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월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재수감된지 7개월여 만에 가석방으로 풀려난다. /더팩트 DB |
재계 "특별사면 없이 이재용 글로벌 행보, 언감생심"
[더팩트 | 서재근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이 확정됐다. 지난 1월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재수감된 지 7개월여 만이다.
재계에서는 '총수 부재'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섞인 반응도 나오지만, 아쉽다는 평가에 무게가 더 쏠린다. 경영 활동에 제약이 남아 있는 상태로는 글로벌 반도체 기업 간 경쟁 심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등 대내외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9일 법무부 가석방심사위원회는 이날 오후 2시부터 과천 법무부 청사에서 4시간 30분여 동안 회의를 거쳐 이 부회장의 가석방을 결정했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도 가석방심사위원회의 결정을 최종 승인했다. 박 장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국가적 경제상황과 글로벌 경제환경에 대한 고려차원에서 이 부회장이 (가석방) 대상에 포함됐으며 사회의 감정·수용생활 태도 등 다양한 요인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제상황에 대한 충분한 고려 끝에 내린 결정이라는 박 장관의 설명에도 재계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가석방은 '형 면제'가 아닌 형기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형기 내 재범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임시로 풀어주는 행정 처분으로 대통령의 권한으로 형벌을 면죄하는 사면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난 1월 18일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 부회장의 형기 종료일은 내년 7월 18일이다. 다시 말해 이 부회장은 이 시기까지 거주지는 물론 국내외 모든 동선에 제한을 받는다. 여기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관련 사건 등 별건으로 진행 중인 재판 일정까지 소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가석방과 사면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라며 "취업 제한 등 각종 제약 요소가 남아 있는 만큼 해외 일정을 소화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국내 사업장에서 치러지는 내부 행사에도 자유롭게 얼굴을 비추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경제범죄가중처벌법에 따른 취업제한 규정도 유지, 향후 5년 동안 경영활동에 직접 참여할 수 없다. 사실상 이 부회장의 '반쪽 복귀'가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재계에서는 가석방으로 출소하는 이재용 부회장이 취업제한 등 각종 제약에 묶여 제대로된 경영활동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해 5월 중국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는 이재용 부회장의 모습. /임세준 기자 |
경제계 안팎에서 사면을 촉구하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재계에 따르면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 등 국내 주요 경제단체장들은 오는 11일 홍남기 경제부총리를 만나 이 부회장의 사면을 건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손경식 경총 회장은 이달 초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부회장이 직접 외국 고위 의사 결정권자들을 만나 풀어야 할 문제가 많다"면서 "국가 경제라는 큰 틀에서 사면에 대한 긍정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변재일 더불어민주당 반도체특위 위원장 역시 지난달 언론 인터뷰에서 대만의 시스템반도체 경쟁력을 언급하며 "여기에 도전할 기업은 삼성밖에 없다. 삼성의 결심이 필요하다"라며 "총수의 결심 없이는 전략적 의사결정이 불가능한 만큼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창한 한국반도체산업협회(KSIA) 부회장은 "반도체 투자, M&A 등 큰돈이 드는 사안은 기업을 책임지는 누군가가 결정해야 한다. 최고 결정권자인 이 부회장의 부재로 삼성의 의사결정 동력이 약해진 건 사실"이라고 우려했다.
지난 4월에도 재계 5개 단체장들은 한목소리로 "점점 치열해지는 반도체 산업 경쟁 속에서 경영을 진두지휘해야 할 총수의 부재로 과감한 투자와 결단이 늦어진다면 그동안 쌓아 올린 세계 1위의 지위를 하루아침에 잃을 수도 있다"며 "기업의 본분이 투자와 고용 창출로 국가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는 데 있다고 본다면 이 부회장이 국가와 국민에게 헌신할 수 있도록 (문재인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달라"고 촉구했다.
실제로 '총수 부재'라는 악재 속에 삼성전자의 대규모 투자는 2017년 하만 인수 이후 수년째 자취를 감췄다. 지난 5월 삼성이 공식화한 170억 달러 규모의 미국 신규 파운드리 공장 설립 계획도 두 달 넘게 부지 선정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 공백이 장기화하면서 삼성전자의 대규모 투자는 2017년 하만 인수 이후 수년째 자취를 감췄다. /남용희 기자 |
반면, 글로벌 경쟁사들은 앞다퉈 글로벌 시장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직접 경쟁하는 대만의 TSMC는 지난 4월 향후 3년간 파운드리 사업에 10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5월에는 미국 애리조나주에 반도체 생산 공장 5곳을 추가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의 인텔은 반도체 생산능력 확대 전략의 일환으로 글로벌파운드리(GF) 인수를 추진 중이다.
총수의 경영 참여 여부가 기업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력은 국내 4대 그룹 수장의 최근 행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현대자동차그룹의 지난 4월을 기점으로 올해 들어서만 세 차례에 걸친 미국 출장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기업 가치가 11억 달러(약 1조2500억 원)에 달하는 글로벌 로봇 전문 업체 '보스턴다이내믹스' 인수를 매듭짓고, 최근에는 74억 달러(8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역시 지난 5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미국 출장길에 올라 글로벌 네트워크를 공고히 했다.
한 재계 고위 관계자는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부재 속에 조 단위 인수합병(M&A)이나 신규 투자를 신속하게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며 "삼성이 2017년 하만 인수 이후 이렇다 할 신규 투자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특히, 반도체 산업의 경우 글로벌 기업 간 파트너십이 매우 중요한 만큼 정부가 현실적인 경제 상황을 고려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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