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열정의 비결은 변함 없는 관객 사랑이에요." 올해 데뷔 48년째를 맞는 김영임은 공연계 안팎에 강력한 티켓파워를 자랑하는 국악 디바로 불린다. /배정한 기자 |
[더팩트|강일홍 기자] '회심곡'으로 대표되는 경기 명창 김영임(65)은 판소리를 대중적 히트 공연물로 승화시킨 '국악 디바'다. 매년 세종문화회관과 KBS홀 등 대극장 무대를 거쳐 전국 투어콘서트로 이어갈 만큼 당당히 대중 아티스트들과 경쟁한다. 그가 징과 꽹과리의 풍물 반주에 부르는 회심곡은 한(恨) 그 자체다.
부모 자식 간 사랑은 이심전심으로 와닿는다고 한다. '우리 부모 날 비실제 백일 정성이며~'로 시작되는 구성진 소리에 객석은 불효(不孝)를 뉘우칠 틈도 없이 회한과 애잔함으로 눈물을 뺀다. 필자는 수년 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서 펼치는 김영임의 효(孝) 공연을 보면서 울컥 흐느낀 적이 있다.
데뷔 48년째를 맞는 김영임은 한때 '1일 티켓랭킹 순위'에서 가왕 조용필을 따돌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순수예술로 분류돼온 국악을 대중 콘서트로 승화해 강력한 티켓파워를 이끈 비결은 뭘까. 2019년 전국투어 준비로 한창 바쁜 그를 스물 여섯번째 스페셜인터뷰이로 초대했다. 인터뷰는 지난 15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그의 자택에서 진행됐다.
효 공연 콘셉트 원동력은 바로 우리 정서의 공감대. '2019 김영임 孝 공연'은 오는 5월28일 세종문화회관 2회 공연으로 출발신호를 알린다.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15일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그의 자택 거실에서 진행됐다. /배정한 기자 |
-국악을 대중 장르로 발전시켜 전국 규모 투어콘서트로 사랑을 받은 지 25년째다. 올해도 첫 출발점이 세종문화회관 무대인가?
세종문화회관 무대는 모든 공연 아티스트들한테 상징성을 갖고 있어요. 저한테는 특별한 의미를 준 곳이기도 해요. 80년대 후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처음으로 기회를 잡은 이후 약 20여 차례 공연을 했죠. 한번도 떨리지 않은 적이 없지만, 3000명의 관객 앞에 선 첫 무대는 지금도 기억이 선해요. 지방에서 소규모로 한 두 차례 워밍업을 한 뒤 5월 세종문화회관 무대에서 올해 공연 출발신호를 알리려고 해요.
2019년은 국악인 김영임이 소리에 입문한 지 48년째가 되는 해다. 김영임은 5월 28일 세종문화회관 2회 공연을 시작으로 본격 전국 투어에 나선다. 그에게 세종문화회관 무대는 늘 특별하다. 90년대 중반까지 500명 안팎의 중 규모 공연만을 해오다 세종문화회관에 첫 발을 들여놓으면서 관현악단을 포함한 60여명의 스태프가 한꺼번에 참여하는 대규모 콘서트로 확장시킨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두세 차례 공연을 보면서 감동을 받은 기억이 있다. 올해 공연 콘셉트에는 어떤 변화가 있는지 궁금하다.
음악 녹음 작업 등 전반적으로 공연 콘텐츠를 많이 각색했어요. 효(孝)라는 기본 바탕은 살리지만 이전과는 느낌부터 크게 달라질 거예요. 드라마 부분을 빼고 굿 퍼포먼스를 되살리기로 했어요. 이런 작업을 위해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해 하반기 공연을 통으로 쉬었고요. 그동안 여러 번 결심을 했지만 관객에 호응하다 보니 쉽게 공백을 갖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만큼 올해 공연에 심혈을 기울이는 셈이죠.
