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태화 감독은 영화 '가려진 시간' 시나리오에만 꼬박 1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오로지 '가려진 시간'에만 쏟은 노력은 투자배급사들이 알아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남용희 인턴기자 |
홍익대 미술학도에서 영화감독이 되기까지…
[더팩트|권혁기 기자] 시나리오 투자에만 꼬박 1년이 들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진척이 없을 때는 작업실을 떠나 카페에 가기도 했고, 방을 잡고 쓰기도 했다. 계속 돌아다니며 영화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렇게 영화 '가려진 시간'(감독 엄태화·제작 바른손이앤에이)이 탄생했다.
언론/배급 시사회 이후 호평을 받고 있는 '가려진 시간'을 연출한 엄태화 감독(35)을 9일 땅거미가 지던 쯤에 서울 종로구 팔판동 카페에서 만났다. 동생 엄태구(33)와는 목소리부터가 달랐다. 허스키한 보이스가 매력적인 동생과 달리 엄태화 감독은 평범했다. 스타일은 청바지에 청남방, 그 위에 검은색 니트를 매치하고 하얀 운동화를 신었다. 댄디했지만 패션 역시 평범했다. 워낙 기발한 영화를 본 다음이라 그런지, 남다른 포스를 풍길 것 같았지만 또래 친구같은 느낌이었다.
오후 5시, 그날의 마지막 인터뷰 타임에 자리를 잡고 앉아 기다리던 중 <더팩트> 남용희 사진기자가 "좀 더 웃어주세요"라고 말하는 게 들렸다. 아무래도 인터뷰가 익숙치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영화 관계자는 "그래도 많이 익숙해지신 것 같다. 포즈가 점점 자연스러워졌다"고 귀띔했다.
엄태화 감독에게 "약 빨고 연출하신 게 맞느냐"고 먼저 쓴 리뷰 기사 제목으로 질문을 했다. (관련기사 [TF씨네리뷰] '가려진 시간' 엄태화 감독님, 약빨고 연출하셨나요?)
"아! 그 기사 잘 봤습니다. 주변에서 정말 재미있는 제목이라고 하기도 했어요. 감사합니다. 사실 운이 되게 좋았던 것 같아요. '가려진 시간'의 시나리오를 보고 제작하겠다고 한 제작사나, 투자하겠다고 한 투자사와 출연하겠다고 한 강동원 배우 모두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저는 행운아인 것 같아요. 신인감독인데 말이죠. 다들 (영화다운 영화에)갈증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때도 잘 맞았던 것 같고요."
-큰 파도 앞에 있는 두 사람이 담긴 그림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얘기했는데.
사실 제작보고회 때는 짧게 설명하느라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처음에는 '멈춘 시공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이 소재로 어떤 이야기를 하지?'라는 생각에 이미지를 서칭(searching·탐색)하다 그 그림을 찾게된 것이죠. 과연 그 그림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라고 고민했죠.
-상상력이 남다른 것 같다.
남다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형적인 얘기보다는 새로운 이야기에 끌리는 편인 것 같아요. 시간을 다루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죠. 영화 '터미네이터' '백 투 더 퓨쳐' 만화 '드래곤볼'을 보면서 그런 상상을 많이 했어요. '드래곤볼'에서는 셀이 미래에서 오고, 손오공 등이 '시간과 정신' 방에서 수련을 한 그런 부분이요. 그런 것들이 제 속에서 합쳐져 나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재의 영화가 나올 때가 된 것 같아요. 드라마로는 '나인' 등이 있었죠.
"팀 버튼 감독의 작품 '배트맨2'를 가장 좋아합니다." 엄태화 감독은 할리우드에서도 남다른 상상력을 소유한 팀 버튼을 좋아하는 감독으로 꼽았다. /남용희 인턴기자 |
-영화를 보면서 팀 버튼 감독을 많이 떠올렸다. 팀 버튼 감독처럼 색다른 소재를 다루지만, 아주 한국적이었다. 예컨대 '시간을 잡아 먹는 귀신'이라는 설정이 그랬다.
팀 버튼 감독 작품도 많이 봤죠. '배트맨2'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해요. 요즘 살고 있는 세상이 뭐랄까요? 조금 어둡지 않나요? 믿을 게 하나도 없는 것 같고…. 그런 상황에서 피로감을 느낀 것도 같아요. 반대로 희망은 무엇일지, 그런 것들이 합쳐져 나온 이야기가 된 것 같습니다.
-투자부터가 힘들었을 것 같다.
