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에서 단순하게 대립각을 형성했던 악녀들이 점차 개연성을 가지면서 몰입도를 높이는 캐릭터로 진화하고 있다. / 자료사진 |
[더팩트ㅣ김한나 기자] 안방극장은 악녀들의 세상이다. 하지만 예전과는 그 색깔이 전혀 다르다. 착하디 착한 주인공과 정반대에 서서 남자 하나 때문에 희번덕거리며 눈을 흘기는 악녀의 시대는 지났다.
드라마의 갈등 구조 속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인 것은 맞지만 예전처럼 여주인공을 빛나게 해주는 서브의 개념이 아닐 뿐더러 그들의 악행에도 나름의 이유들이 존재한다.
유치하게 극한까지 끌어 올라간 분노를 표출하지도, 수가 뻔히 보이는 음모로 자승자박의 길로 스스로 들어가는 일을 벌이지도 않는다. 브라운관 속 악녀들은 왜 달라졌을까.
KBS2 '트로트의 연인' 속 이세영이 맡은 박수인은 미모와 실력을 갖췄지만 엄마의 후광과 압박에 가려진 인생을 살아온 비운의 인물로 악역이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캐릭터다. / 제이에스픽쳐스 제공 |
◆ 진화한 나쁜 여자들, '악녀=서브' 고정관념 깨졌다
KBS2 월화드라마 '트로트의 연인' 속 박수인 역의 이세영은 미워할 수 없는 악녀다. 실력과 미모까지 겸비한 '엄친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과거 유명 가수였던 어머니 양주희(김혜리 분)의 꼭두각시 같은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가수가 되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했지만 사실 어머니의 강압과 압박에 기계처럼 걸어온 길이다. 여기에 여주인공 춘희(정은지 분)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 극중 두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그런 춘희에게 수인은 열등감을 가질 수 밖에 없을 터. 춘희와 대립각을 세우며 극에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이지만 자신 만의 사연으로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로 공감을 사고 있다.
이렇듯 드라마 속 악녀는 진화하고 있다. 부잣집 딸에 얼굴까지 예쁜 것처럼 가진 것 많은 악녀가 이유도 없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초라한 여주인공을 몰락 시키기 위해 궁지에 몰아 넣는 등의 현실감 없는 짓은 하지 않는다. 과거 '원래 못된 애'라는 전제 하에 감정이입되지 않는 악행을 저지르던 악녀가 업그레이드 됐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이런 악녀들이 판을 쳤다. '미스터Q' 송윤아, '진실' 박선영, '이브의 모든 것' 김소연, '명랑소녀 성공기' 한은정 등이 그 예다.
이들은 재력과 미모 재능까지 갖추고 있으면서 평범녀인 여주인공에 이해할 수 없는 자격지심을 발휘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를 사이에 두고 연적 관계라는 것 외에는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 말이다. 여주인공을 한 없이 착한 천사 캐릭터로 빛나게 할 뿐 이들의 캐릭터는 개연성을 상실했던 셈.
그러나 점점 악녀 캐릭터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다. 매서운 화장을 하거나 화려한 의상을 즐겨 입는 등 단편화된 이미지에 국한되던 악녀의 외형도 많이 변했다.
지고지순하고 착한 이미지 속에 악녀 본색을 감추고 있기도 한다.('세 번 결혼하는 여자 손여은, '기황후' 백진희 등) 단순히 남자의 마음을 사기 위한 악행을 넘어서 권력욕에 사로 잡힌 악녀('선덕여왕' 고현정, '야왕' 수애)도 생겨났다. 이들에게는 사랑도 권력을 잡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사랑에 목을 매던 과거 악녀와는 차원이 다르다.
악녀로 변할 수 밖에 없는 사연을 가진 여자들도 등장했다. '아내의 유혹' 장서희가 맡았던 남편을 빼앗긴 후 복수를 다짐하는 여자 민소희나 친자매같이 자란 장금(이영애 분)이에게 오래도록 연정을 품었던 민정호(지진희 분)를 빼앗긴 후 질투심에 사로잡힌 금영(홍리나 분) 등이 그렇다.
'미스터Q' 속 김희선을 괴롭히던 송윤아, '진실' 속 악녀 박선영, '이브의 모든 것' 속 채림의 연적이었던 김소연 등 과거 악녀는 매서운 화장에 개연성 없는 못된 짓으로 단순하게 그려졌다. / 각 방송 화면 캡처(자료사진) |
◆ 리얼리티 대세되자 악녀도 떴다
악녀가 점차 다변화되고 진화의 과정을 거치는 것을 두고 방송 관계자들은 '리얼리티'를 꼽는다.
한 드라마 제작 관계자는 "막무가내 형 악녀는 드라마를 자극적으로 그릴 수는 있어도 공감을 끌어내기는 힘들다는 점에서 요즘 트렌드인 리얼리티와는 동떨어진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점차 드라마의 완성도가 높아지면서 시청자들 역시 생생하게 살아있는 캐릭터를 선호한다. 캐릭터가 살아 있어야 극에 대한 몰입도가 높아지고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같은 맥락으로 대리만족을 언급했다.
그는 "대중들은 악녀 캐릭터를 통해 대리만족을 얻는다"며 "대리만족까지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캐릭터에 대한 공감과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에 개연성이 존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렇기 때문에 악녀 캐릭터는 과거와 달리 악해질 수 밖에 없는 사연과 배경이 좀더 탄탄히 그려질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악녀도 비중있게 다뤄지게 된다"고 덧붙였다.
물론 악녀가 업그레이드 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악녀의 미움을 받는 천사 캐릭터가 최종 승리로 끝난다는 점이다. 종국에는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는 불운한 악녀들에게 애정이 더욱 각별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