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는 우리땅'을 부른 정광태는 대중 가수의 영역을 넘어 전 세계인들을 상대로 '울릉도 독도 홍보대사'를 자임하며 당당히 독도지킴이를 자처하고 있다. /김세정 기자 |
'독도가수'란 이유로 일본 입국 거부, "제2의 안중근 될 뻔했다"
[더팩트|강일홍 기자] 가수 정광태(64)는 '극일 연예인'의 상징성을 가진 인물이다. 그가 입고 다니는 옷에는 늘 태극기가 붙어 있다. 국민 히트곡 '독도는 우리땅'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에게 일본과의 악연은 길고도 질기다. 정광태는 1982년 '독도는 우리 땅'을 발표하면서 독도와 인연을 맺지만 동시에 일본의 표적이 됐다.
그는 90년대 중반 독도 관련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하기 위해 일본대사관에 비자 신청을 하러 갔다가 결격 사유 통보를 받는다. '독도' 노래를 부른 가수라는 이유였다. 그는 대사관 측에 항의하는 퍼포먼스로 '죽을 때까지 일본에는 안 간다'는 선언을 하며 돌려받은 서류를 그 자리에서 북북 찢어버린다.
그의 소신있는 행동은 '독도=한국땅'이라는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는 나라에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발산이었다. 이런 악연은 이후 25년째 일본과 척을 지게 했지만, 대중 가수의 영역을 넘어 전 세계인들을 상대로 '울릉도 독도 홍보대사'를 자임하며 독도사랑과 독도지킴이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있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따라 200리 외로운 섬하나 새들의 고향/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땅/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동경 132 북위 37/ 평균기온 12도 강수량은 1300 독도는 우리땅~'. 그가 부른 노래는 맑고 청량하다.뚜렷한 의미를 부여해 빛과 희망이 깃들어 있다. '독도는 우리땅'을 통해 힘차고 진취적인 기상을, '도요새의 비밀'에서는 숲과 푸른 창공을 나는 새를 노래했다.
그는 한일 관계가 엇나갈 때마다 심하게 속앓이를 하는 '애국심 충만' 열혈 국민 중 한 사람이다. 올해는 일본의 수출규제 등 경제보복조치로 촉발돼 반일감정이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독도의 상징' 정광태를 만나 속내를 직접 들어봤다. 필자는 10여년 전 그의 '울릉도 독도 역사탐방' 프로그램에 동행한 적이 있다. 스페셜인터뷰는 서울 상암동 한국연예제작자협회 사무실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하와이는 미국땅 대마도는 몰라도 독도는 우리땅'. '독도 상징 가수' 정광태는 말 그대로 열혈맨이다. 스페셜인터뷰는 서울 상암동 한국연예제작자협회 사무실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김세정 기자 |
-인터뷰 약속을 하고도 일정을 맞추느라 미팅하는데 일주일 가량 공백이 생겼다. 그 사이 독도 근해에서 헬기추락이라는 불행한 사고가 났다.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할 일이 벌어졌어요. 평소에도 저는 독도에서 무슨 사고가 나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수시로 울릉도와 독도를 오가다보니 꼭 제 일처럼 걱정되고 조마조마 해요. 독도가 언급되는 건 보통 일본과 무슨 이슈가 발생했을 때가 많거든요. 언론에 일본 순시선이 독도 근해에 등장했다는 얘기만 나와도 긴장이 되는데 요즘엔 중국 어선들까지 울릉도를 피양처로 삼는다고 해요. 누구보다 울릉도와 독도를 사랑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유가족들의 아픔을 가슴 깊이 나누고 싶습니다.
정광태는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를 부른 뒤 유명해졌지만, 가수의 신분을 넘어 독도 사랑의 상징적 인물이다. 82년 이 노래를 처음 부른 이후 37년간 100여차례 독도를 방문했다. 가수 데뷔 다음해인 83년 울릉도 명예군수로 위촉돼 활동했고, 현재는 '울릉도 독도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그는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30주년이던 83년 7월25일 故 홍순칠 대장으로부터 울릉도에 처음 초대받았다. 이후에도 독도 최초 주민 故 최종덕옹과 독도 이장을 지낸 故 김성도옹 등과도 교류한 독도의 산 증인이다.
