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일홍의 스페셜인터뷰69-한지일] "DJ 돕다 '블랙 연예인', 27개 직업 전전"
입력: 2019.12.23 06:00 / 수정: 2019.12.23 12:46
1/2
  • 이전
  • 다음
"70살이 넘어서야 진정한 행복 찾았어요." 한지일은 "격려해주신 모든 분들께 보답해드릴게 없어 늘 송구스럽지만 더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했다. /이동률 기자

70~80년대 스타배우, 성공과 실패 거듭 '파란만장한 배우인생'

[더팩트|강일홍 기자] 한지일(71·본명 한정환)은 1970년대 스타배우다. 국내 첫 모터사이클 영화 '바람아 구름아'(72년)로 데뷔한 그는 78년 '경찰관'으로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배우로 입지를 굳혔다. 이후 '길소뜸' '아다다' 등의 작품으로 정상급 배우로 자리잡았고 '아제아제 바라아제'(89년)로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한다.

한때 한소룡이란 예명으로 활동하다 당대 최고 스타배우 김(지)미 신성(일)의 이름 한글자씩을 떼어 '한지일'로 개명했다. 그의 이름이 다시 주목을 받은 건 비디오 영화제작자로 변신하면서다. 진도희 등 스타 에로배우들을 발굴, '정사수표' '젖소부인 바람났네' 등으로 그는 90년대 성인비디오 시장의 황제로 군림한다.

배우에서 에로계의 거물로 인생역전을 꿈꾸던 그의 야망은 영상콘텐츠의 디지털시대 도래와 함께 물거품이 됐다. 마침 불어닥친 IMF의 파고 속에 비디오산업이 급속히 사양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콘텐츠를 헐값에 팔아넘기면서 버텼지만 역부족이었다. 빚더미와 이혼 등 가정사까지 겹쳐 몇 번의 법정공방으로 100억대의 재산이 날아갔다.

택시기사, 주유원, 건설현장 막노동 등으로 전국을 전전하며 재기를 꿈꾸지만 모든 걸 다 잃고 포기한 채 무작정 해외로 떠난다. 베트남에서 3년, 미국에서 11년 등 무려 14년간 해외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다. 2017년 10월 22회 부산국제 영화제 '신성일 특별회고전' 참석을 계기로 일시 귀국한 뒤 지인들의 권유로 국내 정착을 결심한다.

그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돌고돌아 단편영화 '미희'의 주인공을 맡으며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스크린 복귀는 94년 영화 '칠삭동이의 설중매' 이후 26년만이다. 정상급 배우에서 호텔 웨이터까지 파란만장한 그의 배우인생을 직접 들어봤다.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19일 오후 서울 상암동 <더팩트> 사옥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과거는 과거일 뿐 오늘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습니다." 한지일은 인터뷰 내내 당당했지만 겸손했다.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13일 오후 서울 상암동 <더팩트> 사옥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이동률 기자

-배우로 다시 돌아왔다. 오랜 기간 스크린을 떠나 있었던 데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 복귀해 만감이 교차할 것 같다.

올해는 '한국영화 100주년의 해'이고, 개인적으로 저는 너무 과분한 사랑을 받았어요. 26년 만에 대형 스크린으로 제 모습을 보는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비록 47분짜리 짧은 영화라도 주인공을 맡아 연기할 수 있었던 건 많은 분들이 격려하고 용기를 주신 덕분이에요. 이렇게 고마움과 감사 인사를 드리게 돼 다행이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죄송한 마음도 가득해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원로가 돼버린 그런 느낌 아시죠?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각종 영화제에 초대받아 레드카펫을 밟으면서 많이 늦었지만 배우로서 이제라도 뭔가 할 일을 찾은 것같은 자신감이 생겼어요.

한지일이 오랜만에 출연한 '미희'는 단편영화지만 그에겐 매우 의미가 깊다. 배우로서 단절됐던 26년이란 시간을 이어준 작품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만든 특별 '변사영화'이기도 하다. 그는 주인공 진덕이란 인물을 통해 밝지 않은 노후, 고령화 시대의 어두운 단면을 조명했다. 지난 10월 부산예술회관에서 첫 시사회를 가진 직후 그는 "오랜만에 출연한 영화라서가 아니라 두 번 다시 배우로 활동하리란 엄두를 못냈기 때문에 더 감회가 깊었다"고 울먹였다.

