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재심'에서 악질 형사 백철기 역을 맡은 배우 한재영의 연기관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효균 기자 |
'재심' 한재영 "영화 혼자 봤으면 울었을 것"
[더팩트 | 김경민 기자] 악역은 작품의 꽃이다.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고 감정을 죄어오는 역할은 곧 드라마 전체를 주무른다. 악역이 존재감을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여운이 결정된다. 실타래가 탄탄하게 꼬여 있어야 그것을 푸는 재미가 더해진다.
배우 한재영(39)은 영화 '재심'(감독 김태윤)에서 중심사건의 발단이 되는 악질 형사 백철기 역이다. 조현우(강하늘 분)에게 억울한 살인범 누명을 씌우고 궁지로 몰아넣는다.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형사가 사건 조작의 주체로 변모함으로써 더 막막하고 갑갑한 올가미를 만든다.
최근 극 중 악인의 신분으로 소비되던 정치인, 조직폭력배, 기업가처럼 권력형은 아니지만 정의를 외치던 형사가 진실을 외면했을 때 공포감과 긴장감은 배가됐다. 우리 곁에도 있을 수 있는 인물, 집에서는 착한 남편이자 아버지일 수도 있지만 조현우 앞에서는 극악무도한 인물. 한재영이 구상한 백철기다.
한재영은 '재심'에서 백철기 역을 악역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이효균 기자 |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악역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연기하는 입장에서 백철기라는 역할이 있어야 영화 스토리가 완성되잖아요. 백철기로선 거짓 자백을 받아내는 게 목표이고, 계속 해왔던 일이니까 처음 하는 일인 것처럼 윽박지르고 싶지도 않았고요. 보통 사람이거든요. 대본 안에서만 생각하고 실제 사건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실제 그 형사가 어떻게 했는지 상상력으로 연기해야 하니까요. 돈이 필요했고 관계들이 얽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한재영은 가해자 피해자 약촌오거리 실화 등 어떤 것에 선을 나누지 않고 백철기라는 개인에 집중했다. 행동이나 말이나 걸음걸이를 보고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이끌어내는 게 중요했다.
"가장 편하게, 일상적으로 연기하자는 게 모토입니다. 극단에서 여자를 희롱하려는 동네 양아치 역을 맡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장면을 연습하는데 단장이 계속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100번은 나갔다가 들어왔어요. 처음엔 껄렁껄렁하게 흉내를 내다가 나중에 티 내지 않고 그냥 들어오니까 통과시키더라고요. 양아치라고 티 내면서 걸어 다니진 않으니까요. 그런 걸 배웠어요."
한재영은 사투리 때문에 대사를 내뱉지 못했던 경험담을 털어놨다. /이효균 기자 |
한재영은 고등학생 때 우연히 교사의 추천으로 연기학원에 발걸음했다. 하고 싶은 것도 꿈도 없던 시절, 연기를 공부한다고 배우가 될 수 있다는 현실감도 없던 1996년 광주의 한 소년은 운명처럼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진짜 관문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후였다.
"연극영화과에 갔지만 사투리에 갇혀서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대사가 안 나와요. 휴학하고 소질이 없나, 그만둘까 고민했지만 다시 하고 싶었습니다. 휴학 기간에 강의를 들으면서 작품 연출도 하고 극단에 들어갔어요. 불가사의하게도 극단에서 연극을 맡기 위해 대본 읽어야 하는 상황이 되니까 나도 모르게 말을 하고 있더라고요. 절실하니까 탁 트인 것 같아요. 그때부터 감이 딱 왔어요."
하고 싶은 것이 연기라는 공식이 생긴 이후로는 한 우물만 팠다. 자신의 삶에 대해 "왜 이렇게 재미없게 살았나" 아쉬워했지만 "열심히 하지 않았으면 지금 인터뷰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후회하지는 않았다.
"다들 굴곡이 있겠지만 단순해요. 돈도 없고 연애도 안 해봤고 자격증도 없고 아르바이트도 안 했고 연극에 집중했어요. 운전면허도 지난해에야 땄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외톨이였죠. 지금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아요. 가끔 멍하게 있을 때 인생을 왜 이렇게 재미없게 살았나 싶어요(웃음)."
한재영은 거친 이미지와 달리 눈물이 많다. /이효균 기자 |
그래도 얻은 건 분명하다. 수많은 얼굴의 단역을 거쳐 조연 그리고 주조연으로 뻗어 나가면서 끊임없이 달렸다. 휴식기도 없었다. '재심' 이후로도 영화 '대립군', 드라마 '품위 있는 여자'로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공략한다. 인터뷰 전날도 여러 예능 프로그램 출연에 밤샘 촬영까지 소화해 피곤함을 털어놨지만 쉬면 몸이 간지럽단다.
한재영은 주로 선이 굵직한 연기나 카리스마 뿜어내는 악역을 도맡아왔던 만큼 웃고 있어도 묵직한 아우라는 무시할 수 없었다. 투박한 말투와 가식 없는 소탈한 성격은 남성적인 캐릭터와 비슷하게도 보였지만, 칭찬에는 유독 약하고 다큐멘터리를 보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감성 충만한 반전 매력도 지녔다.
"감성적이에요. 다큐멘터리에서 사람의 감정을 보는 걸 좋아합니다. 그들의 정서를 갖고 와서 간접 경험하게 되니 연기적으로 많이 배우게 되거든요. 사람 없으면 많이 울어요. 연기할 때 눈물은 잘 안 나는데, 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잘 안 나요. 아이고. 건달만 하니까 그런가(웃음).
'재심'도 혼자 봤으면 울었을 거예요. 내가 나오는 장면은 잘 못 보겠어요. 촬영장에서 연기한 감정이 화면에서는 생각했던 것의 절반 정도 나오더라고요. 저땐 진짜 열심히 했고 이땐 느슨해졌구나 그래프가 그려져요. 어떤 장면을 보면 부끄럽고. 그 역할을 하려고 수많은 사람이 오디션을 봤을 텐데 부끄럽고 후회하고 창피하고 미안하죠. 좀 더 굶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한재영은 캐릭터에 한정하지 않고 사람냄새 나는 연기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효균 기자 |
작품을 하나씩 읊으며 그 안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짚고 "그땐 정신이 다른 데 팔렸나"라고 스스로 혼내기까지 했다. 과격한(?) 겸손에 대해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어느 정도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다"고 주관을 밝혔다. 고정적인 이미지에 대해 두려워할 시기도 아니라고 못 박았다.
"이미지에 갇힌다는 두려움은 없어요. 악역도 다 다르고 건달도 다 다르잖아요. 악역이라도 상관없고 송강호 선배가 영화 '우아한 세계'에서 했던 '꼬랑내' 나는 역할, 사람 냄새가 나는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이끌어가는 역할이 주인공이고 이끌어갈 수 있도록 양념을 치는 게 조연인데 주연에 대한 욕심은 있지만 어렵다는 걸 잘 알아요. 단계를 밟아나가는 게 정석이죠. 갑자기 훅 올라가서 내공이 바닥나면 그만큼 쉽게 떨어질 겁니다. 조바심도 별로 없어요. 주어진 것이나 잘하고 살면 되죠(웃음). 정신 차리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배우는 게 맞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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