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반도체 해법 찾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유럽 출장 마치고 귀국
유럽 출장을 마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8일 오전 9시 30분쯤 서울 강서구 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를 통해 귀국해 차량 탑승 전 취재진을 향해 눈인사를 하고 있다. /이선화 기자 |
[더팩트ㅣ김포공항=이성락·이선영 기자] 11박 12일간의 유럽 출장을 마치고 18일 귀국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초격차 기술 확보'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이날 오전 9시 30쯤 서울 강서구 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를 통해 입국했다. 짙은 남색 정장을 입고 취재진 앞에 선 이재용 부회장은 이번 출장과 관련해 개인적인 소회를 밝힌 뒤 준비된 차량을 타고 공항을 빠져나갔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7일 유럽 출장길에 올랐다. 그간의 '잠행 모드'를 깨고 지난해 12월 중동 방문 이후 6개월 만에 글로벌 현장 경영을 재개한 만큼, 출장 동선에 대한 재계 안팎의 기대감은 높았다. 특히 이재용 부회장이 450조 원에 달하는 투자 결정을 내린 직후인데다, 지난달 25일 투자의 의미와 관련한 취재진의 질문에 "목숨 걸고 (투자)하는 것"이라며 비장함을 내비친 터라, 이번 출장 성과에 대한 주목도가 더욱더 높아진 상태였다.
출장 기간 동안 이재용 부회장의 모든 일정이 공개된 건 아니다. 다만 이재용 부회장의 입을 통해 빈틈없는 일정을 소화했다는 점을 엿볼 수 있었다.
이재용 부회장은 "(유럽 출장은) 좋았다. 고객들도 만나고, 유럽에서 연구하고 있는 연구원과 영업·마케팅을 담당하는 직원들, 헝가리 배터리 공장도 방문하고 BMW 고객도 만났다"며 "자동차 업계의 변화, 급변이라고 해야 할 만한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고, 제일 중요했던 ASML과 반도체 연구소에서 앞으로 차세대, 차차세대 반도체 기술이 어떻게 되는지 그런 걸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에선 못 느꼈는데, 유럽에 가니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훨씬 더 느껴졌다"며 "시장의 여러 가지 혼동과 변화, 불확실성이 많은데 저희가 할 일은 좋은 사람을 데려오고, 조직이 그런 예측할 수 있는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유연한 문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끝으로 이재용 부회장은 '초격차 기술 확보'에 대한 중요성을 언급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도 기술 같다. 열심히 하겠다"고 힘줘 말했다.
앞서 삼성전자가 외부로 공개한 출장 일정을 살펴보면, 이번 이재용 부회장의 출장은 '반도체'에 초점이 맞춰졌다. 독보적인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달 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삼성 평택 반도체 공장을 방문했을 당시에도 '반도체 동맹'을 공고화했다. 지난달 30일에는 방한 중인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반도체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1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총리 집무실에서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와 만났다. 이재용 부회장과 뤼터 총리가 만난 건 2016년 9월 이후 6년 만으로, 두 사람은 △최첨단 파운드리 역량 강화를 위한 협력 확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문제 해소 등 포괄적인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네덜란드는 반도체 연구개발부터 설계, 장비, 전자기기 완제품까지 관련 산업 생태계가 고루 발전한 국가로, 이번 일정은 이재용 부회장이 반도체 산업의 핵심 국가인 네덜란드와의 협력을 강화했다는 데 의미가 크다. 특히 이재용 부회장은 품귀 현상을 빚고 있는 ASML 장비를 삼성전자가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재용 부회장은 같은 날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있는 ASML 본사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피터 베닝크 CEO, 마틴 반 덴 브링크 최고기술책임자(CTO) 등 경영진을 만나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ASML은 7나노미터 이하 초미세 공정 구현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하고 있으며, 재계는 이재용 부회장의 이번 회동으로 향후 장비 수급에 큰 문제가 발생하진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과 ASML 경영진은 △미래 반도체 기술 트렌드 △반도체 시장 전망 △EUV 노광장비의 원활한 수급 방안 △중장기 사업 방향 등에 대해 폭넓게 협의했다.
이와 관련해 삼성전자는 "반도체 연구개발 및 투자를 확대하고, ASML과의 기술 협력 강화 등을 통해 EUV를 비롯한 차세대 반도체 생산 기술을 고도화시킬 것"이라며 "파운드리 분야의 경쟁력을 키워 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초격차'도 더욱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유럽 출장 일정을 마치고 서울 강서구 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를 통해 귀국해 짐을 찾으며 어깨 운동을 하고 있다. /이선화 기자 |
이재용 부회장은 이번 출장에서 벨기에 루벤에 있는 imec도 방문했다. 1984년 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 3국이 공동 설립한 유럽 최대 규모의 비영리 종합 반도체 연구소인 imec은 삼성전자를 비롯한 전 세계 반도체 기업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반도체 설계, 공정기술, 소재, 장비 등 반도체 분야 외에도 인공지능(AI), 생명과학, 미래 에너지 등 다양한 첨단 분야의 선행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루크 반 데 호브 imec CEO를 만나 반도체 분야 최신 기술과 연구개발 방향 등을 논의했다. 또 AI와 바이오·생명과학, 미래 에너지 등 imec에서 진행 중인 첨단 분야 연구과제에 대한 소개를 받고 연구개발 현장을 살폈다.
재계에서는 이재용 부회장이 긴 출장 일정을 소화하고 돌아온 만큼, 조만간 인수합병(M&A) 성과를 내놓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지난해 삼성전자는 3년 안에 의미 있는 M&A를 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현재까진 차량용 반도체 회사를 인수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이날 이재용 부회장은 M&A 진행 상황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일각에서는 이재용 부회장이 최근 '반도체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조만간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삼성전자는 이달 중 테일러시 파운드리 공장 착공식을 진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네덜란드 총리와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처럼 경제 복합 위기 속 '민간 외교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앞으로 활동 보폭을 더욱더 넓힐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재용 부회장은 바이든 미국 대통령, 트럼프·오바마·부시 전 대통령,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 반 자이드 UAE 대통령, 모디 인도 총리 등 탄탄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보유한 것으로 유명하다. 재계는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에 힘을 싣는 차원으로 이재용 부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활용될 여지도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의 미래 경쟁력뿐만 아니라 국가적 경제 위기 극복에 있어 고민이 많은 이재용 부회장의 현장 경영 행보는 갈수록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rocky@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