-일본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면서도 사안마다 감정적 골이 깊다. 개인적으로 일본과 척을 지고 살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육두문자가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일본대사관에서 비자 발급 자체를 거부했어요. 독도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거였어요. '독도는 우리땅'이 82년에 발표된 이후 국민가요로 불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표적이 됐던 거죠. '우리 땅을 우리 꺼'라고 한게 잘못이냐고 따졌는데 그렇게 옥신각신하다 그만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제가 아무리 고성을 지르고 난리를 쳐도 청원경찰조차 대응을 하지 않더라고요. 아마도 '제2의 안중근'을 만들고 싶지 않았겠죠. 그때 상황은 누군가 나를 말리거나 건드렸으면 분신이라도 했을 분위기였어요.
정광태는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일본에 가본 일이 없다. 일본이 입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역시 "일본은 절대 가고 싶지 않은 나라"로 규정짓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런 악연은 역시 독도 사랑 때문이다. 정광태는 1996년 독도 관련 TV프로그램 제작(SBS 추석특집)에 참여하기 위해 비자 신청을 하러 갔다가 결격 사유 통보를 받는다. '독도' 노래를 부른 가수라는 이유였다. 그는 대사관 측에 항의하는 퍼포먼스로 서류를 돌려받아 '죽을 때까지 일본에는 안 간다'는 선언과 함께 그 자리에서 북북 찢어버렸다.
정광태는 '독도' 노래를 부른 가수라는 이유로 비자발급 결격 사유 통보를 받았다. 정광태가 독도에서 팔을 불끈 쥐고 있다. 왼쪽 작은 사진은 10여년전 그의 '울릉도 독도 역사탐방' 프로그램에 동행한 필자. /정광태 제공 |
-'가수 정광태' 하면 역시 연상되는 노래가 바로 '독도는 우리땅' 아닌가. 이 곡의 탄생 비화가 있다고 들었다.
KBS 개그프로그램이던 '유머1번지'에 출연하고 있을 때였어요. 당시 '웃기는 노래와 웃기지 않는 노래'라는 코너가 있었는데 KBS 라디오국의 박문영 PD가 작사 작곡한 '독도는 우리땅'을 부르게 됐어요. 마침 그 무렵 일본 교과서 왜곡 사건이 터졌고, TV를 본 음반제작자가 무릎을 탁 쳤다고 해요. 틀림없이 터질 노래라고 판단한거죠. 여의도에서 만나기로 한 그분이 좀 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방송에서 포졸복을 입고 함께 노래를 불렀던 임하룡 장두석 김정식은 다른 바쁜 스케줄이 있다며 가버려 저 혼자 녹음을 하게 된거죠.
정광태가 개그맨을 그만 두고 가수로 활동한 계기도 바로 이 노래 덕분이다. 음반을 취입한 뒤 처음 출연한 프로그램은 '젊음의 행진'이었다. 1980년부터 94년까지 KBS에서 방영된 당시 젊은층 대상 최고 인기 음악프로그램이었다. 소방차가 가수 데뷔 전 백댄서로 출연하고 그는 PD의 요구에 따라 갑옷과 장검을 찬 이순신 장군 모습으로 노래했다. 방송 직후 전국은 '독도' 열풍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중고등학교와 군부대, 노인정까지 '독도는 우리땅'이 회자되면서 난리가 났다"고 말했다. 그해 그는 KBS 신인가수상을 수상했다.
