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수상자인 배우 천우희. 제35회 청룡영화상이 26일 오후 경희대평화의전당에서 개최되는 가운데 지난해 파격적인 수상결과로 화제를 모았던 청룡영화상의 올해 후보작(자)에 사람들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청룡영화상 제공 |
제35회 청룡영화상, 영화를 영화에 의한 영화를 위한 '진짜' 시상식되길
[더팩트ㅣ성지연 기자] 바야흐로 시상식의 계절, 연말이다.
연말 행사와 관련된 각종 보도자료를 정리하면서 문득 지난해 이맘때를 회상한다. 작년 겨울에도 마찬가지로 각종 시상식을 위한 수많은 기사를 썼고 매서운 날씨에 현장에서 만난 동료들은 파김치가 된 얼굴로 서로를 동정했다.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내년엔 올해보다 여유로울 거야'라는 막연한 인사말로 서로를 위로하곤 했다.
견디기 힘든 피로였지만, 화려한 시상식 분위기는 언제나 기분 좋은 설렘을 선물했다. 그 기분을 위로 삼아 한 해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유독 올해는 시작부터 힘이 빠진다. 굳이 그 주범을 지목하자면 지난 20일 열린 제52회 대종상 영향이 크다. 이는 비단 필자뿐 아니라 동료 기자들 또한 마찬가진다. 올해 '베테랑'과 '암살'이 쌍끌이 천만 흥행기록을 세우며 한국영화 부흥기를 누렸던 것과 비교하면 정반대의 '맥 빠짐'이다.
'진행부터 대리수상까지, 유독 바빴던 올해 대종상 진행자 한고은과 신현준' 제52회 대종상영화제 사회자로 나선 배우 한고은과 신현준. 올해 대종상영화제는 수상작(자)에 지명된 후보들이 대부분 불참해 과반수 수상이 대리수상으로 이뤄지는 촌극을 만들었다. /남윤호 기자 |
반세기를 넘긴 대종상은 한국 영화 시상식의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한다. 매년 개봉한 국내영화를 총정리하는 교두보 역할을 해왔고 한해 한국영화 농사를 평가하는 기준점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근래 크고 작은 논란으로 몸살을 앓더니 올해는 주최측이 '불참 배우 수상 취소'란 무리수를 두며 스스로 오랜 역사와 위엄을 한 번에 무너뜨렸다.
대종상 주최 측은 결국 배우들이 대거 불참한 텅텅 빈 시상식에서 '그들만의 축제'란 촌극을 연출했다. 영화계뿐 아니라 모든 시청자와 영화팬들의 눈총을 한몸에 받아야 했다. 해프닝 후 일주일 만에 열리는 청룡상 시상식에 쏠린 기대와 무게가 더 커진 것은 이 때문이다.
'대종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청룡영화상' 26일 오후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열리는 청룡영화상. 논란을 겪은 대종상으로 올해 청룡영화상 수상후보(작)엔 사람들의 관심이 지난해보다 더욱 쏠리고 있다. /청룡영화상 제공 |
청룡영화상을 향한 기대가 남다른 것은 대종상의 실패가 전부는 아니다. 지난해 청룡영화상의 공정한 심사결과가 많은 이들의 기대를 충족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난해 열린 제35회 청룡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의 주인공은 파격, 그 자체였다.
지난해 대종상이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의 손예진에게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안긴 것과는 달리 청룡영화상은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독립영화 '한공주'(감독 이수진)의 주연배우 천우희에게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안겼다. 청룡영화상이 선택한 '무명 여배우'의 수상은 파장이 컸다. 사실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는 조심스럽게 '주연상 감'으로 언급된 천우희였지만, 신인과 다름없는 그가 진짜 트로피의 주인공이 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특히 지난해 천우희와 어깨를 나란히 한 여우주연상 후보는 전도연 손예진 김희애였기에 더욱 그랬다.
지난해 4월 개봉해 국내외 영화상을 휩쓴 독립영화 '한공주' 주연배우 천우희는 성폭행 피해자 여고생 공주로 분해 성폭행 피해자가 겪는 2차 피해를 적나라한 묘사 안에서 실감나게 연기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무비꼴라쥬 제공 |
천우희는 지난해 개봉한 영화 '한공주'에서 집단 성폭행을 당한 여고생 한공주를 연기했다. 성폭행 피해자 한공주로 분한 천우희는 공허한 표정과 날선 눈빛연기로 우리 사회의 모순된 현실,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성폭행 피해자가 겪는 2차 피해의 절망감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그리고 청룡영화상은 배우의 이름값보다 발전 가능성에 무게를 둔 명확한 수상기준을 통해 그를 '무명배우'에서 '여배우'로 거듭나게 기회를 제공했다.
