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연의 무비무브] 택시에서 만난 아저씨와 아가씨의 '영화 보는 법'
입력: 2015.08.27 11:03 / 수정: 2015.08.27 13:37

어떤 영화, 좋아하세요? 1000만 영화가 많아진 요즘, 어딜 가나 여름 대작의 흥행과 관련된 대화를 쉽게 들을 수 있다./영화 포스터
'어떤 영화, 좋아하세요?' 1000만 영화가 많아진 요즘, 어딜 가나 여름 대작의 흥행과 관련된 대화를 쉽게 들을 수 있다./영화 포스터

"아가씨는 어떤 영화 좋아합니까?"

필자의 나쁜 습관을 꼽으라면 열 손가락이 모자라지만, 그중 가장 최악은 택시를 보면 본능처럼 허겁지겁 타는 것이다. 24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던 기자 초년병 시절,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숨막히는 취재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일분 일초라도 빨리 집에 가려는 마음이 간절했다. 일단 택시를 무조건 잡아타는 게 일종의 생존법이었고 수년이 지난 지금도 습관처럼 굳어졌다. 그래서 동료 영화 기자나 홍보사 직원 다음으로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되는 사람이 바로 택시 아저씨다.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 개최 기자 간담회가 끝난 뒤 어김없이 도로변 가까이에서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았다. 퇴근 시간이라 차량으로 꽉꽉 막힌 도로였지만, 그래도 택시 안이란 생각에 안도했다. 다만 과묵한 기사였으면 하고 기도했다. 그날 컨디션이 그랬다. 하지만 인상 좋고 살가운 그분은 여지없이 내게 말을 걸어왔고, 결국 '조용한 퇴근길'은 포기해야 했다.

택시 아저씨는 "어서오세요" 인사와 함께 속사포로 말을 이어갔다. 굳이 묻지 않았어도 그가 60대 초반인 것, 기자와 비슷한 또래의 딸이 있다는 것, 쉬는 날엔 단골 극장으로 영화를 보러 가는 게 취미라는 것까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특히 필자가 두 손에 가득 든 영화관련 보도자료를 보더니 "영화를 좋아하나 봐요"라며 관심을 보였다.

1000만 영화가 익숙한 지금은 2015년. 과거 다양한 이름의 영화관이 서울 시내 곳곳에 위치했지만, 현재 영화관은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남윤호 기자
1000만 영화가 익숙한 지금은 2015년. 과거 다양한 이름의 영화관이 서울 시내 곳곳에 위치했지만, 현재 영화관은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남윤호 기자

그 바람에 대화는 자연스럽게 영화로 이어졌다. 애초 조용한 퇴근길을 원했지만, 그가 젊은 시절 서울 시내를 누비며 다녔던 피카디리, 대한극장, 단성사와 관련한 에피소드에 귀가 쫑긋해졌다. 과거와 달리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이 대부분인 지금도 아저씨는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극장을 찾는다고 했다. 관악구 신림동 단골 극장, 선호하는 자리, 즐겨 먹는 팝콘 종류까지 상세히 설명하는 그분의 얼굴에 활기가 넘쳤다.

말을 듣다 보니 진정한 '씨네필'(영화팬)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반가워 "작년부터 올해까지 가장 재미있게 본 작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원치않는 응답이어서 난감했다. 지난해 필자가 아쉬운 부분을 지적했던 1000만 영화가 아저씨의 '최고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그 영화를 보고 나서 국내 영화를 더 많이 챙겨보고 있다"고 즐거워했다. 대답을 들은 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내게 이번엔 그가 추천할 만한 영화를 물었다. 개인적 견해를 담아 영화 한 편을 언급했고 그는 "아직 못 봤는데 아가씨가 재미있다고 하니 이번 주엔 꼭 봐야겠다"며 좋아했다.

그리고는 지금의 아내와 종로 단성사에서 처음으로 봤던 영화, 전세 대출을 받은 날 온가족이 함께 봤던 영화, 자녀가 생일선물로 예매해줬던 영화 등을 꼽았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즐겁게 털어놨다.

택시에서 한 시간 남짓 이어진 영화 이야기. 기사님이 목적지로 향하며 들려준 다양한 영화 이야기는 영화를 영화로 보는 방법을 압축해놓은 듯했다. /더팩트 DB
택시에서 한 시간 남짓 이어진 영화 이야기. 기사님이 목적지로 향하며 들려준 다양한 영화 이야기는 '영화를 영화로 보는 방법'을 압축해놓은 듯했다. /더팩트 DB

택시에서 내린 뒤 '최악의 영화'와 '최고의 영화'에 관해 생각했다. 보통 때 같으면 별점 한 개를 줬던 작품에 '최고'라는 평가를 내린 아저씨와 논쟁을 벌일 수도 있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은 한마디도 못한 채 "이번 주에도 즐거운 영화 관람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기사를 쓰는 게 직업이 되고부터 과연 영화를 영화답게 즐겼던 적이 있었을까.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를 분석하고 특정 시기에 개봉하는 이유, 제작비, 손익분기점, 1000만 영화의 흑과 백 등을 염두에 둬야 한다. 말그대로 전투적으로 영화를 관람했고 어두운 극장에서 종이와 펜을 들고 무언가를 적었다. 웃음이 터져야 하는 포인트에 웃지 않았고 감동적인 순간에도 울 수가 없었다. 모든 작품을 객관화 할 수는 없지만 이러니 택시 아저씨가 '최고'라 평가한 작품을 '최악'이라 평가할 수도 있었던 셈이다.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관객과의 대화. 어떤 영화는 누군가에겐 최고의 작품이, 누군가에겐 최악의 작품이 되기도 한다. /더팩트 DB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관객과의 대화. 어떤 영화는 누군가에겐 '최고의 작품'이, 누군가에겐 '최악의 작품'이 되기도 한다. /더팩트 DB

분명한 것은 내게 '최악'인 작품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다음 한 주를 활기차게 일하게 만드는 원동력이고 가족과 추억을 만들어주는 연결고리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통이라면 승객과 기사일 뿐인 20대 아가씨와 60대 아저씨가 택시안에서 친근감있게 이야기 꽃을 피우게 된 것도 이런 '시각의 차이' 때문이다. 서로 생각의 다름을 인정한다면 '최고'와 '최악'은 차라리 무의미하다.

네티즌 평점과 평론가 평점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소위 흥행작 혹은 1000만 명을 동원한 대박 영화는 그만큼 많은 관객이 선택했다는 의미다. 영화를 향한 가장 확실한 평가는 관객의 몫이기 때문이다. 아저씨가 언급한 1000만 관객 영화는 확실히 '최고'임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다양한 부분을 염두에 두고 고민해야 하는 아가씨 또한 앞으로도 계속 '꼬장꼬장'한 시각으로 영화를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이런 날선 비판이 때론 맨 뒷줄, 구석 자리를 선호하는 아저씨에게 보다 양질의 작품을 볼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소신 때문이다.

[더팩트ㅣ성지연 기자 amysung@tf.co.kr]
[연예팀ㅣ ssent@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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