'김영임 孝 공연'이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순수예술공연으로 분류돼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던 '국악'을 대중적인 히트 공연물로 승화시키면서다. 전통의 소리에 흥미 있는 외적 요소를 결합해 새로운 콘텐츠로 만들어 냈다는 점만으로 큰 의미를 두고 있을 정도다. 특히 그가 부른 회심곡은 국내 국악음반 중 가장 많이 불리고 팔릴 만큼 독보적 위상을 지키고 있다.
'김영임 孝 공연'이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순수예술공연으로 분류돼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던 '국악'을 대중적인 히트 공연물로 승화시키면서다. /아리랑보존회 |
-국내 공연계에 처음으로 효(孝) 공연 콘셉트를 도입했다, 지금은 많은 가수들이 이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어떤 의미가 있나.
사실 국악이란 장르를 혼자서 2시간짜리 무대 안에 모두 녹여낸다는 건 쉽지 않았어요. 모든 공연이 그렇듯 1회용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료 고정팬층을 유지하려면 뭔가 볼거리를 줘야하잖아요. 효(孝)는 그런 고민 끝에 탄생한 주제인데 결국 간판 이미지가 됐어요. 요즘 많은 트로트 가수들이 효(孝) 주제를 차용해 공연을 하는 건 그만큼 우리 정서에 공감대를 주기 때문이겠죠.
효(孝) 공연은 20여년 전 남편이자 원로희극인 이상해의 아이디어로 처음 선보였다. '회심곡'을 비롯해 김영임이 부르는 경기민요 곡들은 '한오백년' '창부타령' '태평가' '양산도' '뱃노래' '정선아리랑' 등 대부분이 눈물과 회한, 풍자와 웃음을 담고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이상해는 "당시 김영임 씨가 40대 중반이었는데 부모님을 모시고 온 30~40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관객은 60대 이상 어르신들이었다"면서 "효의 근본을 되새기는 이런 아이템을 도입한 뒤 공연의 폭발력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해외 무대에서도 한국 전통의 소리를 평가받지 않았나. 기억에 남는 무대가 있다면.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공연은 바로 뉴욕 카네기홀 무대예요. 국내는 당시 IMF로 뒤숭숭하던 시기였지만 개인적으로는 해외 관객들이 기립박수로 찬사를 보내준 공연이었어요. 영국 로열필하모니오케스트라 등 세계적인 교향악단과의 협연도 물론 빼놓을 수 없어요. 전통 국악이 해외에서 주목을 받는다는건 그 자체만으로 영광이니까요. 그런 관심들이 집약돼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거라고 믿어요.
김영임은 국악인 최초로 98년 뉴욕 카네기홀 단독공연을 펼쳤다. 그의 무대를 위해 당시 국악연주자와 무용단 등 30여명의 스태프가 비행기를 탔다. 국악이 외국인들에겐 다소 생소한 무대였지만 그는 전석을 매진하는 이변을 기록했다. 이후 20여년간 국내외 150개 도시에서 500회 이상 공연을 가졌고, 객석점유율 92%, 누적 관객 수 130만을 넘긴 명품 공연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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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임은 가장 잊을 수 없는 공연으로 미국 뉴욕 카네기홀 무대를 꼽았다. 김영임 효 공연은 20여년간 객석점유율 92%, 누적관객수 130만을 넘긴 명품 공연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배정한 기자 |
-이렇게 해마다 꾸준히 관객을 동원하는 비결이 궁금하다. 콘서트에서 경기소리 외에 일반 대중 가요도 부르나?
"대중성을 가진 예술공연의 목표는 딱 하나라고 생각해요. 풍자든 눈물이든 관객들한테 공감대를 엮어내 찡한 감동을 안겨줘야 해요. 반복되는 공연임에도 제 팬층이 두터운 건 짜임새 있는 기획과 대본, 탄탄한 연출력 덕분이에요. 관객은 단지 소리만을 듣기 위해 공연장을 찾는 게 아닌 거죠. 대중 가요도 가끔씩은 불러요. 대중적 인기 유행가를 김영임은 어떤 목소리로 어떻게 해석해 부르는지 궁금해 하거든요.
