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일홍의 스페셜인터뷰⑭-박영선] "제2의 삶, 불같은 사랑은 싫다"
입력: 2018.11.25 05:00 / 수정: 2018.11.27 06:17

연예계를 떠난 지 17년 만에 복귀해 재기를 꿈꾸고 있는 박영선은 최근 패션뷰티 쇼핑몰  선나인(Sun9)을 오픈한 뒤 분주한 날을 보내고 있다. /김세정 기자
연예계를 떠난 지 17년 만에 복귀해 재기를 꿈꾸고 있는 박영선은 최근 패션뷰티 쇼핑몰 '선나인(Sun9)'을 오픈한 뒤 분주한 날을 보내고 있다. /김세정 기자

[더팩트|강일홍 기자] '모델 출신 배우' 박영선(50)은 1987년 19살의 어린 나이에 모델로 데뷔해 CF, 드라마, 영화계까지 진출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1989년 영화 '미스 코뿔소 미스터 코란도'에서 미나 역을 연기하며 주목을 받았고, 영화 '리허설'(95년)에서는 배우 최민수와 파격 베드신을 찍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간판모델'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1999년 돌연 미국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한국계 미국인 남편을 만나 결혼식을 올리고, 평범한 가정주부의 길을 걷는다. 수많은 팬들의 아쉬움을 남긴 채 연예계를 떠난 그는 2016년 SBS TV '불타는 청춘'을 통해 오랜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안 보이면 잊히게 마련이지만 여전히 박영선을 기억하는 팬들은 많다. 필자는 90년대 TV 드라마 속 인기를 주도한 채시라, 고(故) 최진실과 함께 모델 겸 배우 박영선을 종종 인터뷰한 바 있다. 셋은 68년생 동갑내기로 각각 브라운관-스크린에서 활약했다.

박영선이 연예계를 떠난 17년의 시간이 궁금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할 만큼의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무려 20여년 만의 인터뷰 요청에 선뜻 응했다. 지난 날들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듯 이어진 박영선의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A카페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이젠 조급함을 버리고 한걸음씩 차근 차근 풀어가려고 해요. 박영선은 시종 유쾌하고 밝은 표정이었다. 박영선의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A카페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사진=플라이투더문 강은영
"이젠 조급함을 버리고 한걸음씩 차근 차근 풀어가려고 해요." 박영선은 시종 유쾌하고 밝은 표정이었다. 박영선의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A카페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사진=플라이투더문 강은영

-정말 오랜만이다. 화려했던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면 엊그제 같은데 아주 긴 세월이 흘렀다.

다시 만나게 돼 너무 반갑고 감사드려요. 이렇게 뵙고 보니 잠깐이나마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이 드네요. 제가 한창 활약하던 20년 전, 아는 기자분들도 꽤 있었는데 그 사이 다들 은퇴하셨더라고요. 강 기자님이 당시 제 모습과 이미지를 가장 잘 기억해주실 유일한 분인 것 같아요.

박영선은 1968년생으로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주로 패션모델 영역을 기반으로 연기활동을 병행했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중 갑자기 미국행을 결행해 놀라움을 안겼다. 이후 현지인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사실상 은퇴로 받아들여졌다.

-2년 전 귀국 소식을 처음 알린 이후 최근엔 공개활동이 좀 뜸하던데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이 궁금하다.

며칠 전 패션뷰티 쇼핑몰 '선나인(Sun9)'을 오픈했어요. 이거 준비하고 론칭하느라 분주하게 보냈죠. 제가 제일 잘하는 게 예쁘게 멋내고, 포인트 주는 거잖아요, 하하. 우선 귀고리 같은 액세서리를 중심으로 시작했고, 차츰 머플러나 의류 등으로 확대하려고 해요.

박영선은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가 런칭한 'Sun9' 브랜드는 '박영선'의 마지막 글자에 '청순' '도도함' '화려함' 등 박영선만의 차별화된 패션뷰티의 9가지 색깔을 모두 담았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주변에서는 9등신 몸매의 '9'가 결합된 게 아니냐고 해석한다고도 했다. 밝고 유쾌함의 원천은 아마도 이런 자신감인듯 했다.

모델 박영선은 미국에서 결혼 후 30대를 오롯이 엄마로만 살았다고 말했다. 박영선이 인터뷰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세정 기자
모델 박영선은 "미국에서 결혼 후 30대를 오롯이 엄마로만 살았다"고 말했다. 박영선이 인터뷰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세정 기자

-오랜 공백 이후 달라진 연예계 분위기를 실감하지는 않나. 적응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맞아요, 무엇보다 저를 기억해주는 분들이 많지 않아요. 굳이 말한다면 저는 중고 신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되레 걸림돌 같아요. 시스템도 트렌드도 확 바뀌어서 대형 기획사가 아니면 활동에도 제약이 있는 것 같고요. 어쩌겠어요, 이젠 조급함을 버리고 한걸음씩 차근 차근 풀어가려고 해요.

