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윤석이 영화 '1987'에 출연한 것을 2017년 가장 뿌듯한 일로 꼽았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
김윤석 "관객? 1987만명만 들었으면 좋겠다" 폭소
[더팩트|권혁기 기자] 배우 김윤석(50)은 동의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재학시절인 1986년, 민주화 투쟁으로 휴교와 휴강이 잇따르자 군입대를 생각했다. 그러던 중 연극동호회 소속 교우들이 연극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고 매력을 느껴 가입하면서 연기자를 꿈꾸게 됐다. 처음에는 취미에 가까웠으나, 연기는 그렇게 김윤석의 삶이 됐다.
김윤석은 지금으로부터 딱 30년 전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핵심적인 해였던 1987년에 대한 소회가 남달랐다. 스스로 "대단한 운동권은 아니었다. 그냥 커다란 대자보를 쓰는데 손이 부족하다고 하면 빌려주고, 거리에서 구호 한 번 외쳐준 게 다였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영화 '1987'(감독 장준환·제작 우정필름)에서 대공수사처 박 처장 역을 맡은 김윤석은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서 진행된 <더팩트>와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저에게는 30년 전 일이지만 그 때 그분들은 아직도 대학생이지 않느냐"며 눈물을 훔친 김윤석은 캐스팅 당시 이야기를 들려줬다.
"장준환 감독과 워낙 친하니까 시나리오 초고 때부터 봤죠. '이러이러한 배역이 주요 배역인데 이런 배역을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말이죠. 실화이고, 당시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인데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을 때 완성도가 얼마나 될 것인지가 제일 관건이라고 생각했어요. 실제 유족들도 계시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보다 완성도가 떨어지면 예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초고에서 완성본까지, 제가 봤을 때 감독님은 최선을 다하신 것 같아요. 방송국부터 모든 자료를 뒤지고 모든 인맥을 동원해 준비해 만들었죠. 저에게 '안티 히어로'가 강력해야 그 이후 밝은 빛에 힘이 생긴다고 하셔서 흔쾌히 하겠다고 했죠."
다음은 고(故) 박종철 열사의 부산 혜광고등학교 2년 후배인 김윤석과 나눈 일문일답.
"박종철 열사 누님, 잘 만들어달라 부탁하셨죠." 박종철 열사의 고등학교 2년 후배인 김윤석은 박종철 열사의 누나를 만나 영화에 대해 설명했다. 김윤석은 "그래서 더 부담감이 컸다"고 토로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
-좋은 영화 정말 잘 봤다. 연기가 압권이었다. 박종철 열사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다.
올해 1월 13일이 30주기였어요.(박종철 열사는 1987년 1월 14일 사망) 제가 고1때 3학년이셨죠. 서울에서 추모식을 하는데 가족들이 오셔서 아버님께 인사드리고 누님을 만나 뵀어요. 누님께서 '잘 만들어 달라'고 말씀주셨죠.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만들겠다'고 했는데, 악역에 대한 마음의 부담감보다 완성도에 대한 부담감이 컸습니다. 연기를 잘하고 빛나게 하자는 느낌보다 제 캐릭터가 상징하는 것들을 놓치지 말자고 다짐했죠.
-영화 행사 때 박 처장에 대해 '시대가 낳은 괴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박 처장의 대사 중에 '사냥개끼리 싸우면 주인이 어떻게 할까?'라는 게 있죠. 본인의 정체성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아요. 신념이라기보다는 권력에 있어 살아남기 위한 수단을 사용한 것이죠. '이게 옳아'라고 얘기한 것은 아니고, 권력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했습니다. 박 처장의 비극적인 가족사는, 한병용(유해진 분)을 설득하기 위한 거짓말일 수 있다고 봤어요. 그렇지만 사실처럼 연기해달라는 감독님 요구가 있었죠. '내가 다 책임질끼야'라는 대사, 정말 본심이었을까요? 저는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당근과 채찍이라고 봤습니다. 어떻게 남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겠어요.