김영임은 공식무대로는 처음으로 KBS '빅쇼'에서 가수 이미자의 '모정'과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야'를 열창했다. 이후 관객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레퍼토리로 추가했다. 김영임은 "사실 30여년 전 대중 가요 음반을 낸 적이 있어서 가요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면서 "가장 대중적이면서 공감할 수 있을 유행가 한 두곡 정도는 볼거리 서비스 차원에서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리에 대한 열정과 집념이 강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4시간 체력한계를 넘은 완창발표회도 가진 적이 있다고 들었다.
흔히 국악 하면 남도의 가락으로 오해하시는데 사실은 경서민요가 중심이에요. 이중 대표적인 게 '경기12잡가'이고요. 제가 직접 장구 치며 12잡가를 완창하는 데 꼭 4시간 걸려요. 가사 분량만 해도 엄청난데 모두 외워서 불러야 해요. 나중엔 다리에 쥐가 나서 누군가 일으켜주지 않으면 꼼짝도 못할 정도예요.
'경기12잡가'는 적벽가·방물가·출인가·선유가·십장가·평양가·유산가·소춘향가·제비가·집장가·형장가·달거리 등이다. 열두 곡 연창(連唱), 완창에만 꼬박 4시간이 걸린다.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체력이 필요하다. 가사가 틀려도 안 된다. 국악인으로서 남다른 열정을 가진 김영임은 2005년에 완창하고 음반을 냈다. 또 그의 무대에서만 볼 수 있는 경기소리 외에도 '나나니' '가야지' '출가' 등 대중성을 표방한 다양한 창작곡을 발표했다.
김영임은 (사)아리랑보존회 이사장 직을 맡아 '김영임 엄마의 아리랑공연', MBC '아리랑대축제' 등 우리가락 아리랑을 되살리고 보존하는 일에 각별한 애정을 쏟고 있다. /더팩트 DB |
-국악인으로서 공연무대에만 서는 게 아니라 아리랑 보존회를 이끌며 우리 가락 살리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민족의 한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아리랑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에요.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10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라는 가사만으로 모든 걸 다 말해줍니다. 정선아리랑, 강원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해주아리랑 등 전국 8도 아리랑을 포함해 제가 국악인으로 활동하면서 가장 많이 부른 노래가 바로 아리랑이기도 해요.
김영임은 '아리랑 모음집'(85년)을 발표하는 등 일찌감치 우리가락에 대한 소중함을 인식, 국내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한국의 정서를 확산 전파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2013년 ㈔아리랑보존회 창단식 및 창단공연을 시작으로 직접 이사장 직을 맡아 '김영임 엄마의 아리랑공연'(2014), MBC '아리랑대축제'(2015년) 등 각별한 애정을 쏟고 있다.
-국악인의 길에 들어선 계기도 궁금하다. 학창 시절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다.
원래는 문주란, 이미자, 은방울자매 등 당시 대중 가수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다 고전무용을 배우게 됐는데 소리에 빠져 목표를 바꾼 거죠. 처음엔 부모님 반대가 심해 몰래 공부를 했어요. 당시 유명한 명창(고 이창배)을 찾아갔는데 소리를 전수 받은지 3개월 만에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죠. 그러다 펑크를 낸 선배의 대타로 TV 국악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고, 이를 계기로 창극(연기+국악)에 나갔는데 반응이 꽤 좋았어요. 당시 유명하셨던 MBC 진필호 PD(KBS 예능PD 고 진필홍씨 형), KBS 김창수 PD(가수 이미자의 남편) 등이 가능성과 실력을 인정해 작곡가 故 박춘석 씨와 음반을 낼 수 있게 연결해줬고요. 행운이 따랐죠.