-'박영선' 하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패션모델계의 상징이다. 과거가 궁금한 분들도 많다. 어떻게 데뷔하게 됐나?

어려서부터 예쁘다는 주변의 칭찬에 익숙했어요. 고1때 우연히 주니어학생잡지 표지모델을 하게 됐고, 연예인으로 성공 가능성을 본 엄마가 차밍스쿨에 보내셨죠. 자신감이 붙을 때쯤 모델라인을 통해 패션쇼 오디션에 응시할 기회가 왔어요. 아마도 앙드레김 선생님과 만날 운명이었던 모양이에요.

175cm의 큰 키에 서구형 얼굴을 가진 그는 여고시절부터 달력이나 잡지의 메인을 장식하며 '하이틴 스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앙드레김쇼 오디션에 응시해 발탁된 뒤엔 당대 '톱 모델'로 우뚝 섰다. 당시 세계적 패션쇼를 개최하며 대중문화계를 주도한 앙드레김에 발탁되는 순간 이미 스타탄생을 예고한 셈이다.

순진했고, 세상을 너무 몰랐어요. 박영선은 한창 잘 나가던 시기에 돌연 미국행으로 은퇴를 선언한 일에 대해 그냥 다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고, 그곳이 미국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김세정 기자
"순진했고, 세상을 너무 몰랐어요." 박영선은 한창 잘 나가던 시기에 돌연 미국행으로 은퇴를 선언한 일에 대해 "그냥 다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고, 그곳이 미국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김세정 기자

-20년 전 갑작스런 미국행이 늘 궁금했다. 워낙 잘 나가던 중이었고, 특별한 스캔들도 알려진 게 없기 때문이다. 이유를 밝힐 수 있나?

순진했고, 세상을 너무 몰랐어요. 그냥 다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고, 그곳이 미국이었을 뿐이에요. 잠깐 쉬다 돌아왔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텐데, 제가 바보였죠. 어떤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더 어리석었다고 해야하나요. 지금도 저를 아는 많은 분들이 무슨 사랑의 도피라도 한게 아니냐고 묻곤 해요.

박영선은 미국 유학 6년 만인 2005년 그곳에서 만난 한국계 미국인 남편과 결혼식을 올렸다. 곧바로 임신하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주부로만 살았다. 박영선은 "미국에 머물던 기간이 완전히 버려진 시간은 아니었다"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을 넓혔고, 나밖에 모르고 살던 이기심 대신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배웠다"고 말했다.

박영선은 30대를 오롯이 엄마로만 살았다고 했다. 다행히 아시아인이 거의 없는 동네여서 맨 얼굴에 트레이닝 복 운동화 차림으로 다녀도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연예인을 포기한 대신 자유로운 삶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남편과의 이혼이 쉽지는 않았다고 들었다. 방송에서 아들 얘기를 하고 울었는데 서울에는 혼자 돌아왔나?

사고방식 차이로 갈등을 겪어 각자 삶을 살기로 했지만 양육권 분쟁으로 다소 어려움이 있었어요. 아들은 교육조건이 좋은 미국에서 아빠와 거주하기로 합의했고, 제가 필요하면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상황이에요. 지금은 미국으로 유학(현재 8학년, 중학생) 보냈다고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죠. 아들을 보러 3개월에 한번씩은 미국을 다녀옵니다. 혼자 귀국한 처음 얼마간은 많이 서글펐지만 지금은 아주 편안해요. 요즘엔 또 SNS를 통해 수시 소통이 가능하잖아요.

박영선은 "사생활 문제"라며 구체적 답변은 피했다. 다만 그는 "제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 한 일은 아이를 낳은 일과 엄마가 된 일"이라면서 "비록 지금 한 지붕 아래 함께 살고 있진 않지만 아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엄마는 씩씩하게 다시 홀로서기에 성공할 것을 약속했다"며 웃었다.

8년 전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울었어요. 박영선은 지난 5월 자신을 발탁해 모델로 입지를 다지게 해준 고 앙드레김 추모 패션쇼 무대에 직접 올랐다. /플라이투더문 제공
"8년 전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울었어요." 박영선은 지난 5월 자신을 발탁해 모델로 입지를 다지게 해준 고 앙드레김 추모 패션쇼 무대에 직접 올랐다. /플라이투더문 제공

-배우 최민수와는 과거 '리허설'에서 연기호흡을 맞췄다. 파격 노출로 화제가 된 뒤 둘이 사귄다는 소문도 있었다.

