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활동은 기회의 유불리가 아니라 개인의 성향 또는 가치관의 차이." 김병찬은 아나운서 프리선언과 관련해 "일시적 환경 변화일 수는 있어도 인위적으로 장기간 불이익을 받는 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김세정 기자 |
아내와 이혼조정신청 단계서 갈등 봉합, "재혼했느냐는 질문 대략난감"
[더팩트|강일홍 기자] 방송인 김병찬(56)은 '아나테이너'(아나운서+엔터테이너)의 원조다. 1990년 KBS 아나운서로 입사한 그는 '연예가 중계' '행복채널' '도전 주부가요스타' '사랑의 리퀘스트' 등을 진행하다 2006년 프리랜서의 길을 택했다.
뉴스와 교양 정보프로그램은 신뢰가 바탕이지만, '재미'와 '주목도' 측면에서 보면 예능요소를 피할 수 없다. 김병찬은 8년간 '연예가 중계'를 진행하면서 이를 체감했다. 타고난 순발력과 입담을 자랑하며 특화된 입지를 다졌다. 그는 "새로운 방송환경에 걸맞는 차별화된 역할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누구보다 빠르게 달라져가는 방송 트렌드의 변화를 감지했으면서도 그는 현실에 안주하거나 미적거리다 타이밍을 놓쳤다. 입사동기 손범수 정은아가 일찌감치 방송사 울타리를 벗어던질 때만해도 "누군가는 지켜야한다"는 사명감이 자신을 붙들었다고 했다. 결과로만 놓고보면 잘못된 선택이었다.
결국 해외 유학과 사업 외도 등의 공백을 거친 뒤 연착륙에 실패하는 아픔을 맛봤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국가적 규모의 큰 행사를 단골로 진행할만큼 깊이와 무게, 신뢰와 안정감을 갖춘 중량급 방송인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멀티 다채널시대 '맞춤형 방송인'으로 변신을 꿈꾸고 있는 그의 얘기를 직접 들어봤다.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26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카페에서 2시간동안 진행됐다.
-KBS 아나운서 신분이면서 한꺼번에 5개의 예능프로그램을 동시에 진행하기도 했다. 어느정도 인기였나?
아이돌의 인기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죠. 당시로는 좀 드문 케이스지만 언론이 제 사생활을 일일이 체크하고, 가십 기사를 다루곤 했으니까요. 방송 일로 누굴 만나 차를 한잔 해도 상대가 여자 연예인이면 여지없이 의심을 받곤 했어요. 아나운서보다는 대중스타로 대접을 받은 셈이죠. 이제와서 생각하면 쏟아지는 대중의 많은 관심과 사랑에 저를 성찰할 기회가 없었던게 가장 아쉬워요. 어느 분야에서든 마찬가지겠지만 정상에 섰을 때 스스로 자신을 절제하고 이미지를 관리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새삼 실감하죠.
김병찬은 아침 생방송 정보프로그램이나 스포츠 중계석 외에도 '연예가중계' '열전, 달리는 일요일' '지구촌영상음악' 같은 예능프로그램을 주로 진행했다. 매주 5~6개의 방송에 고정출연하고, 비공식적으로 기업체나 지자체 행사 MC도 자주 맡았다. 또 공영방송 간판 아나운서로 공적 인지도와 신뢰도가 쌓이면서 큰 규모의 국가적 행사는 그가 단골로 진행했다. 당시 KBS 안국정 본부장이 여의도에 거처를 마련해주고 프로그램에 전념하게 했을 정도로 방송사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국내 첫 아나테이너라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위상에 걸맞게 효과적으로 연착륙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아쉬움이 많을 것같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양다리를 걸친 대가라고 생각해요. 양손에 떡을 들고 둘다 놓치기 싫었던 안일함 때문입니다. 잘 나갈 땐 이성적 판단을 못할 때가 더 많은 법이죠. KBS라는 울타리가 지켜주는 '신분안정'과 프리랜서가 누릴 수 있는 '행사 혜택'(돈)을 모두 누렸으니까요. 행사를 한건 진행하면 한달 월급보다 많았어요. 이는 여러 프로그램을 동시에 진행하며 인지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한 결과인데 내부에서도 프로그램 기여도를 감안해 이런 외부 행사를 적당히 묵인해줬고요.
