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인터뷰] '사라진 시간' 정진영, 인생 '단 하나'의 시나리오
입력: 2020.06.28 00:00 / 수정: 2020.06.28 00:00
영화 사라진 시간은 여러 장르가 한데 뒤섞이고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에 대한 힌트도 없다. 그럼에도 몰입하게 되는 늦깎이 감독 정진영이 구축한 기묘한 세계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영화 '사라진 시간'은 여러 장르가 한데 뒤섞이고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에 대한 힌트도 없다. 그럼에도 몰입하게 되는 늦깎이 감독 정진영이 구축한 기묘한 세계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조진웅 출연, 감독 데뷔에 가장 큰 용기 됐죠"

[더팩트 | 유지훈 기자] 40년 동안 품고 있던 꿈이었다. 어깨너머로 배워보려고도 했지만 "아무래도 무리다"라는 생각만 더 심해졌다. 그 꿈 주변을 맴돌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33년 관록의 배우가 되어 있었다. "내가 살면서 딱 한 번만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라는 생각에 습작을 반복했다. 늦깎이 영화감독 정진영의 데뷔작 '사라진 시간'이 탄생했다.

지난 18일 개봉한 '사라진 시간'은 의문의 화재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형구(조진웅 분)가 지금까지 믿었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충격적인 상황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를 담는다. 이 작품은 기존 영화들과 궤를 달리한다. 형구의 사건 조사는 형사물, 화재 사건으로 죽음을 맞는 수혁(배수빈 분) 이영(차수연 분)의 사랑은 멜로,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과정과 결말은 판타지이자 미스터리다. 쉼표 역할을 해줄 코미디도 곳곳에 배치됐다. 다양한 장르가 섞여 난해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혼란이 정진영 감독이 의도한 장치라는 점이다.

정진영은 삶에 있어 단 한 번만 이야기꾼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사라진 시간'에 모두 쏟았다. 주인공 형구를 빚어내는 데 모티브가 됐던 조진웅은 선배의 도전에 출연을 결심했고 배수빈 차수연 정해균 이선빈 장원영 등도 힘을 보탰다. 이야기의 흐름도 그 끝에 준비된 결말도 참으로 알쏭달쏭하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영화의 의미를 더듬거리는 데 지쳐 직접 정진영 감독을 만났다. <더팩트>와 마주한 신인 감독 정진영은 "배우였을 때는 농담도 섞어가며 즐거웠는데 감독이 되니 어렵다"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사라진 시간은 의문의 화재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형구가 지금까지 믿었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충격적인 상황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를 담는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사라진 시간'은 의문의 화재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형구가 지금까지 믿었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충격적인 상황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를 담는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Q. 데뷔작 '사라진 시간'이 드디어 개봉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감회를 뭐라고 딱 잘라 말씀드리기가 어렵다. 무언가 덩어리 같은 감정이 있다. 언론의 평을 조금 봤고 다른 감독님들의 평가도 좀 봤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관객의 평가가 아닐까 싶다."

Q. 지금까지 나온 평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을 앞에다 두고 혹독한 평가를 하지는 않는다. 그 평가를 홍보용으로 활용한다는 것을 아는데 누가 나쁜 말을 하겠나. 그래도 영상들을 보니 저게 덕담인지 진심 어린 칭찬인지 구별이 가긴 한다. 무엇보다 이창동 감독님의 평가가 궁금했다. 가장 엄정한 분이다. 본인의 멘트가 관객들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멘트를 잘 하지 않는다. 확인해보니 싱글벙글 웃으면서 극찬해줬다. 그래서 좋았다. 초긴장 상태였다가 그 평가를 보고 맥이 풀려서 어제 맥주 한잔했다."

Q. 이창동 감독이 어떤 평가를 내려줬나.

"배우 정진영이 이렇게 뛰어난 이야기꾼인 줄 몰랐다고 하더라. 그런데 말의 내용보다 표정이 더 중요했다. 표정이 진짜 같았다. 전화해서 감사하다고 했다. 그런데 정말 좋게 봤다고 하더라. 물론 몇몇 부분들의 아쉬움을 지적해주기도 했다."

Q. 결과물이 나왔으니 보완하고 싶은 부분들도 눈에 밟혔을 것 같다.

"많다. 한 달이라는 촬영 기간을 정해뒀고 그 안에 끝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촬영하면서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후반에도 보완을 열심히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야 '영화감독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라는 감이 잡혔다."

