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인터뷰] '화장' 임권택, '거장'에 사표를 던지다
입력: 2015.04.23 12:00 / 수정: 2015.04.22 15:13

지난 9일 개봉한 영화 화장을 연출한 임권택 감독. 지난 4월 첫째 주 서울 종로구 사간동 카페에서 임권택 감독을 만나 102번째 연출작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눴다./김슬기 기자
지난 9일 개봉한 영화 '화장'을 연출한 임권택 감독. 지난 4월 첫째 주 서울 종로구 사간동 카페에서 임권택 감독을 만나 102번째 연출작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눴다./김슬기 기자

임권택 감독, '거장' 타이틀이 불편한 이유

"나한테 '거장'이라고 하지 말아요."

4월 첫째 주, 꽃샘추위가 옷깃을 여미게 했던 오후 서울 종로구 사간동의 고즈넉한 카페에서 붉은색 터틀넥을 입은 임권택(79) 감독을 만났다.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연출작 '화장'이 개봉을 코앞에 뒀던 시기다. 처음 만난 임권택 감독은 개봉을 앞두고 자신의 작품을 궁금해하는 이들을 위해 빡빡한 인터뷰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오전부터 진행된 인터뷰, 으슬으슬한 날씨가 80살 가까운 '노인'을 피곤하게 하지 않았을까 우려했지만, 기자의 기우였다. 5분도 채 쉬지않고 다음 취재진을 부르는 임권택 감독은 본인이 입은 붉은색 상의만큼 강렬한 생기를 뿜어냈다.

국내 극장가가 미국에서 건너온 히어로에 시선을 뺏긴 요즘 반세기 동안 영화를 만들어온 늙은 감독이 생각난다. 늙은 감독과 나눈 소박하지만, 깊은 맛을 내는 이야기가 그립다는게 더 정확하다. '화장'으로 돌아온 임권택 감독과 함께한 이야기를 <더팩트>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거장(Master)이라 불리는 임권택 감독. 정작 본인은 거장이란 타이틀로 자신을 수식하는 것을 지양한다고 말했다./김슬기 기자
'거장'(Master)이라 불리는 임권택 감독. 정작 본인은 '거장'이란 타이틀로 자신을 수식하는 것을 지양한다고 말했다./김슬기 기자

'거장'(마스터:master). 사람들은 반세기 넘게 영화를 만들어 온 임권택 감독의 이름 앞에 흔히들 '거장'이란 단어를 붙이곤 한다.

거장이란 예술·과학 따위의 일정 분야에서 특히 뛰어난 사람을 의미하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이름 앞에 이 수식어가 붙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눈치다.

"나는 '거장'이란 단어가 싫어요. 그냥 영화가 좋아서 지금까지 감독생활을 했던 거고 운이 좋아서 직업으로 삼았던 거죠. 다른 일을 할줄 아는 게 없었으니까. 그런데 내 이름 앞에 '거장'이나 혹은 다른 수식어가 붙어버리면 감독으로 사는 게 꽤 고달파요. 사람들이 나를 그런 수식어에 빗대어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만든 작품에도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생기는 거죠."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화장. 영화는 죽어가는 아내와 젊은 여자 사이에 고민하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를 담았다./명필름 제공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화장'. 영화는 죽어가는 아내와 젊은 여자 사이에 고민하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를 담았다./명필름 제공

영화를 사랑하기에 '거장'이란 수식어도 부담스러운 임권택 감독은 80살 노인이 된 마당에 거짓스러운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자 '화장'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화장'은 그간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지난 9일 개봉한 영화는 제28회 이상 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죽어가는 아내와 젊은 여자 사이에 놓인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죽어가는 아내는 배우 김호정, 젊은 여자는 김규리, 갈등하는 중년 남성은 안성기가 연기해 국내·외 다양한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50년 넘게 감독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거짓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들었어요(웃음). 그러던 차에 김훈 감독의 작품을 명필름에서 함께 작업하지 않겠냐는 제의가 들어왔고요. 조직폭력배 이야기, 미국영화 베끼기는 그만하고자 하는 마음이랄까."

임권택 영화다 라는 틀을 깨고 싶었어요 영화 화장을 통해 스스로의 색깔을 변화시킨 임권택 감독./김슬기 기자
"'임권택 영화다' 라는 틀을 깨고 싶었어요" 영화 '화장'을 통해 스스로의 색깔을 변화시킨 임권택 감독./김슬기 기자

그래도 '취화선' '천년학' '춘향뎐' 등 임권택 감독이 만들어 온 작품들을 생각해 볼 땐 젊은 여자를 욕망하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는 예상외의 파격일 수밖에 없다.

"내가 그동안 판소리나 역사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서 영화를 만들었더니 '아, 저건 임권택 영화다'하는 틀이 생기더라고요. 한 직업을 오래 하다보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보단 스스로 그 틀을 벗어나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야 내가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

영원한 현역 임권택 감독. 영화가 좋았고 운도 좋아서 50년이 넘는 시간동안 영화감독으로 살았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임권택 감독./김슬기 기자
영원한 '현역' 임권택 감독. 영화가 좋았고 운도 좋아서 50년이 넘는 시간동안 영화감독으로 살았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임권택 감독./김슬기 기자

영화가 좋아서 계속 이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임권택 감독은 '화장'도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살아있음을 느꼈다고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본인은 '거장'이길 거부하지만, 덤덤한 목소리 안에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묵직한 '마스터'의 고집은 어쩔 수 없다.

"몸에 익은 것을 버릴 때, 그런 작품을 고생 끝에 만들었을 내가 감독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80살 먹은 사람이 만든 영화 같지 않구나' '임권택이 만든 영화 맞아?' '젊은 감독이 연출한 거 같네!' 이런 평가를 들으면 스스로의 한계에서 벗어났구나 싶어서, 현장에 계속 있어도 되겠구나 싶어서…."

운이 좋아서 감독으로 살았다는 임권택 감독. 그는 영원한 현역이고 싶다./김슬기 기자
운이 좋아서 감독으로 살았다는 임권택 감독. 그는 영원한 '현역'이고 싶다./김슬기 기자

[더팩트ㅣ성지연 기자 amysung@tf.co.kr]
[연예팀ㅣ ssent@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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