-엄연히 '독도는 우리땅'의 주인공임에도 가수로는 낯설게 느껴진다. 더구나 개그맨으로 방송에 입문했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네, 그럴 때는 좀 뻘쭘해질 때가 있죠. 한때는 저도 가수로 최고 인기를 누린 적이 있지만 요즘엔 가끔 방송에 출연해도 가수보다는 예능인 패널로 비치니까요. 그래서 저를 잘 모르는 분들은 대개 사회운동가 정도로 생각하더라고요. 하긴 그동안 부른 노래도 대부분 건전 노래이다보니, 특별한 사회적 이슈나 계기가 없으면 방송에도 잘 소개가 되지 않았죠. 한때 금지곡이 되기도 했어요. 한일 문제가 외교적으로 엉키면 방송사들이 알아서 노래를 틀지 않았거든요. 물론 자연스럽게 저도 방송출연 대상에서 배제됐고요.
정광태는 74년부터 연극 뮤지컬 무대에서 활동하다 81년 KBS 음악프로그램 '젊음의 행진'에 발탁된 뒤 KBS 특채 개그맨으로 정식 데뷔했다. 임성훈 고영수 전유성 김병조 송영길 허원 최미나 등이 당시 그와 함께 활동하던 주인공들이다. 그는 기타를 치며 코믹 대사를 엮는 스탠딩개그로 인기를 누렸다. '제 애인의 이름은 한심이었습니다~'로 시작하는 '한심이 토크송'의 원조다. 그가 선보인 '토크송'은 훗날 정재환 유성찬 등 후배들이 맥을 이었다.
왼쪽 사진 위부터, 80년대 중반 독도 최초주민 고 최종덕옹과 아들 딸(1), 정광태가 84년3월 독도를 방문해 만난 어부와 해녀들(2), 지난해 가수협회 이자연 회장 및 회원들 독도방문 당시(3). 오른쪽 큰 사진은 독도 이장 고 김성도옹과 생전 독도선착장에서 포즈. /독도사랑회 제공 |
-실제로 사회운동 또는 봉사활동을 많이 하지 않나? 얼마전 '독도의 날'이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특별한 의미가 담긴 날인가?
그렇게 비친다면 저야 영광이죠. 나름 제 개인의 이익이나 안위보다는 상징적이나마 '극일'의 표상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독도의 날'은 10월 25일입니다. 이날은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명시하는 칙령(41호)을 발표한 날(1900년 10월25일)이기도 합니다. 민간단체인 독도수호대가 2000년에 처음 제정했는데 아직은 공식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지는 못했어요. 그동안 여러차례 국회청원과 서명운동을 전개했고, 언젠가는 그 의미가 빛을 발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정광태는 ㈔영토지킴이 독도사랑회의 독도홍보관 명예관장을 맡아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회원들과 틈나는 대로 임진각을 지키는 백마부대원들을 찾아 점심을 함께 하거나 강연 및 노래 등 재능기부를 한다. 매주 토요일엔 다문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지역중고생들과 함께 한글을 가르치고 독도역사를 알리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그는 "일본은 경제력을 앞세워 지도의 위치를 바꾸거나 왜곡하는 만행을 스스럼없이 하는 국가"라면서 "우리 국민 모두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당당히 맞서야한다"고 말했다.
-올해는 위안부와 독도 등의 민감한 문제로 유독 한일 갈등이 심화된 한해가 됐다. 국민적 감정의 골도 깊어졌다. 바라보는 심정이 더 남다를 것같다.
일본만 생각하면 항상 가슴이 답답합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사안마다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반감을 갖자는건 아닙니다. 국가나 국민의 입장에서보면 '반일'이 아니라 '극일'이 옳다고 믿어요. 우리의 잘못도 있습니다. 일제의 잔재를 깔끔히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일본은 틀림없는 가해자예요. 역사를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가해자가 진정으로 용서를 받으려면 사과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일본은 끝내 사과하지 않고 얼렁뚱땅 넘어가려하고, 적반하장으로 남의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우깁니다. 미칠 노릇이죠.