Q. 기존 구성에 벗어난 시나리오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들었다.

"습작을 몇 번 했었다. 그런데 그걸 도저히 영화화할 수 없겠더라. 기존 관습에 사로잡혀 있는 것들이었다. 그 관습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 관습을 따라가다 보니 스스로 검열을 했고 나만의 것이 없어졌다. 내가 생각했던 이야기가 황당한 것이니 거기에만 따라가 보려고 신경 썼다. 사실 황당한 이야기다. 관객을 계속 예상하지 못했던 곳으로 끌고 간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야기, 그럼에도 어떤 지점으로 향하는 이야기가 목표였다."

사라진 시간은 기존 영화의 흐름에서 다소 벗어나 있다. 정진영 감독은 모험을 할 수 있는 상황이기에 더 규칙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에이크메이커뮤비웍스 제공
'사라진 시간'은 기존 영화의 흐름에서 다소 벗어나 있다. 정진영 감독은 "모험을 할 수 있는 상황이기에 더 규칙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에이크메이커뮤비웍스 제공

Q. 기존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는 게 싫었나.

"세상엔 참 좋은 이야기가 많다. 내가 내 꿈을 실현하는 이야기인데 왜 자유롭지 못한가에 대한 생각이 많았다. 나는 모험을 할 수 있다. 나는 이제 막 감독을 시작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얼마든지 실험을 해볼 수 있었다. 그래서 더 규칙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했다."

Q. 여러 장르가 혼재되어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인가.

"그렇다. 장르를 파괴하려는 시도는 아니었다. 그저 한 장르에 사로잡혀있고 싶지 않았다. 관습은 관객과 교감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사라진 시간'은 안전하게 달려가지 않는다. 그저 끝까지 달려간다. 그걸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다. 시나리오를 완성하고부터 고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난 모난 돌을 그리고 싶어서 그렇게 그렸다. 사람들은 동그랗게 만들고 싶어지는 게 당연했다. 고민 끝에 이준익 감독에게 보여줬고 '잘 쓴 시나리오'라고 해줬다. 그러면서 '호불호가 엇갈릴 거니 감당해야 할 것'이라는 조언해줬다."

Q. 시나리오를 받은 조진웅의 반응도 궁금하다.

"작품을 만드는 데까지 가장 큰 용기를 줬던 것은 조진웅이었다. 초고를 쓰자마자 보여줬다. 형구가 조진웅을 모델로 구상된 캐릭터라서 그렇다. 대본을 보낸 지 하루 만에 하겠다고 하더라. '너 이거 내가 선배라서 하겠다고 하는 거 아니야'라고 물었는데 절대 아니라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치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말하라고도 했는데 '토씨 하나 건들지 말아달라'고 했다. 이게 정말 큰 힘이 됐다. 조진웅 덕분에 투자사와 스태프들이 모였고 든든한 지원군이 완성됐다."

Q. 관객이 '사라진 시간'을 아무런 정보도 없이 봐주길 원했다. 영화를 본 사람으로서 '사라진 시간'을 통해 하고 싶은 메시지가 정확히 무엇인지 듣고 싶다.

"남들이 규정한 나, 내가 규정한 나 사이의 충돌에 대한 내용이다. 그 충돌로 인한 슬픔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사람은 남들이 규정하는 나로서 더 많이 살아야 하는 아이러니 속에 있다.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 곳곳에 코믹적인 요소를 넣었다. 갑자기 시작해서 갑자기 끝나는 영화다."

Q. 초반의 화재 사건과 더불어 잔인할 수 있는 부분들을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한 것 같다.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장면들을 없게 하고 싶었다. 화재도 불타는 장면 없이 아름다운 불꽃이 솟아나게만 연출했다. 불이 멋지게 타오르는 게 중요하지 않은 작품이다. 자극성으로 관객을 끌고 가는 것은 반칙이라고 봤다."

사라진 시간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자극적인 장면이 없다. 화제사건마저 아름다운 도깨비불처럼 연출됐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사라진 시간'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자극적인 장면이 없다. 화제사건마저 아름다운 도깨비불처럼 연출됐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Q. 갑자기 시작해서 갑자기 끝나는 그 마지막 내용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남들이 규정하는 나'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하고 해주고 싶었다. 다른 엔딩은 생각해본 적 없다. 자세히 설명해볼까 생각도 했는데 그러려면 화재 사건으로 죽는 부부의 이야기만 가지고 영화 두 편을 만들어야 했다. 이런 상황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영화가 아니라 상황 이후를 표현하는 영화다. 그래서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나로서는 할 일을 다 한 거다. 극장에서 답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관객들이 그 질문을 가져가 주셨으면 좋겠다. 엔딩에 대한 찝찝함이 남는 게 나의 바람이다."

