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영은 18일 개봉한 영화 '야구소녀'에서 주인공 주수인 역을 맡았다. 시원한 단발에 멋진 투구 폼이 어우러지니 자꾸만 마음이 기운다. /싸이더스 제공 |
정제되지 않은 스타는 어떤 모습일까. 요즘 연예계는 스타도 많고, 연예 매체도 많다. 모처럼 연예인 인터뷰가 잡혀도 단독으로 하는 경우도 드물다. 다수의 매체 기자가 함께 인터뷰를 하다 보니 대부분의 내용이 비슷하다. 심지어 사진이나 영상도 소속사에서 미리 만들어 배포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더팩트>는 순수하게 기자의 눈에 비친 그대로의 스타를 '내가 본 OOO' 포맷에 담아 사실 그대로 전달한다. <편집자 주>
[더팩트 | 유지훈 기자] 변해가는 세상은 언제나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주로 과거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에 대한 재고다. 이주영은 최근 그 질문들 가운데 가장 뜨거운 젠더 이슈를 자신의 입에 올렸다. 자신의 직업이 배우니 그저 배우로만 불러달라는 것. 부탁이니 그 앞에 '여(女)'라는 표현을 빼달라는 것. 지금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그때 그는 몇몇의 비난을 묵묵히 감내해야만 했다.
지난 12일 서울 삼청동 인근 카페에서 이주영을 만났다. 최근 시사회를 가졌던 영화 '야구소녀' 라운드 인터뷰에서다. 일곱 취재진이 그를 둘러싸고 앉았다. 짧게 잘라 시원한 머리를 귀 뒤에 가지런히 넘기며 맑은 미소로 맞아줬다. 이 배우의 이 쇼트커트. 참으로 멋졌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앞으로는 좀 길러볼까 한다"고 털어놨다.
"이게 제가 좀 길러보려고 하면 잘라야 하는 역할이 오고, 그 작품이 끝나서 기르다 보면 또 그런 역할이 들어와서 자르게 되고 그런 거예요(웃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가 그나마 최근 가장 길었던 것 같아요. 의도치 않게 짧은 머리를 고수했어요. 팬들은 짧은 머리가 어울린다고 해주시는데 그래도 좀 변화를 주고 싶어요."
이주영은 강한 어조로 여성의 삶에 대해 주장을 펼치는 운동가가 아니다. 그저 앞서 언급한 소신발언, 쌓아온 필모그래피, 맡은 역할들을 소화하느라 유지했던 짧은 머리가 그 편견을 부추겼을 뿐이다. 최근 드라마 영화로 만들어지는 많은 작품들이 성역할을 허물자는 메시지를 담았고 이주영은 배우로서 자신의 맡은 역할을 충실히 소화했다. 편견을 한꺼풀 벗긴 이주영은 자신의 직업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수많은 배우들 중에 하나였다.
이주영은 '야구소녀'가 고교 야구선수 주수인이 여자라는 편견을 깨고 프로선수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담는다. 이주영은 작품과 캐릭터가 매력적이어서 출연을 결심했다. /'야구소녀' 포스터 |
"여성 혹은 약자의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을 좀 하게 됐어요. 제 개인 선호라기보다는 소수자나 약자의 권리를 대변하거나 그런 캐릭터들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작품들이 요즘 많잖아요. 그런 것들 가운데 작품성이 있어 보이고 캐릭터가 매력적이게 느껴져서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요즘의 추세에 제가 따라가는 거죠. 내가 안 해봤고 또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작품을 주로 선택하게 돼요."
18일 개봉한 영화 '야구소녀'에서 이주영은 프로야구선수를 꿈꾸는 고등학생 주수인 역을 맡았다. 고교 야구팀의 여자 야구선수인 그는 여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도 받지 못한 채 꿈을 접어야 하는 위기에 놓인다. 수인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은 그 꿈을 접으라고 말한다. 심지어 엄마 신해숙(엄혜란 분) 조차 그렇다. 새로 부임한 코치 최진태(이준혁 분)도 마찬가지지만 조금은 다르다. 여자라서가 아니라 그저 한 명의 야구선수로서 평가 미달이라는 것이었다. 주수인은 끝까지 꿈을 지켜내고 후반부 엔딩을 맞이한다. 배우 이주영도 '야구소녀' 주수인도 주변의 비난을 감내하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충실한 플레이어다.