김영임의 첫번째 스승은 구전 경기소리를 집대성한 명창 겸 학자 고(故) 이창배다. 이후 고 묵계월을 스승으로 모셨다. 묵계월은 75년 이은주 안비취 등과 함께 무형문화재 경기민요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이후 경기민요 3대 계보 중 고(故) 안비취 명창의 계보인 이춘희 명창이 1997년 유일하게 무형문화재로 지정됐고, 생존한 이은주 명창과 고(故) 묵계월 명창의 후임은 현재까지 맥이 끊겨있다.
"소리를 전수 받은지 3개월만에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죠." 대중가요에 관심이 많았던 김영임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리를 배워 국악인의 길을 걸었다. /배정한 기자 |
-공연계 아티스트로 활동하는데는 부군이신 코미디언 이상해와의 호흡도 중요하다. 주로 어떤 외조를 하는가.
나이 들수록 남편의 역할은 커지는 것같아요. 사실 결혼 초기엔 부부싸움도 많았고 아예 보따리를 싸서 친정으로 간 적도 있어요. 모든 기준은 어머니 중심이었고, 저 역시 가정에서나 밖에서나 남편의 뜻을 거부할 수 없었어요. 시어머니를 모시고 5남매 맏이로 동생들까지 돌봐야하는 처지가 말도 못하게 힘들었죠. 살다 보면 서로 양보하고 바뀌고 하잖아요. 오랫동안 전국 투어콘서트를 하면서 저한테는 절대적 도움을 주시죠. 과묵하지만 남편의 보이지 않는 외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죠.
김영임은 결혼 이후 이상해의 가부장적 생활방식과 스타일에 갈등이 많았다고 했다. 아내에 대한 배려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각별했고, 현재도 구순 노모를 모시고 산다. 김영임은 이 부분에 대해 "저는 다소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남편의 이런 애틋한 효심 덕분에 전국의 수많은 어버이들 앞에 떳떳이 효 공연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남편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두 자녀의 효심도 특별하다. 그는 또 "아들의 아이디어로 올해부터는 효 공연 콘셉트를 처음으로 시어머니에서 친정어머니한테 맞춰 변화를 줄 것"이라고 귀띔했다.
김영임은 제자 양성 국악당 건립과 자신이 28년간 스승으로 모셨던 고 묵계월 선생의 뒤를 잇는 일이 마지막 숙제로 남아있다고 했다. 사진은 김영임 효 공연 중 한 장면. /아리랑보존회 |
74년 회심곡 완창 앨범으로 데뷔한 김영임은 경기민요 시조 격인 고 이창배 명창과 묵계월 선생의 계보를 이었다. 94년 '김영임 소리 효 공연' 전국투어를 시작한 지 25년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과거 역사속으로 묻혀져 가는 전통 공연예술을 가무악(歌舞樂)이 어우러지는 대중적 국악뮤지컬로 재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영임의 마지막 희망사항은 국악만을 공부하고 배울 수 있는 별도의 전당을 만들어 흩어져 있는 제자들을 한 곳에서 양성할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28년간 스승으로 모셨던 고 묵계월 선생의 뒤를 잇는 일도 숙제로 남아있다. 국악계 안팎에서는 계보와 파벌 등 알력이 심화되면서 무형문화재 지정을 둘러싼 논란과 내홍이 혼재한 상황이다.
김영임은 5월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앞두고 연초부터 새로운 스태프와 호흡을 맞추느라 분주한 날을 보내고 있다. 그의 소리 세계가 궁금해 지난 연말부터 몇차례 인터뷰 일정을 조율하다 어렵게 시간을 맞췄다. 청담동 자택 거실에서 마주한 그는 소문난 '국악 디바'답게 대중문화계의 당당한 거목으로 아우라를 내뿜었다. 필자한테는 시원하게 뚫린 올림픽대로와 한강 조망권만큼이나 허심탄회하고 솔직한 인간미를 보여준 최고의 인터뷰이였다.
eel@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