-영화 '미희'에 출연하기로 결심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 고민했다고 들었다. 어떤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

꾸준히 연기를 해온 것도 아닌데다, 이 나이에 배우로 다시 나선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럽고 창피했어요. 해외서 떠돌이 생활을 하다 귀국한 뒤 많은 분들한테 관심을 받는 것만으로 저는 행복해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죽을 때까지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며 살면 더 바랄게 없죠. 어설프게 연기자로 스크린에 선다는 게 두렵기도 했고요. '미희'는 부산에서 세번이나 요청이 왔고, 저는 계속 고사했어요. 그런데 제 처지와 비슷한 '70세 노인문제'라는 주제에 그만 발목이 붙들리고 말았어요.

한지일은 "주변에서 '장편 극 영화도 아니니 그냥 연습삼아 해보라'는 말에 쉽게 생각한 게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고 웃었다. 그는 일주일간 꼬박 밤샘 촬영을 강행하며 젊은 배우시절 못지않은 열정을 쏟아냈다. 다행히 평소 잘 관리해온 든든한 체력이 뒷받침을 해줬다. 그는 "살아보니 행복은 인기도 돈도 아니고 오직 내 마음속에 숨어있더라"며 "귀국 후 10개월 가까이 단칸방에 칩거하며 우울증에 시달리며 또 한 번 깨우쳤다"고 했다. 그는 호텔 웨이터, 벨보이, 발레파킹맨, 여행사 가이드 등을 하며 웃음을 되찾았다.

<span class=한지일은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호텔 웨이터와 벨보이, 주차관리원을 하며 대학을 다니는 등 열정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줬다. 사진은 충무로 한 호텔 레스토랑 웨이터 당시. /더팩트 DB">한지일은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호텔 웨이터와 벨보이, 주차관리원을 하며 대학을 다니는 등 열정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줬다. 사진은 충무로 한 호텔 레스토랑 웨이터 당시. /더팩트 DB

-70~80년대에는 북한에서도 이름이 알려질 만큼 유명했다. 젊은 시절 스크린 스타로 과연 어느정도 인기였는지 궁금하다.

쟁쟁한 대선배 배우들이 일궈놓은 토양에서 덤으로 사랑을 받았을 뿐이에요. 명동이나 충무로에 나가면 영화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곤 했는데 요즘으로 치면 아이돌스타급 인기를 누렸죠. 아시다시피 70년대는 남북 체제의 냉전이 고조됐을 때잖아요. 당시엔 자고나면 지붕이나 마당에 북한이 뿌린 '삐라'(체제선전용 전단지)가 많았어요. 여기에 대응하는 대북 삐라도 비밀리에 제작된 걸로 아는데 제가 주인공을 맡았으니까요. 북한 주민들이 저를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70년대 후반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 선배님이 납북되면서 북한 내 한국 배우들에 대한 관심은 컸던 것같아요.

한지일은 78년 영화 '경찰관'으로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배우로 입지를 굳혔다. 89년에는 강수연 유인촌 전무송 최종원 등과 호흡한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받는다. 이로써 전무송 김희라 김무생 나기수 신성일 이대근 등 80년대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받은 쟁쟁한 스타 배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당시 북한주민과 인민군 귀순을 종용하는 '삐라'의 모델로 여배우 김민정 등과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한지일은 78년 영화 '경찰관'으로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배우로 입지를 굳혔다. 올해 그는 한국영화 100년을 기념하는 '100인 감독 100초 단편영화'에 엑스트라로 참여한 뒤 중편영화 '미희'의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한지일 제공, 더팩트 DB

-80년대 후반까지 영화계 촉망받는 남자배우로 활약했는데 90년대 들어 돌연 비디오제작자로 변신하게 된 계기가 있나?