-'황해'에 이어 북한 사투리가 일품이었다.
'황해'는 조선족, 함경도 쪽 사투리라면 박 처장은 평안도 출신이라 실제 평안도 분께 사사를 받았어요. 녹음한 파일을 받아 연습했죠. 계속 공부하고 녹음하고 했어요. 가르쳐주신 분도 평안도 지식인 분이었는데 거기서는 '아바이 오마이'라고 안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억양이 다르고 연음 법칙이 다르다는 것이죠. 이북을 '리북'이라고 정확한 발음으로 한다고 해서 달달달 연습했습니다.(웃음) 언어적으로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연습이었죠.
-'1987'을 제작 준비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고 들었다.
장미대선 전에 이 영화를 준비했는데 '누가 투자를 할까'라고 걱정했죠. 첫 번째는 완성도였고요. 사실 저는 실감이 나질 않았어요. 블랙리스트가 있다고, 그런 압력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1987년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자기 비하라고 생각했어요.
-실존인물 시사회도 열었다고 들었다.
박종철 열사 가족들께 합격을 받았어요. 기분이 좋았고 감사했죠. 개인적으로 감독님 옆에서 봤는데 손을 잡고 수고하셨다고 말씀드렸죠.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은 지금 들어도 어이가 없다.
그 시대를 설명하는 발언이죠. 넌센스. 그 장면을 찍을 때 너무 웃었어요. 예고편에 보면 '탁 치니 억하고' 다음에 '어?'라고 취임새를 넣는 부분 있잖아요. 즉흥적이었는데 자기가 해 놓고 자기도 '그래서 어?'라고 나가는 취임새였던 것 같아요. 실제 기자 연기를 하던 배우들부터 스태프까지 다들 뒤집어 버렸어요. 애드리브였죠. 그냥 나와버리던데요. 매끄럽게 문장이 이어지지가 않았죠.
"1987만명만 보셨으면 좋겠어요." 김윤석은 '1987' 예상 스코어에 대해 "1987만명만 보셨으면 좋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의 너스레를 떨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들은 많지만 1987년 큰 두 개의 사건을 관통하는 영화는 '1987'이 처음이다.
그 부분은 인위적인 게 아닌 것 같아요. 현실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작년 촛불광장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그 당시 연세대 앞에 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죠. 암울한 시대였지만 다시 밝게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는 것이죠. 모이라고 해서 모여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미국을 봐도 뭔가 계속 반복되는 것 같지 않나요? 끝까지 싸워야하는 것 같아요. 사명감이나 투철함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모이는 것. 그 당시 대자보도 핵심 운동권만 모여서 쓴 게 아니거든요. 엄청 큰 대자보라 손이 부족하다고 하면 가서 도와줬죠. 인쇄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으니까요.
-영화에서 불심검문이 등장하는데 당해본 적이 있나?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당했어요.(웃음) 나가면 하루에 7번 정도 당했죠. 만화방과 당구장은 꼭 오는데 2명이 1조로 와서 한 명은 밖에서 대기하는 거죠. 당구 치다가도 신분증을 줘야했죠.
-김윤석에게 '1987'이란?
올해 한 일 중 가장 뿌듯한 일인 것 같아요. 2017년도에 본 관객들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 2018년에 볼 관객은 2018년에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으면 좋겠어요. 1987만명 정도만 들었으면 좋겠습니다.(웃음) 2017만명은 바라지 않아요.(웃음) 저도 두 딸을 데리고 가족들과 보고 싶어요. 보여줘야할 것 같아요. 이제 아빠가 배우인 것도 아니까 중학생, 초등학생 두 딸에게 보여주면서 얘기해야죠. '아빠가 이번에 이런 악역을 맡았고 이런 시대가 있었어'라고 설명해주려고요. 아이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어른들이 도와줘야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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