐나다, 동남아에서 활동했다. 홍콩 공연 당시 물랭루즈 클럽에서 웬디 윌리엄스와 한 무대에 섰고,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는 라이처스 브라더스와 협연할 만큼 인기를 누렸다.
-가수로 승승장구하다 갑작스럽게 결혼을 하면서 가요계를 떠났는데 이 때부터 삶이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했다는 건 무슨 말인가?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인기를 얻을수록 가수 생활에 환멸을 느끼던 중이었어요. 무명 때는 인기만 얻으면 뭐라도 할 것 같았는데 막상 정상에 오르고 나니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그땐 세상물정을 모를 만큼 나이도 어렸고요. '눈이 내리네'란 노래를 부른 가수 이숙이 절친인데 마침 좋은 남자가 있다며 소개를 했어요. 문제는 결혼과 함께 활동을 못 하게 된 거죠. 시댁에서 밤무대는 물론이고 방송도 출연을 못 하게 하더라고요. 야간업소 선불금을 갚아주면까지 못하게 해서 처음엔 배려해준다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결국 결혼한 지 3년 만에 이혼을 했고, 아이를 뺏기지 않기 위해 남편의 빚을 모두 떠안으면서 불행이 시작된 거죠.
당시엔 인기가수들이 대부분 극장식 댄스 홀이나 카바레 같은 밤무대에서 돈을 버는 구조였다. 장미화는 "인기가 많을수록 여러 곳을 동시에 뛸 수 있어 돈을 많이 버는 대신 술 취한 취객들의 행패에 자존감이 늘 바닥이었다"면서 "술 뚜껑이나 고추장, 오징어 다리 같은 걸 무대로 던지면 다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결혼해서 아이 낳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인생이 뜻대로 되는 건 아니더라"고 했다. 남편이 무리하게 빚을 내 부도를 내는 바람에 경제적 어려움 속에 결국 이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30년간 100억 가까이 빚을 갚았다." 장미화는 남편이 무리하게 빚을 내 부도를 내는 바람에 경제적 어려움 속에 결국 이혼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힘들고 고단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남윤호 기자 |
-얼마나 많은 빚을 떠안았길래 30여년간 부채를 갚아야했나. 아직도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아는데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
모든 걸 다 내려놓고서야 과거 힘든 얘기를 하게 되네요. 여유롭지는 못하지만 이젠 베풀고 나누고 살 나이기도 하고요. 사실 이혼 후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살 길은 다시 밤무대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었어요. 그땐 자존심이고 뭐고 오직 열심히 일해 빚을 갚고 경제적으로 자립해야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러던 중에 가수 정종숙이 연예인들 곗돈을 들고 미국으로 달아난 사건이 있었죠. 빚을 갚으려고 힘들게 붓고 있던 목돈을 한번에 잃고나니 모든 희망이 사라지더라고요. 원래 있던 3억까지 총 4억원 가량(당시 강남 현대아파트 1채에 4500만원 시절)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모두 포기하고 싶었지만 아들을 보면서 이를 악물고 견뎌낼 수밖에 없었죠. 원금과 이자까지 30년간 대략 100억 가까이 빚을 갚은 것같아요.
가수 정종숙은 '달구지' '둘이 걸었네' 등의 노래로 인기를 누렸다. 나이는 장미화보다 어리지만 데뷔 시기는 비슷해 70년대 함께 활동한 선후배 사이다. 장미화에 따르면 정종숙은 서울 청담동에 '달구지'라는 카페를 운영하며 연예계 지인들을 계원으로 끌어들였다. 당시 이덕화 김형자 혜은이 남궁옥분 등 연예계 선후배들이 피해를 봤다. 장미화는 "원래 정종숙이 금전관계가 깨끗하기로 소문이 난 친구였다"면서 "그래서 연예계 지인들이 믿고 돈을 맡겼다"고 했다. 정종숙은 1982년 3월에 야구선수 이원녕과 결혼해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무남독녀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7자매 막내였다는데 어떤 사연이 있는가. 장미화란 예명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궁금하다.
언니들 얘기하면 가슴이 아파요. 요즘 코로나 때문에 전 세계가 백신 개발에 관심이 많잖아요. 언니들이 6명이나 있었는데 유아기 치료 백신이 없어서 모두 세상을 떠났어요. 부모님은 아들을 낳으려고 계속 출산을 했다고 하는데 다행히 막내로 태어난 저는 당시 막 국내에 보급된 페니실린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고요. 다출산 시대에 무남독녀처럼 자랐으니 늘 외로웠죠. 어려서부터 노래에 관심이 많았고, 담장에 핀 장미를 유난히 좋아해 훗날 가수가 되면 꼭 '장미꽃'(장미화) 이름을 갖고 싶었어요.