제가 갑자기 미국으로 떠난 뒤 뒤늦게 그런 소문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사실과 달라요. 그런 일 자체가 없었으까요. 그리고 당시엔 최민수 오빠가 지금 와이프인 강주은 씨와 죽고 못살 때였어요. 한달에 두 세 차례씩 캐나다행 비행기를 탈 만큼 뜨겁게 연애하던 시절인데 말이 안 되죠. 물론 저도 관심이 없었지만요ㅋ. 암튼 그럴 여지가 아예 없었다고 보면 돼요.

-고(故) 앙드레김은 박영선 씨를 유독 예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모델계로 이끌어준 은인이기도 한데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다.

8년 전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많이 울었죠. 선생님 생각만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요. 너무 많은 사랑을 주셨는데 그땐 인기에 도취돼 진심어린 감사의 말씀도 한 번 못 해봤어요. 귀국 후 선생님 묘소를 찾아가 고마움을 전했지만 생전에 뵙지 못한 게 너무 후회되는 거죠.

-국내 연예계는 물론 일반인들도 이혼은 여러 선택 중 하나로 받아들인다. 재혼 등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바 없나?

저요, 보기완 다르게 연애나 이성적 감정에는 범생이에요. 아직도 순진하고 초보예요. 이혼이야 어쩔 수 없는 저의 주홍글씨가 됐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사랑이 여전히 부러워요. 당장은 아니라도 서로 믿고 의지할 상대가 나타난다면 마다할 이유는 없겠죠. 다만 한가지, 뜨겁게 타오르다 꺼지는 불같은 사랑 말고, 편하고 믿음 가득한 그런 사랑을 하고 싶어요.

'편하고 믿음 가득한 사랑'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박영선은 "몸과 마음이 완벽하게 하나로 일치되는 사랑"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 서로 같은 방향을 볼 수 있어야 진정한 내면 사랑이 꽃핀다"면서 "이전까지 커피잔을 서로 반대편에 앉아서 다르게 봤다면 이제는 나란히 앉아 같은 모습으로 보고 싶다"고도 했다.

인터뷰 말미에 마침 같은 카페에서 미팅이 있던 배우 임하룡이 영선아 여기 웬일이야, 어라? 강 기자도 같이 있네? 하며 다가와 자연스럽게 합석이 됐다. 임하룡 박영선은 미스 코뿔소 미스터 코란도(87년)에 함께 출연한 사이다. /김세정 기자
인터뷰 말미에 마침 같은 카페에서 미팅이 있던 배우 임하룡이 "영선아 여기 웬일이야, 어라? 강 기자도 같이 있네?" 하며 다가와 자연스럽게 합석이 됐다. 임하룡 박영선은 '미스 코뿔소 미스터 코란도'(87년)에 함께 출연한 사이다. /김세정 기자

-모델활동은 계속할 생각인가?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말해달라.

요즘엔 아주 작은 일을 해도 재밌고 신이 나요. 주춤했던 시간만큼 더 많은 일을 많이 하고 싶어요. 새로 시작한 사업을 병행하며 배우로서도 모델로서도 열심히 활동하려고요.

박영선과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누군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영선아 여기 웬일이야, 어라? 강 기자도 같이 있네?" 방송인 임하룡이었다. 마침 옆 방에서 지인과 미팅을 마치고 돌아가려던 중 발견한 모양이었다. 임하룡 박영선은 '미스 코뿔소 미스터 코란도'(87년)에 함께 출연한 사이다.

이장호 감독의 '미스 코뿔소 미스터 코란도'는 흥행엔 실패했지만 박영선에게 스크린 데뷔작이란 상징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이후 박영선은 '자전거를 타고 온 연인' '연예는 프로, 결혼은 아마추어' '리허설' 등 몇 작품에 더 출연했다.

갑작스런 임하룡의 등장으로 좌중이 급 화기애애 해졌다. 그는 "영선이는 깍쟁이 같고 까칠해 보여도 자꾸 만날수록 정 많고 애교 넘치는 친구"라고 치켜세웠고, 박영선이 활짝 웃으며 "오빠, 정말이야? 오늘 커피값은 제가 낼게요"라고 화답했다. (실제 커피값은 임하룡이 먼저 내고 나갔다)

박영선은 내내 밝고 유쾌한 모습으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고 앙드레김 추억에 잠시 울적해 한 것을 빼면 시종 화사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를 통해 '영원한 스타는 있어도 영원한 인기는 없다'는 말에 새삼 공감이 갔다. 그래서일까. '내려놓으면 가벼워지고, 비우면 채워진다'는 말이 스페셜한 울림으로 와닿았다.

eel@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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