김병찬은 한때 가장 연예인같은 아나운서로 인식됐다. 그가 프리랜서 변신을 처음 고민한 것은 90년대 중반 아나테이너로 승승장구하던 무렵이다. 아나운서 입사 동기들 중 누구보다 예능적 기질(엔터테이너형)과 이미지로 앞서 갔지만 알을 깨고 나가지 못했다. 그는 "아나운서 입사 전 개그맨을 꿈꿨을 정도로 예능에 관심이 많았는데도 이를 먼저 실행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면서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한쪽은 포기하는게 세상의 이치인데 공교롭게도 당시 분위기가 저에게 위태로운 줄타기를 강요했다"고 말했다.
방송인 김병찬은 평소 부드럽고 편안한 미소, 포근한 이미지가 트레이드 마크다. 하지만 마이크를 잡으면 가장 연예인 같은 예능적 끼를 발산하는 MC로 정평이 나 있다. /김세정 기자 |
-프리선언 후에도 만회하고 거듭날 기회가 여러차례 있었다고 들었다. 실력만 있다면 언젠가는 빛을 보게 돼 있지 않나.
한번의 잘못된 판단이 실수였더라도 그 이후 여러번 기회를 놓친 점에서보면 할 말이 없죠. 영국유학 다녀온 직후와 종편개국 무렵은 절호의 거듭날 기회였어요.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공교롭게도 계속 일이 꼬였고요. 99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니 그 사이에 방송환경이 크게 바뀌었더라고요. 불과 3년전 제 프로그램에서 리포터 하던 유재석 박미선 서경석 같은 친구들이 새로운 스타일의 예능프로그램 메인 MC에 기용돼 있어 달라진 환경변화를 실감했죠. 종편개국 당시에는 부동산 사업에 깊이 관여돼 있어 선뜻 나서지 못했고요. 기회는 자주 오는게 아니고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했죠.
김병찬은 98년 결혼한 뒤 이듬해 영국(웨스트민스터)으로 유학을 떠난다. 복귀한 뒤에도 5년간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 결국 2006년 지방 순회근무 방침에 떠밀리듯 뒤늦게 프리선언을 하고 나왔지만 그는 도약의 기회를 번번이 놓쳤다. 프리선언한 전 아나운서를 일정기간 자사 프로그램을 배제하는 방송사 관행이 아니라도 그는 철저히 KBS에 미운털이 박혔다. 결국 청죽고속버스터미널 현대화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중이던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사업가로 변신했다. 종편채널 개국을 앞두고 수차례 복귀 제의를 받았지만 사업을 이유로 주춤하다 또 한번의 기회를 놓쳤다.
-잘나가던 시절 이금희 아나운서와 염문설에 휩싸였다. 요즘도 종종 그런 얘기를 듣는다고 하는데 진실이 뭔가?
사실과 완전히 다른 왜곡된 풍문입니다. 이제와서 얘기를 꺼내는 일 조차 당사자들한테는 민망한 일이에요. 저는 98년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는데 '이금희를 배신하고 부잣집 딸과 결혼했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이금희 씨는 제가 아닌 다른 선배와 잠깐 만난 적은 있어요. 같은 아나운서 선후배 사이라서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낀 적이 있어요. 이금희 씨도 훗날 자서전에서 그 선배의 존재를 언급한 적이 있고요. 소문이란게 원래 그렇지만 해명을 하지 않고 무시하니 자꾸 증폭이 되더군요.
