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법 규제·복잡한 행정절차에 신사업 추진 중단
네거티브식 규제·인센티브 제도 도입으로 기업 투자 유도해야
탄소중립에 대한 기업들의 투자 수요가 높아지고 있지만 해묵은 규제가 발목을 잡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사진은 예산군의 태양광 발전 설비의 모습.(기사 내용과 무관) /더팩트DB |
산업 간 경계가 사라지는 빅블러(Big Blur·경계 융화 현상)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혁신을 가로막는 규제가 성장 둔화로 이어진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낡은 규제를 과감하게 혁파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여러가지 규제 완화 방안이 언급되고 있지만, 대내외 운영 상황과 이해관계 대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창립 20주년을 맞은 <더팩트>가 경제·산업에 반드시 필요한 규제 혁신을 재계·유통·금융의 틀에서 짚어보고 문제를 진단한다. 규제 혁신, 어떤 변화가 있었고, 또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지를 '혁신이 답이다'가 11회 특별기획 시리즈로 조명한다. <편집자주>
[더팩트 | 김태환 기자] #사례1. A사는 공장에서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시멘트 원료로 재활용하는 CCUS(탄소 포집·활용·저장)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문제는 현행 '폐기물관리법'에는 포집된 이산화탄소는 폐기물로 분류돼, 폐기물 관련 인·허가 취득이 필요했다. 여기에 현행법상 재활용 용도도 일부 화학제품으로만 국한돼 건설소재인 시멘트에 이산화탄소를 재활용할 수 없었으며, 허가 요건을 모두 갖추려면 2년 가까이 소요됐다. A사는 행정적 허가 요건을 다시 갖춰 인허가를 받으려 지방자치단체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했지만, 주민 기피시설이라는 이유로 부정적 통보를 받아 산업단지 입주가 제한됐다. A사는 해당 사업의 추진을 중단했다.
#사례2. 배터리사업을 진행해오던 B사는 기존 사업을 확장해 '전기차 사용 후 배터리 재활용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하지만 '사용 후 배터리'는 순환자원이 아니라 폐기물로 분류되기에 '폐기물처리업 인허가'를 추가로 받아야 했다. 단계별로 적용되는 법규만 하더라도 △대기환경보전법 △전기전자제품 및 자동차의 자원순환에 관한 법률 △자동차관리법 △전기생활용품안전법 △폐기물관리법 등 무려 5개다. 해당 요건과 법률 리스크를 모두 반영한 뒤 재사용 여부를 평가할 경우, 배터리 검사 비용만 1000만 원에 달했다. 신품 배터리가 약 2000만 원임을 고려한다면, 재사용 배터리가 신품이랑 가격이 비슷해져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꼴'이었다.
세계적인 기후 변화로 탄소중립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경제계에서는 해묵은 규제들이 기업의 친환경 기술·탄소중립 정책 추진 과정에 발목을 잡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이나 제도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다 행정절차가 까다롭고 포지티브식 규제로 인해 기업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는 지적이다. 단순히 탄소중립 관련 규제 완화를 넘어서서 인센티브 제공 등 기업의 투자 유인을 적극 지원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31일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지난달 5월 국내 제조기업 302개사를 대상으로 '산업계 탄소중립 관련 규제 실태와 개선과제'를 조사한 결과 국내기업 10곳 중 9곳이 '규제로 인해 탄소중립 추진이 어렵다'고 답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탄소중립 기업활동 추진과정에서 규제애로가 '있었다'고 답한 기업은 92.6%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65.9%는 '규제로 시설투자에 차질'을 겪었다고 답했으며 '온실가스 감축계획 보류'(18.7%), '신사업 차질'(8.5%), 'R&D 지연'(6.9%) 등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애로사항 유형으로는 '복잡‧까다로운 행정절차'(51.9%)가 가장 많았고, '법‧제도 미비'(20.6%), '온실가스 감축 불인정'(12.5%), '해외기준보다 엄격'(8.7%), '신사업 제한하는 포지티브식 규제'(6.3%) 순으로 집계됐다.
규제가 탄소중립 이행을 가로막는 분야는 △CCUS △전기차 사용후 배터리 △에너지 슈퍼스테이션 △폐플라스틱 열분해유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 △대기총량규제 등에서 나타난다. 대부분 재활용 가능한 자원이 폐기물로 분류되거나, 관련법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허가가 복잡해지는 것이 원인이다.
앞선 사례처럼 CCUS에서는 포집된 이산화탄소가 폐기물로 적용돼 다른 용도로 사용이 불가능하고, 산업집적법상 이산화탄소 재활용 시설이 폐기물처리시설로 분류돼 산업단지 입주가 어렵다. 전기차 사용후 배터리 역시 순환자원이 아니라 폐기물로 분류되면서 폐기물관리법 인허가 의무가 필요하다.
에너지 슈퍼스테이션의 경우 현행법상 위험물안전관리법과 액화석유가스법상 주유소나 LPG충전소 내 설치 가능한 건축물에 '연료전지'가 포함돼 있지 않아 전기충전 시설을 설치할 수가 없다. 폐플라스틱 열분해유는 폐기물관리법상 제조규격이 인화점 30도 이상인데, 열분해유의 경우 인화점이 10~20도 수준이라 제조규격 충족이 어려운 실정이다.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의 경우 상쇄배출권(KCU) 제출 한도를 배출권거래제(ETS) 할당량이 10%에서 5%로 축소됐다. 해외에서 탄소감축을 진행한 뒤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에서 탄소배출권(CER)을 발급받을 경우, 이를 탄소감축으로 국내서도 감축분을 상쇄시킬수 있는데, 이 비율이 줄어든 것이다. 특히 지난 2017년에는 기존 5% 상쇄 비중을 10% 늘렸는데, 2018년부터 다시 5%로 축소하는 등 정책의 혼선이 나타나면서, 기업들이 관련 사업을 주저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이 지난 11일 서울 중구 대한상의회관에서 열린 '제4회 탄소중립과 에너지 정책 세미나'에서 개회사를 통해 탄소중립 정책을 충실히 이행하는 기업에 대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발언하고 있다. /대한상의 제공 |
기업들 사이에서는 정부 규제 개선이 포지티브 규제가 아닌 네거티브(금지된 행위가 아니면 모두 허용) 규제, 규제 샌드박스(일정 범위 내에선 자유롭게 활동) 도입 등으로 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탄소중립 정책을 수립하면서 기존 법과의 충돌을 하나하나 다 개정한다면 수년 이상이 소요되는데, 변화하는 시대 흐름을 따라가기에는 너무 늦어질 가능성이 높다"면서 "탄소중립이나 친환경 기술개발 등에 대해 네거티브 방식의 규제 도입과 규제 샌드박스 확대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업들이 탄소중립 정책에 적극 뛰어들 수 있도록 혜택을 제공하는 '인센티브 제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실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앞서 지난 11일 대한상의 회장 자격으로 '제4회 탄소중립과 에너지 정책 세미나'에 참석해 "시장에서는 탄소 감축 성과에 대한 보상이 좀 더 주어지게 되면 영향력 있는 기업이 앞장설 수 있을 것"이라며 "누구에게 얼마나 탄소감축을 맡길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사회 전체의 탄소감축 크기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단기적 규제 완화 보다는 장기적인 대책 수립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안혜영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원은 "기업의 친환경 활동 실행과정에서 시행착오가 불가피하다"면서 "신정부 출법으로 기업 환경규제 완화 가능성이 있지만,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서는 한시적 규제 완화보다는 친환경 활동을 판별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 구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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