장미화는 해방 직후 서울 서대문구 무악재 고개 근처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6.25 전쟁 혼란기에 헤어져 이산가족으로 살았다. 초등학교까지 그는 아버지의 존재를 모른 채 줄곧 어머니와 살았다. 수년 뒤 아버지 생존 사실이 확인돼 가족 상봉을 했고, 한동안 아버지와 살기도 했다. 장미화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당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엄마 곁을 잠시 떠났는데 이미 새로운 가정을 꾸린 아버지 집에서도 오래 살지는 못했다"고 털어놨다.
73년 정식 데뷔한 장미화(원 안)는 1965년 '신중현 사단' 1호 가수로 발탁된 뒤 5인조 걸그룹 '레이디버드' 싱어 겸 리더로 미국과 캐나다, 동남아에서 활동했다. /장미화 제공 |
-성격과 스타일이 원래 긍정 마인드인가. 풍기는 느낌만 보면 어느 누구도 아픔을 겪고 살았다고 말하기가 어려울 것같다. 마지막으로 바람이 있다면.
저처럼 다 내려놓으면 누구나 긍정 마인드가 됩니다. 하하, 농담이고요. 어린 시절 봄마다 담장에 핀 개나리, 진달래, 접시꽃, 장미꽃을 보며 희망을 키웠어요. 그래서 성격은 늘 밝고 유쾌한 편이었죠. 게으른 스타일은 아닌데 '때가 되면 노력한 결과를 얻을 것'이란 느긋한 생각을 늘 갖고 살았어요. 데뷔 직후 '안녕하세요'가 벼락 히트를 쳤지만 정작 저는 타오르는 인기에도 무덤덤했던 것같아요. 그래도 나이를 먹고보니 이제는 기도를 많이 해요. 바람이 있다면 남은 시간 건강하고 편안하게 살게 해달라는 것 뿐이죠.
장미화는 "연예계가 과거엔 지금처럼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면서 "여자 혼자서 그 많은 빚을 갚으며 산다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라고 했다. 그는 연예계 대표 불자 연예인이다. 그는 "딴 짓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 언젠가는 보답을 주실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83년 이혼 후 30년 넘게 결혼을 하지 않고 사는 이유에 대해 "한번 실패로 후유증이 너무 커 두 번 다시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면서 "후회하진 않지만 나이를 먹으니 애인 같은 친구가 가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든다"고 말했다.
장미화는 매년 자선바자회를 한 차례씩 갖고 수익금 전액을 불우 독거노인들과 함께하는 일에 쓴다. 그가 서울 서초구청의 후원을 받아 진행해온 '장미화의 아름다운 손길'은 올해로 19년째를 맞았다. /한지일 SNS |
장미화는 성격상 솔직하고 분명하다. 그는 "돌싱으로 사는 동안 어쩌다 접근하는 남자도 주로 10살 이상 연하남이어서 컨트롤이 어려웠다"고 했다. 그는 또 "남들은 나를 센 여자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부드럽고 온화하고 여리다"면서 "세파에 휘둘려 강한 이미지를 보여주려다 자신도 모르게 강한 보호색을 띠게 됐다"고 말했다.
장미화는 79년 결혼하며 가요계를 떠나기까지 모두 6장의 앨범(LP)을 냈다. 이후 음반활동을 모두 접었다. 컴백 후에도 신곡은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40년 가까이 지난 2017년에야 새 음반을 발표할 용기를 냈다. 300장 한정 LP 리미티드 에디션을 내고 이를 기념하는 '추억의 콘서트'도 가졌다.
그는 "추억을 되새김질 하는 한강 선상콘서트였는데 올드 팬분들의 엄청난 호응과 열기에 놀랐다"면서 "가수로서는 후회도 미련도 없다"고 했다. 요즘 일고 있는 트로트 열기에 대해서는 "오리지널 팝가요 스타일인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장르지만, 후배가수들의 활약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고 말했다.
10대 중반 걸그룹 소녀로 출발한 장미화는 한때 '멀티 스타'로 각광을 받았다. 가수로 정점에 서고, 스크린과 브라운관, 연극계를 넘나들며 배우로도 활약했다. "열정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예요,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고 나이는 숫자일 뿐이에요." 황혼의 나이, 필자의 눈에 비친 그의 진짜 매력은 대중스타로 살아온 오랜 연륜을 머금은 부드러움과 여유로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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