김병찬은 마이크를 잡으면 단 1초도 용납하지 않을만큼 정교한 진행자로 변신한다. 사진은 김병찬이 지난 2016년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E1 Cheer up 오카 패밀리 콘서트에서 전 피겨스케이트 선수 김연아(왼쪽)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남용희 기자 |
-그런데 나중엔 아내와의 불화설도 있지 않았나. 요즘에도 가끔 주부들 모임에서 마이크를 잡으면 '재혼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들었다.
좀 껄끄러운 질문이네요. 하지만 다 지나간 일이고 감춘다고 덮어지는 것도 아니니 솔직하게 말씀 드리죠. 아내와는 결혼 후 한때 사이가 안좋았어요. 물론 지금은 절대 아닙니다. 신혼 때 제가 영국 유학 중이었는데 아내는 갓난 아이들 때문에 한국에 자주 머물렀어요. 그 무렵에도 별문제가 없었는데 후에 사소한 의견 충돌로 갈등이 생겼고 심각해지면서 이혼조정신청까지 갔었죠. 다행히 숙려기간 안에 오해를 풀고 봉합이 됐지만, 내막을 모르시는 분들은 지금도 이혼한 걸로 알고 있더라고요.
김병찬은 사업가 집안의 아내 김가영 씨와 결혼해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결혼 10년만인 2008년 파경설이 돌았다. 당시 월간지에 '법정다툼' 기사가 실리면서 이혼은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이에 대해 김병찬은 "숙려기간 중에 이혼으로 기사가 나고보니 저도 그렇고 아내 역시 '결별이 전부는 아니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면서 "그 당시엔 중대한 사생활 침해라며 해당 기자에게 항의도 하고 서운해 했는데 결과적으로보면 그게 다시 단란한 가족으로 거듭나는 동기가 되지 않았다 싶다"고 말했다.
-아나운서들 사이에선 선후배인 김동건 전현무의 장점을 반반씩 닮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이유로 그런 말을 듣는다고 생각하나?
제가 50대 중반을 넘어섰는데 김동건 아나운서는 딱 제 나이만큼 '방송 외길'을 걸어온 대선배님이시죠. 겉으론 통 크고 대범해보여도 실제로는 매우 섬세하고 순수해요. 방송에 대한 철학도 확고해서 절대 한눈을 팔지 않으셨고요. 사익추구나 정치 등 많은 외부 유혹에도 '송충이는 솔잎만 먹어야한다'며 거절했다고 들었어요. 평소 존경하는 선배님과 비교된다는 것만으로 영광이죠. 전현무는 제가 프리랜서 선언 직전 아나운서국 교육부장을 맡으면서 선발한 후배들(오정현 최송현 등이 동기) 중 한명이었어요. 처음부터 끼가 남달랐는데 달라진 방송환경에 가장 적합한 스타일 때문에 더 도드라보였을지도 모르죠.
그는 누구보다 아나운서로서의 자부심이 컸고, 그 점에서보면 김동건을 닮았다. 반면 아나테이너라는 측면에서보면 그는 전현무와 확실히 비슷하다. 배우나 개그맨은 뉴스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없어도 아나운서는 예능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게 평소 그의 소신이다. KBS는 96년부터 예능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김병찬 정은아 손범수 등 일부 아나운서를 예능국에 배치했다. 손범수 정은아가 이듬해 프리선언한 직후 김동건 아나운서는 "누군가는 KBS를 지켜야한다"고 김병찬을 설득했다고 한다. 그는 "대선배님의 말씀을 금과옥조처럼 믿고 따랐지만 시기가 좀 늦춰졌을 뿐 결국엔 방송 트렌드나 시대의 흐름을 역행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김병찬은 프리선언 후 방송 연착륙에 실패한 뒤 부동산 개발사업에 뛰어들면서 방송 공백을 가졌다. 결혼 10년만인 2008년 파경설이 돌기도 했다. /김세정 기자 |
김병찬은 "대중의 많은 관심과 사랑에 저를 성찰할 기회가 없었던게 가장 아쉽다"고 말했다.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26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로얄라운지에서 2시간동안 진행됐다. /김세정 기자 |
-자신을 포함해 많은 아나운서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프리를 선언하고 독자활동을 하고 있다. 혹시 불이익을 받는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나?