의외로, 시나리오가 쇼박스에 갔을 때 최종 승인까지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강동원 배우가 캐스팅되기 전에 결정됐죠. 모두가 새로운 것에 어떤 갈증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 제 영화가 완전 새로운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고요. 사실 새롭기만 하면 보는 사람들한테는 낯설고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로움을 어떻게 익숙한 정서로 다가가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원래 꿈이 영화 감독이었나?
대학에 들어와서 영화감독을 꿈꿨죠. 고등학교 때는 그림 좀 그린다고 주변에서 얘기하는 게 있어 실기 위주로 준비해 대학에 갔죠.(엄태화 감독은 홍익대학교 광고디자인과를 졸업했다) 적성에는 맞지 않았어요. 그러다 CF 현장에도 나가보고, 휴학 중 영화 '몽정기' 미술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긴 호흡으로 한 이야기를 만드는 게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죠. 그러면서 '내가 원래 좋아했던 게 이거였구나'라고 깨달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 만들기'를 좋아했거든요. 복학 후 영화 수업을 듣기 시작했죠.
-미술계가 인재를 잃은 것 같다. 그렇다면 콘티에도 신경을 많이 쓸 것 같다.
최대한 자세히, 그리고 그대로 찍으려고 노력해요. 최대한 변수가 없어야 빨리 진행되기 때문이죠. 콘티 작가가 현장도 가봐야 빨리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신은수, 가능성이 보인 친구죠." 완전한 신인이었던 신은수를 알아본 것은 엄태화 감독의 '눈'이었다. 엄태화 감독은 신은수의 가능성을 보고 캐스팅했다고 밝혔다. /남용희 인턴기자 |
-'쓰리, 몬스터' '친절한 금자씨' 연출부를 거쳐 박찬욱 감독의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
많이 받았죠. 클로즈업을 쓰는 방식도 그렇고 촬영 기법에 있어 제 색깔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상황은 아닌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제 단편을 보고 '박찬욱 감독의 냄새가 난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죠. 콘티 짜기부터 편집까지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특히 저는 박찬욱 감독님의 현장 진행 방식을 많이 배우려고 노력했어요. 스태프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보면, 현장이 톱니바퀴처럼 잘 돌아가거든요. 스태프한테 일을 맡길 때는 리듬과 함께 부담을 동시에 주시죠. 책임감을 갖게 해 200%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판을 만들어주세요. 반대로 생각하면 그 책임은 감독한테 올텐데, 그걸 감내하고 스태프를 잘 이끄시는 모습을 보면서 당연히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아역 신은수는 아예 연기 경험이 없었고, 이번이 첫 작품이라 쉽지 않은 캐스팅이었을 것 같은데.
연기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걸그룹을 준비하던 친구였죠. 때문에 오디션 때 연기를 볼 수는 없었어요. 다만 성품과 얼굴에 담긴 이야기를 보려고 했죠. 가능성만 본 셈인데, 연기 트레이닝을 하면서 확신이 들었어요. 트레이닝이 끝날 때쯤 불안감은 싹 사라졌고요. 오히려 처음이라서 좋았던 것 같아요. 아역들이 보여주는 버릇같은 연기가 있는데 그런 게 없어서 더 좋았어요. 좋은 연기 선생님들한테 배웠고, 본인도 연기하면서 한 번도 연기한다고 생각하면서 연기한 게 아니었던 것 같아요. 타고나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은수는 타고난 배우인 것 같아요. 아! 가수를 할 수도 있으니 재능이 많은 친구죠.
-신은수도 잘했지만 아역인 이효제(성민 역), 김단율(태식 역), 정우진(재욱 역) 모두 한 몫을 했다.
제가 어렸을 때 산만하고 장난꾸러기였기 때문에 남자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동족혐오랄까요?(웃음) 까부는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죠. 그런데 '가려진 시간'을 찍으면서 바뀌었어요. 정말 보기만 해도 예쁘더라고요. 흐뭇하기도 했죠. 아이들이 현장에서도 잘 놀기를 바라는 생각에 한 달 정도를 거의 매일 같이 만나서 얘기를 했죠. 서로가 친해지도록 했어요. 그렇게 만나니 어린 친구들이 실제처럼 연기하더라고요. 저는 아주 중요한 대사를 바꾸지만 않는다면 배우가 편한대로 바꾸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심리적으로 편안하게 만들어야 좋은 연기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가려진 시간'은 믿음에 대한 영화 같다. 엄태화 감독 역시 누군가를 잘 믿는 편인가?
저는 잘 속는 편이죠. 귀가 얇아요.(웃음) 어른이 되면서 '산타할아버지가 어디있어?'라고 하는 것처럼 쉽게 믿었던 것들이 무언가 의심을 하게 되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회인 것 같아요. 그러다보면 왠지 외로워지는 것 같고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고민하는 요즘이죠. 좀 더 잘 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할지,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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