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기획-'수난의 엔카 여왕' 계은숙③] 불후한 유년시절 딛고 최고 엔카가수로
입력: 2018.02.21 00:05 / 수정: 2018.02.21 08:30

일본무대는 조용필 남진 등 수많은 국내 정상급 가수들이 문을 두드리지만 계은숙은 대한민국 가수들 중에서 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엔카가수로 자리매김했다. 사진은 계은숙이 자신의 팬모임에서 회원들과 노래를 부르며 교감하고 있는 장면. /계은숙 팬카페(최동욱) 유투브 캡쳐
일본무대는 조용필 남진 등 수많은 국내 정상급 가수들이 문을 두드리지만 계은숙은 대한민국 가수들 중에서 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엔카가수로 자리매김했다. 사진은 계은숙이 자신의 팬모임에서 회원들과 노래를 부르며 교감하고 있는 장면. /계은숙 팬카페(최동욱) 유투브 캡쳐

한때 '엔카의 여왕'으로 불린 계은숙(55)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한국인으로는 처음 일본 'NHK홍백가합전' 7년 연속 출전이란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뒤 국내에 복귀, 10여 년간 재기를 노리고 있지만 성공 소식은커녕 오히려 마약과 사기 등의 혐의에 연루돼 팬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최근에도 그는 사기혐의로 피소됐다. 일본 활동 20여 년간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며 수백억 원의 몸값을 자랑했던 그가 몇백만 원, 몇천만 원이 없어 지인들한테 돈을 빌리고 이를 갚지 못해 굴욕의 삶을 살고 있다. 화려했던 엔카 가수 계은숙의 명(明)과 암(暗)을 총 네 차례에 걸쳐 재조명한다.<편집자 주>

일본유선대상(日本有線大賞) 그랑프리, 7년 연속 홍백가합전 출연

[더팩트|강일홍 기자] 충남 서산에서 출생한 계은숙의 어린 시절은 불후했다. 아버지의 얼굴은 물론 아버지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녀의 어머니(2016년 타계)는 부친과 헤어진 후 친정으로 돌아와서야 임신(계은숙)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서울 명동의 증권가에서 작은 매점을 운영했기 때문에, 계은숙은 언니인 계미선과 함께 서울에서 자랐다.

계은숙은 답십리 초등학교와 성수여자중학교 시절엔 평범하게 지냈고, 어머니를 도와 비닐우산이나 석간신문을 팔기도 했다. 사이클 선수를 했던 고교시절엔 다른 팀 선수와 싸움을 벌인 뒤 세 차례 전학을 했고, 최종적으로는 천호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사춘기 시절인 중학교 때부터 계(桂) 씨 종친회를 찾아다니며 아버지의 행방을 수소문할만큼 자신의 뿌리에 대한 깊은 집착과 열정을 갖는다. 이런 노력으로 훗날 결국 아버지와 재회하지만, 이미 새로운 가정과 식구를 거느린 아버지와는 서먹한 느낌으로 더이상 인연을 이어가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계은숙은 여고시절이던 1977년 러키샴푸 CF 모델로 데뷔했다. 이듬해인 1978년에 유니버설레코드에서 가수로 정식 데뷔한 뒤 1980년까지 '노래하며 춤추며' '기다리는 여심' 등을 발표했다. 노래가 히트하면서 그해 MBC '10대가수가요제' 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일약 인기가수로 발돋움한 뒤 '나에겐 당신밖에' '다정한 눈빛으로'와 같은 곡을 냈다.

1984년 일본의 작곡가 하마 케이스케(浜 圭介)에게 사사한 것을 계기로 이듬해 85년 '오사카 보쇼쿠'(大阪暮色)로 일본 데뷔에 성공한다. 이후 일본 무대에서 크게 주목을 받으면서 내한 공연이나 국내 방송 출연을 극도로 자제했다.

일본 무대한 계은숙은 이후 '스즈메노 나미다'(すずめの涙), '유메 온나'(夢おんな), '요이도레테'(酔いどれて), '마요나 카노 샤와'(真夜中のシャワー), (베사메무초'(ベサメムーチョ) 등의 곡들을 차례로 발매하며 각종 음악상들을 휩쓴다.
1988년 '유메 온나'(夢おんな)로 제21회 일본유선대상(日本有線大賞)의 그랑프리를 차지하고, 같은 해 인기의 NHK의 연말 홍백가 합전(紅白歌合戦)에 최초로 등장한다. 계은숙은 이후 1994년까지 7년 연속 홍백가합전에 출연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특히 일본 레코드 대상(日本レコード大賞)의 앨범 대상을 수상하며 그의 일본 내 존재감은 확고부동의 위치를 갖게 된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도 계은숙의 팬클럽 회장을 맡았을 만큼 그의 열혈팬으로 알려져 화제를 모으기기도 했다.

계은숙은 여고시절이던 1977년 러키샴푸 CF 모델로 연예계에 입문, 이듬해인 1978년 유니버설레코드에서 가수로 정식 데뷔해 1980년까지 노래하며 춤추며 기다리는 여심 등을 발표했다. /계은숙 팬카페(최동욱) 유투브 캡쳐
계은숙은 여고시절이던 1977년 러키샴푸 CF 모델로 연예계에 입문, 이듬해인 1978년 유니버설레코드에서 가수로 정식 데뷔해 1980년까지 '노래하며 춤추며' '기다리는 여심' 등을 발표했다. /계은숙 팬카페(최동욱) 유투브 캡쳐

계은숙은 보다 만족할 만한 콘서트 활동을 위해, 96년 일본 데뷔 이래 계속 활동했던 제일 프로덕션을 퇴사한 뒤 독립한다 . 이후 타이거 엔터프라이즈로 이적하고, 레코드 회사도 도시바-EMI 주식회사에서 타우루스 레코드로 바꿔 그해 9월 싱글 '아이 히토츠 유메 히토츠'(愛ひとつ 夢ひとつ)를 발매한다.

이 앨범은 쿠니요시 료우이치(?吉良一)가 프로듀서를 맡아 계은숙의 보컬을 이끌어낸 것으로 더 유명해졌고, 동명 타이틀로 도쿄후생복지연금회관에서 진행된 콘서트는 이듬해 1월 NHK-BS2에서 녹화방영돼 크게 반향을 일으켰다. 이 공연실황은 CD 및 비디오로도 출시될만큼 뜨거운 관심을 끌었다.

또 1998년 발매된 '푸리즈'(プリーズ)는 인기 TV 연속극의 주제가로 사용되면서 대히트했는데 오리콘 차트(オリコンチャート)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유선방송 리퀘스트 순위에서도 인기를 모았다. 유선방송 리퀘스트 엔카순위 2위, 종합 9위를 기록했다.

계은숙의 노래들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들 사이에 사랑을 받아, 카라오케 랭킹에서 언제나 상위권에 들고 있을 정도 다. 일본무대는 이후에도 조용필 남진 등 수많은 국내 정상급 가수들이 문을 두드리지만 계은숙은 대한민국 가수들 중에서 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엔카가수로 자리매김한다.

국내가요계의 산증인이자 1세대 가요기획자인 가넷엔터테인먼트 김성일 대표는 "계은숙의 위상은 일본 국민들이 인정한 최고의 엔카가수라는 자부심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④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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