그동안 누구한테도 털어놓은 적 없는 저만의 아픔이 있었어요. 제가 정치인도 아닌데 사찰을 받고 정보당국의 감시를 받았다고 하면 믿을까요? 아마 말도 안된다며 웃을 지도 모르지만 사실이에요.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2남 홍업(김홍업)이와 대학시절부터 절친이었고, 그게 훗날 배우활동에 걸림돌이 될 줄은 몰랐죠. 알고 보면 제가 연예계 원조 블랙리스트였던 셈이에요. 배우는 작품 출연이 없으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예요. 할 일이 없어 저도 가족이 있는 미국에 건너갔고, 그곳에 한동안 머물다 돌아와보니 현실은 더 힘들어졌어요. 마침 비디오 시대가 열리기도 했고요.

한지일(신문방송)과 김홍업(경영)은 경희대 동문이다. 학과는 달라도 둘은 엄청 친한 베프였다. 대학시절 서울 아현동 아파트에 살던 김홍업이 방에서 숙식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 때문에 그는 DJ의 미국 망명과 정치재개 무렵 친구의 아버지를 돕는 순수한 마음으로 DJ의 보라매 공원 대규모 정치집회 단상에도 올랐다. 정치활동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유명 배우로 얼굴이 알려진 그의 행보는 상대쪽 또는 반대 편에 선 사람들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배우를 접고 제작자로 나서게 된 첫번째 이유였다.

한지일은 미국에서 파트잡을 전전하며 힘든 와중에도 꾸준히 교민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쉬지 않았고, 일본에서 추방된 뒤 구속된 가수 계은숙 구명활동을 하기도 했다. 사진 위는 70년대 후반 여배우와 함께 대북 '삐라'(전단지)에 실렸던 당시. /한지일 제공

-90년대는 에로비디오가 전성기를 누렸고, 비디오제작사들이 난립한 가운데서도 한시네마타운은 업계의 선두주자였다. 실패한 결정적 이유가 뭔가?

에로비디오 영화는 당시 시대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B급 장르로 분류돼 늘 혹평에 가까운 냉대를 받으면서도 수요가 있었으니까요. 1980년대 말에 처음 등장해 IMF 구제 금융 이후에도 한동안 호황을 누렸지만 인터넷이 급속히 확산된 2000년대 들어서면서 사실상 소멸됐고요. 케이블TV, 위성방송, IPTV 등 다양한 플랫폼이 등장한 뒤 동네마다 몇개씩 있던 비디오가게가 지금은 다 사라졌잖아요. 순수 콘텐츠만으로만 봐도 작품성보다는 섹스와 에로틱한 장면노출 등에 치중한 성인용이란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고요.

그가 처음부터 에로영화만 찍었던 건 아니다. 제작자 겸 배우로, 배우 최란과 찍은 영화 '엄마 울지마'는 뭉클한 가족 드라마였다. 훗날 할리우드 배우로 성장한 김윤진이 주인공을 맡은 '윈디시티'는 액션영화였다. 하지만 이들 작품은 모두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고, 영화사를 운영하기도 벅찼다. 결국 '매춘녀의 첫사랑'을 시작으로 '젖소부인 바람났네' 시리즈와 '마가씨' '욕탕속의 여자들' 같은 에로영화가 비디오 시대의 새로운 틈새 수요를 빠르게 채웠다. 한시네마타운은 유호프로덕션 등 몇몇 경쟁사들과 함께 90년대 에로비디오 전성시대를 열었다.

-비디오 제작사업 실패후 해외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다. 10년 넘게 종적을 감췄는데 굳이 한국을 떠나야할 이유라도 있었나?

사업이란 게 한번 망하면 인간관계마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잖아요. 돈만 잃는 게 아니더라고요. 번창할 때는 몰랐던 일들까지 불거지면서 정말 힘들었어요. 소송에 휘말리고, 주변사람들, 특히 사랑하는 가족과도 헤어지는 상황이 되고보니 버틸 힘이 없었어요. 강원도 오지에서 막노동을 하고, 탱크로리 주유원과 택시기사 등을 전전하며 스스로 고립된 생활을 해봤지만 '발가벗는 영화 찍는 사람'이란 부정적 시선은 늘 따라다녔어요. 극단적 선택도 몇 번 결심하다 '이럴 바엔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해외에서 살아보자'는 오기가 생겼죠.