정광태는 인터뷰하는 동안 '일본'과 '독도' 얘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이 일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독도는 우리 5000만 국민 모두의 자존심"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국내 정치권에도 화살을 돌렸다. 그는 "위로는 중국과 아래로는 일본, 우리는 늘 위태로운 외세불안을 겪으며 살아온 민족"이라면서 "여야를 떠나 정치인들의 먼저 서로 보듬고 화합하고 단합된 모습을 보여줘야하는데 당리에만 눈먼 그들의 이전투구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쓴소리를 했다.
가수 김흥국과 함께 취입한 '독도로 날아간 호랑나비'를 녹음할 당시. 이 음반은 2005년 4월 믹싱작업을 끝내고 5월에 발매됐다. 왼쪽 뒤부터 시계방향으로 김흥국 채연 황영조 장윤정 김동완 이정. /정광태 제공 |
-오랜 '돌싱'으로 살면서 '자유로운 영혼'을 고집하고 있지 않나. 부르는 노래조차도 기존 가수들과는 뭔가 다르다.
참, 비밀이 없군요. 강 기자님한테까지 눈가리고 아웅할 수는 없죠. 맞습니다, 저는 20여년째 '돌싱'이고 독도지킴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만족하며 살고 있어요. 자식들도 모두 미국에 있으니, 걸림돌도 없고요. 그리고 제가 부르는 노래는 저만의 분명한 색깔이 있어요. 대중 가수는 이별과 사랑 등 유행가를 불러야 히트하고 돈도 벌고 하잖아요. 저는 예나 지금이나 좋아하는 노래를 맘껏 부를 수 있는 것만으로 족해요. 한 우물을 판 덕분에 다른 가수들이 못하는 다양한 강의를 많이 하잖아요. 사실 제 스타일을 좋아하시는 분들도 은근 많아요.
정광태의 인생곡 '독도는 우리땅'은 애국심과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국민가요가 됐다. '독도는 우리땅' 외에도 '도요새의 비밀' '짜라빠빠' '힘내라 힘' '코끼리 아저씨' 등의 노래를 불렀다. 주로 군인들이나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신나고 힘찬 노래다. 이중 '도요새의 비밀'(박문영 작사 작곡)은 좋은 노랫말로도 화제가 된 곡이다. 84년 TV 가사대상 동상을 받았고, 당시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평가받았다.
정광태는 82년 '독도는 우리땅'을 발표한 이후 37년째 독불장군처럼 나홀로 활동을 해왔다. 왼쪽 위 작은 사진은 그가 '독도는 우리땅'을 발표한 이듬해인 83년 독도를 처음 방문했을 당시의 모습. /독도사랑회 제공 |
그는 '독립군 가수'(매니저 없는 가수)다. 82년 '독도는 우리땅'을 발표한 이후 37년째 독불장군처럼 나홀로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아마도 제가 매니저를 두고 활동했다면 대중적 위상이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 "지금의 이미지가 훨씬 더 소중하다"고 말했다.
'오징어 꼴뚜기 대구 명태 거북이 연어알 물새알 해녀 대합실/ 17만 평방미터 우물하나 분화구 독도는 우리땅/ 지증왕 십삼년 섬나라 우산국 세종실록 지리지 50페이지 셋째줄/ 하와이는 미국땅 대마도는 몰라도 독도는 우리땅~'
정광태는 틈틈이 청소년들과 함께 울릉도·독도 역사탐방에 나선다. '독도는 우리땅'엔 대한민국 지리와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고, 마치 자연사 박물관처럼 부르기만 해도 산 역사다. 그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독도의 자존심이고, 국민의 가슴 한편에도 영원한 애창곡으로 남아 있다.
인기는 거품이고 언젠가는 사라진다. 정광태는 '반짝 인기'보다는 '독도지킴이'라는 의미있는 일에 나서면서 더 뚜렷한 대중적 인지도를 만들었다. '죽을 때까지 일본 안 간다'는 그의 의지는 곧 극일(克日)의 상징이다. 그는 '독도는 우리땅'을 부르며 역사와 대중성까지 특별한 의미를 아로새긴 가수다. 울릉도나 독도에 정광태 노래비가 없다는 사실은 단지 필자만의 아쉬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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