수상 후 얼떨떨한 표정으로 무대에 오른 천우희는 이내 오열했다. 그는 수상소감으로 "유명하지 않은 제가 이렇게 상을 탔다"라며 "독립영화로 이렇게 상을 받다니 믿기지 않는다. 앞으로 포기하지 않고 연기하라는 뜻으로 알고 더욱 열심히 하겠다"는 소감을 밝혀 또 한번 화제가 됐다.
당시 그의 수상은 본인뿐 아니라 독립영화 '한공주'의 제작진에도 큰 기쁨이었다. 트로피를 전달하는 진행자 김혜수까지 천우희의 눈물에 눈시울을 붉혔다. 선후배 여배우의 눈물은 보는 이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며 명장면을 연출했다. 동시에 시상식 기사를 실시간으로 처리하던 취재기자들에게도 청량제 같은 '시원한' 수상결과였다. 신인 여배우의 수상 당시 청룡영화상을 모니터링하는 기자들은 자신들의 SNS를 통해 천우희의 수상을 함께 축하하며 감동을 나누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천우희의 의미있는 오열과 수상소감. 지난해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트로피의 영예를 안은 천우희는 무명배우로서 당당히 이름을 알리며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제35회 청룡영화상 방송캡처 |
지난해 청룡영화상이 준 신선한 감동의 이면에는 우리 영화계의 씁쓸한 현실도 녹아 있다. 영화 시상식에서 우수한 연기력을 보인 배우가 트로피를 품에 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너무도 당연한 일에 감동을 했기 때문이다. 연기를 잘한 천우희의 수상결과에 감동했다는 건 그만큼 그간의 시상식이 공정한 수상결과를 내놓지 못한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영화 시상식이라는 게 뭔가. 1년간 개봉한 한국영화를 정리하며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함과 동시에 더 나은 한국영화를 만들기 위한 축제의 자리가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시상식의 규모가 커지고 해를 거듭할수록 주최 측과 소속사 영화사 등의 이해관계로 얽히고설켜 어느새 영화인에겐 축제가 아닌 '부담'으로, 결과를 바라보는 관객들에겐 엉터리 행사로 자리하는 일이 어느새 '당연한 일'이 돼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그래서 유독 천우희에게 트로피를 안겼던 청룡상은 올해도 관객과 영화인들을 설레게 한다. 올해 청룡상은 지난해처럼 여우주연상 후보로 지명된 이들 중 '새로운 얼굴'을 찾아볼 수 없지만, 대종상이 규모가 큰 작품으로 수상작(자)을 꾸린 것과는 달리 다양한 작품이 지명됐다.
올해 청룡영화상 수상후보로 지명된 최우식 이정현 권소현 정재영. 예술영화 장르에서 새로운 시도와 변신을 꾀한 작품들이 대거 청룡영화상 수상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영화 '거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마돈나' 스틸 |
예술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연 이정현이 여우주연상 후보로, 독립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정재영이 남우주연상 후보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신인남우상 후보엔 예술영화 '소셜포비아'와 '거인'의 변요한 최우식이 각각 지명됐다. 신인여우상 후보 또한 예술영화 '마돈나'의 권소현, 미스터리물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박소담이 이름을 올렸다.
대종상과 비교해 풍성한 작품과 다채로운 장르로 꾸려진 청룡영화상의 상차림은 올해도 전년도만큼 신선하고 영양가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제2의 천우희를 예감하게 하는 반짝거리는 배우들의 이름이 기분 좋은 결과를 예고하고 있다.
2015년 극장가는 흥행성과 작품성을 두루 갖춘 한국영화로 '쌍천만'의 기쁨을, 골라보는 재미를 두루 느낄 수 있었던 '충무로 황금기'였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종상은 그런 이들을 축하해주기엔 작고 초라한 그릇으로 실망과 탄식만 안겼다.
청룡영화상이 '선배 시상식'격인 대종상의 실패를 거울삼아 공정한 수상결과로 실추된 한국영화계의 위상을 되찾아주길 바란다. 영화인들의 열정과 노력이 소신 있는 선정 결과로 나타나 모두의 축하를 받았으면 한다. 그래서 2016년은 더욱 풍성한 한국영화의 해로 마무리 되길 기대한다. 더불어 피곤에 절어 야근하는 기자들에게도 뿌듯한 미소와 '쓸 맛 나는' 기삿거리를 안겨주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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