무작정 베트남행 비행기를 탔다. 당시까지 우울증과 강박증에 시달린 그는 해외로 나간 뒤 무엇보다 마음이 홀가분했다. 성격상 워낙 붙임성이 좋아 한국관광객 가이드 겸 현지 특산물 판매로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돈이 좀 벌리자 실크와 라텍스 사업을 벌이다 다시 빈손이 됐다. 베트남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건너가 10년간 블라인드 청소, 화장품 영업사원, 뷰티 흑인용품 세일즈맨, 리커 스토어, 양품점, 중고자동차 세일즈맨, 대형마켓 박스보이, 호도과자 점원, 셔틀운전기사, 농수산 특산물 장돌뱅이 등 27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한지일은 한때 한소룡이란 예명으로 활동했으며, 당대 최고 스타배우 김(지)미 신성(일)의 이름 한글자씩을 떼어 '한지일'로 개명했다. 작은 사진은 영화 '길소뜸'에 출연했을 당시 임권택 감독, 김지미. /한지일 제공, 더팩트 DB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호텔 웨이터와 벨보이, 주차관리원을 하며 대학을 다니는 등 열정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줬다.

사실 한국에는 잠깐 다녀갈 생각이었어요. 어차피 혼자 몸인데다 10년 넘게 미국 생활을 하면서 어느정도 적응이 됐거든요. 일용직을 전전하다보니 경제적 어려움은 늘 따라다녔지만, 교민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며 나름 보람을 찾았어요. 2년 전 서울에 잠깐 다니러 왔다가 지인들의 적극적 만류로 미국행을 포기했어요. 강 기자님도 그 중 한분이잖아요. 강 기자님이 여기저기 추천해 방송에도 많이 출연했고요. 오랫동안 잊혀진 저를 이렇게 많은 분들이 위로하고 격려해주실 줄은 몰랐죠. 건강이 허락하는 한 무슨 일을 하든 열심히 사는 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한지일은 오랜 기간 자신의 존재감을 잊고 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서야 긴 터널을 지나 밝은 세상에 뛰쳐 나온 그런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베트남, 미국생활 15년간 케빈정이란 이름으로 살았다. 귀국후 한동안 외부와 접촉을 끊고 지내다 호텔 레스토랑 웨이터, 벨보이, 발릿파킹맨을 거쳐 여행가이드(여행자 인솔)등을 바쁘게 거쳤다. 올해는 한국영화 100년을 기념하는 '100인 감독 100초 단편영화'에 엑스트라로 참여한 뒤 부산영화인협회가 제작한 '미희'에 출연하면서 긴 세월 잊고 지내던 이름 '배우 한지일'로 돌아왔다.

귀국 후 다양한 봉사활동을 해온 한지일은 지난 12월13일 ㈔한국신지식인협회가 주관한 제34회 신지식인인증 최고상인 '사회봉사인증상을 수상했다. /한국신지식인협회 제공

한지일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소중한 자산이 있다. 데뷔 이후 50년 넘게 한결같이 해온 이웃사랑 봉사다. 스타배우로 지낼 때는 물론 IMF사태로 빈털터리가 됐을 때도 멈춘 적이 없다. 심지어 미국에서 온갖 힘든 파트타임을 하면서도 놓지 않았고, 귀국 후에 그 끈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그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지난 2년 사이 원로배우 최은희 신성일의 사망, 윤정희의 알츠하이머 투병 소식이다. 고 신성일의 빈소에서는 수많은 조문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성통곡할 만큼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을 유독 아끼고 이끌어줬던 선배 배우들의 빈자리가 유달리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지일은 고희가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10대 소년 같은 열정과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배우다. 그는 "늦은 나이에 주책 같지만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산전수전 다 겪고 보니 이제는 어떤 역할이라도 소화해낼 자신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가 20여년 만에 카메라 앞에 다시 섰다는 소식이 알려진 직후 수많은 작품 출연제의가 쏟아졌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소망은 한지일이란 '배우의 추억'을 다시 한번 되새김질 할 기회를 갖는 일이다. 알고보면 올해 이미 절반의 꿈을 이룬 셈이지만, 2020년 새해엔 시니어모델로 활동할 야심찬 각오를 다지고 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늘 송구스러운 일이지만 그냥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의 얼굴은 어떤 반짝이는 별보다 아름답고 행복해 보였다.

eel@tf.co.kr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인기기사
실시간 TOP10
정치
경제
사회
연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