"배우로서 고집스러운 면도 있어요. 그 때문인지 수인이를 이해하고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20대 후반의 나이에 10대 후반의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제 과거의 고집스러운 꿈을 많이 이루게 됐다고 생각해요. 활동을 이어가면서 뚝심과 열정 그리고 거기에 대한 믿음을 조금은 잃었어요. 그런데 '야구소녀' 덕분에 과거 제 그런 모습을 기억해냈고 다시 되돌아볼 수도 있게 됐어요. 이제 보니 그냥 꾸준히 제 뜻대로 해온 게 지금의 저를 만들어준 것 같아요."
이주영은 '야구소녀'를 촬영하며 과거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요행 없이 꾸준히 정진하는 배우로서의 삶을 곱씹을 수 있는 계기였다. /싸이더스 제공 |
"작은 영화, 독립 영화를 많이 했었죠. 그 작품들을 소비하는 팬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태원 클라쓰' 같은 드라마나 상업영화는 제 인지도를 올릴 수 있는 작품이에요. '여기 나라는 배우가 있어요'라고 알릴 수 있었어요. 상업성과 작품성을 규정하거나 결과를 예상하며 캐릭터를 선택하진 않아요. 예상해도 항상 빗나가더라고요(웃음)."
이주영은 참 달변가였다. 무심코 툭 건드려도 수많은 걸 쏟아낸다. "직접 공을 던지기 위해 훈련을 많이 했나요"라고 물으면 대역을 쓸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그래도 직접 해보고 싶어 노력하다 보니 없었던 요통까지 생겼으며, 그런 노력도 부족해 컴퓨터 그래픽까지 사용했다는 결론까지 다다른다. 그런데 그 말들 안에 기사에 담기 좋은 포인트들이 녹아 있으니 어떻게든 살려보고 싶은 욕심이 든다.
"실제 프로선수를 준비하는 남자 고등학생들과 훈련을 같이 했어요. 그 친구들이 트라이아웃을 다녀와서 어떻게 진행됐는지 이야기해주기도 했어요. 남자들과 같이 훈련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극중에서 수인이가 화장실 한 칸을 라커룸으로 썼던 것처럼 불편한 것들이 많더라고요. 수인이 캐릭터가 겪었을 소외, 그 소외가 크게 변해서 포기해야 할까 하는 두려움마저 느낄 수 있었어요."
이주영은 야구선수라는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고등학생들과 함꼐 훈련에 임하기도 했다. /'야구소녀' 스틸컷 |
이주영. 어찌 보면 참 흔한 이름이다. 한 번이라도 눈에 띄어야 하는 직업인데도 평범한 본명을 그대로 밀고 나갔던 것은 배우로서 우직하게 지켜나간 소신이기도 했다. "그 흔한 이름 가운데 가장 유명한 배우가 되고 싶었다"는 말을 큰 눈으로 바라보며 이야기하니 갑자기 움츠러들었다. 겉은 '야구소녀'일지언정 내실은 그가 던지는 야구공처럼 단단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알지 못하는 시절이 있었어요. 지금의 저는 배우로서 많이 성장했고 달라진 부분들도 있어요. 하지만 연기를 하는 자세는 늘 똑같았어요. 연기를 더 사랑하게 됐으면 사랑했지 덜하진 않아요. 아무도 모르던 사이 인기도가 조금씩 쌓여서 보일 뿐이에요. 요행은 아직 부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사실 연기는 하면 할수록 잘 모르겠거든요."
사실 나는 그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가 조금 더 여자라는 성별에 대해서, 배우로서 자신이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주영은 변해가는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겨 둔 평범한 사람이었다. 최근 뜨거운 숙제는 명확한 해답을 이미 내놓았고 그 다음 세상이 던진 질문을 홀로 풀고 있는 미래에서 온 배우 이주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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