Q. 코믹 장면의 타율이 꽤나 높다.

"일부러 코미디를 넣고 싶었다. 웃으면서 보는 영화였으면 했다. 초반부에 대놓고 웃으라고 만든 장면이 있는데 그건 실패한 것 같다. 그런데 상황이 진행되면서 하나씩 웃음이 들려왔다. 남을 웃기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느꼈다."

Q. 작업하면서 힘들었던 것은 무엇인가.

"사실 다 힘들었다. 연출을 공부한 게 아니었고 시나리오도 내가 썼다. 촬영이 끝나고 나서의 후반 작업도 힘들었다. 그렇게 힘들었는데도 재미있었다. 이제 돌아보니 앞으로 영화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알겠다."

Q. 첫 결과물이 나왔으니 이제 차기작 생각도 날 것 같다.

"솔직히 모르겠다. 어릴 때 꿈이었으니 한번 해보자 하고 한 게 '사라진 시간'이었다. 처음은 이렇게 그냥 해도 되는데 두 번째는 내가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영화적 가치를 비롯해 많은 부분들을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계획이 없다. 관객들의 평가를 다 보고 나서야 내 생각이 다 정리될 것 같다."

형구가 모든 것을 되돌리려 술을 마시고 취해 쓰러진 장면은 롱테이크로 촬영됐다. 마음껏 연기하는 조진웅의 연기를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형구가 모든 것을 되돌리려 술을 마시고 취해 쓰러진 장면은 롱테이크로 촬영됐다. 마음껏 연기하는 조진웅의 연기를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Q. 시사회가 끝나고 기자간담회에서 배우들이 '사실 영화가 이해 안되지만 찍었다'는 식으로 농담을 했었다.

"그날 상황이 코믹이긴 했다. 정말로 배우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촬영을 끝낸 거라는 오해가 생기더라. 나는 확신이 있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물어봤다. 모두 농담이었다고 하더라. 이 관록의 배우들이 뭘 못하겠냐. 배우는 이성적 해석과 무관하게 자신의 캐릭터가 이 시공간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안다. 배우의 본능이다. 나는 감독으로서 그 본능을 캐치해서 영화 속 상황에서 연기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Q. 배우와 감독 둘 다 해봤다. 무엇이 더 즐겁고 보람찬지, 그리고 배우로서 몰랐던 감독의 마음을 알게 된 것도 있나.

"둘 다 즐겁고 보람차다. 감독의 생각은 이 영화를 찍기 전부터 조금씩 알게 됐다. 나는 촬영 직전까지 감독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감독은 우리와 다른 생각에 빠져있다. 영화 전체에 대해서는 감독이 잘 알고, 배우는 한 캐릭터에 대해 100가지가 넘는 생각을 가지고 촬영에 임한다. 둘 다 참 재미있는 직업이다."

Q. 형구가 술을 마시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찍어서 영화에 넣었다. 조진웅은 그 장면 촬영이 너무 길었고 감독님이 '컷'을 외치지 않으니 난감했다고 하더라.

"배우들은 감독보다 더 많이 준비해온다. 사실 형구가 울고 웃다 잔을 가지러 프레임 밖으로 나갔다 오고 그런 게 대본에 다 써있었다. 진웅 씨는 그 대본대로 열심히 했고 나는 그 연기가 끝날 때까지 컷을 하지 않았던 거다. 촬영이 끝나고 모두가 박수를 쳤다. 정확한 연기들은 내가 주문을 할 수 없었다. 조진웅이라는 배우의 탁월함이 나오는, 배우가 가져오는 창의성이 발현되는 장면이다. 모두 다 담고 싶었지만 영화의 균형 때문에 조금 잘랐다."

Q. 흥행에 대한 부담은 어떤가.

"사실 부담이 크다. 내가 혼자 만든 게 아니기 때문이다.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 손익은 넘겨줬으면 하는 게 바람이다. 보통 시대라면 될 텐데 또 시국이 이렇다. 면이 서기 위해 신인 감독으로서 열심히 홍보 인터뷰도 하고 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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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기획팀 | ssent@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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