최선규 이계진 손범수 정은아 신영일 강수정, 그리고 저와 그 이후 많은 후배들까지 같은 길을 걸었지만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평가는 한번도 없었어요. 일이 없어 전업하거나 적어도 밥을 굶는 일은 생기지 않았어요. MBC 김성주 아나운서가 프리선언후 힘들었을 때 '일정 부분은 감수해야한다'고 제가 조언한 적이 있는데 일시적 환경 변화일 수는 있어도 인위적으로 장기간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었어요. 물이 아래서 위로 역류할 수는 없잖아요. 위상이 바뀌었다면 개인의 문제이지 외적 요인과는 무관하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김병찬은 "방송인으로서 프리랜서 개념은 기회의 유불리가 아니라 개인의 성향이나 가치관의 차이"라면서 "이는 조직을 떠나 자유롭게 일에 전념하겠다는 뜻이고, 일시적 방송환경에 따라 변수가 생길 수는 있어도 기회가 완전히 사라지거나 배제되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프리를 선언하면 완벽하게 프로 방송인이 돼야한다"면서 "차려준 밥상을 앉아서 받아먹는게 아니라 직접 뛰어나가 밥상을 차려야하고, 필요하다면 어떤 반찬을 만들지 재료까지 선택할 정도가 돼야 새로운 환경을 헤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요즘에도 굵직한 행사는 단골로 사회를 맡는다. 그동안 TV에서는 뜸했는데 향후 활동 방향 또는 계획이 궁금하다.
부동산관련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지만 이젠 조금 여유가 생겼어요. 방송활동을 병행하려고 해요. 방송을 쉬는 동안에도 행사 MC는 꾸준히 했지만 여력이 없어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우선 최근에 '전국 TOP10 가요쇼'(전국 9개 민영방송 공동제작) MC를 시작했어요. 다 내려놓고 초심으로 돌아가고보니 정말 방송에 대한 열정이 다시 솟는 느낌을 받아요. 기왕에 새롭게 출발하는 마당인데 욕심 내지 않고 한걸음씩 차근차근 걸어갈 생각이에요.
김병찬은 10여년전 청주고속버스터미널을 인수해 현대화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백화점 등이 포함된 50층 빌딩 3개로 탈바꿈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초기 공동 대표로 출발했다가 대부분의 지분을 오랜 친분관계를 갖고 있는 유력기업에 넘긴 뒤 현재는 파트너십 형태로만 관여하고 있다. 그는 "본의 아니게 개발사업에 발을 들여놓은 뒤 방송과 소원해졌다"면서 "그동안 꾸준히 러브콜을 받아온 만큼 제 색깔을 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본래 영역을 되찾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김병찬은 "제대로 색깔을 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본래 제 방송 영역을 되찾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김병찬이 지난 2016년 제53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공서영 이태임(오른쪽)과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이덕인 기자 |
방송인 김병찬은 평소 부드럽고 편안한 미소, 포근한 이미지가 트레이드 마크다. 하지만 마이크를 잡으면 단 1초도 용납하지 않을만큼 정교한 진행자로 돌변한다. 상황과 형편에 따라 완급조절이 분명한데다 큰 행사일수록 정확하고 엄중한 멘트로 신뢰도를 높여 프로페셔널한 면모가 더욱 빛난다.
그는 방송에 복귀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교감하는 따뜻한 방송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또 "예민하고 조심스럽고 낯가림이 심할수록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 이해한다"면서 "방송인으로서 혼자이길 고집하는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역할에도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김병찬은 아나운서 시험에 3번 낙방한 경험을 갖고 있다.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최고의 스타 방송인으로 인기를 누렸고, 성공 이후 아픔도 맛봤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면 도태된다는 걸 뼈져리게 느꼈다"고 말했다. 돌고돌아 출발점에 다시 선 그의 눈빛에 거듭나려는 의지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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