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경기도 화성시 남양기술연구소를 방문한 취재진들이 가상현실을 활용한 디자인 품평을 체험하고 있다. /화성시=이성락 기자

현대·기아차,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 본격 가동 "자동차 개발 프로세스 혁신"

[더팩트ㅣ화성시=이성락 기자] 비가 추적추적 내린 지난 17일 오전 경기도 화성시 남양기술연구소를 찾았다. 회사 직원들과 함께 있더라도 보안 절차를 거치는 등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이곳은 현대·기아자동차(현대·기아차) 대표 연구개발(R&D) 센터다. 최근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가 본격 가동되면서 자동차 개발 방식의 전환이 이뤄지는 등 현대·기아차 R&D 혁신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버추얼 개발이란 다양한 디지털 데이터를 바탕으로 가상의 자동차 모델 혹은 주행 환경을 구축해 실제 부품을 시험 조립해가며 자동차를 개발하는 기존 과정을 상당 부분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자동차 디자이너가 원하는 대로 빠르게 디자인을 바꿔 품평을 진행하고, 실물 시제작 자동차에서 검증하기 힘든 오류 등을 빠르게 확인·개선하는 과정이다. 쉽게 말해 자동차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새롭게 도입된 첨단 검증 방식이다.

이날은 남양기술연구소 현대디자인동을 방문,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 중 가상현실(VR)을 활용한 '디자인 품평'과 '설계 검증 시스템'을 체험했다. 먼저 VR 디자인 품평을 위해 첨단 VR 헤드셋 HTC 바이브 프로와 VR 백팩을 착용했다. 해당 체험은 여러 취재진이 함께했다. 가상의 공간에서 취재진은 로봇으로 구현됐다. 로봇들이 낯선 환경에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 눈앞에는 현대차 첫 수소 전용 대형트럭 콘셉트카 'HDC-6 넵튠'이 소환됐다.

현대·기아차 디자이너들이 가상현실을 활용해 자동차 헤드램프를 디자인하고 있다. /현대·기아차 제공

가상의 트럭이었다. 하지만 실제와 거의 유사했다. '넵튠'을 당겨 디자인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도 가능했다. 차량의 부품, 재질, 색상 등을 간단한 버튼 조작으로 바꿔 디자인의 완성도를 체크했다. 가상의 '넵튠' 실내 안으로 들어가 일부 기능을 작동하며 공간에 대한 평가도 할 수 있었다. 현대·기아차는 이러한 VR 디자인 품평을 통해 사용성과 시공간별 디자인 적합성을 평가, 고객의 눈높이에서 최적의 모델을 도출한다고 설명했다. 20명이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VR 디자인 품평은 36개의 모션캡처 센서를 통해 이뤄지고 있었다.

이날 경험한 가상의 공간에는 현대차 '넵튠' 외에도 테슬라 '세미', 메르세데스-벤츠 '악트로스' 등 경쟁사 트럭도 배치됐다. 일종의 비교 체험이었다. 현대·기아차는 여러 자동차를 동시 비교하면서 디자인 품질과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작업을 진행했다.

현대·기아차는 이러한 디자인 평가를 할 수 있는 VR 디자인 품평장을 지난 3월 완공했다. 투자 비용은 150억 원 수준이다. 시설 도입 이후 선행 디자인 모델을 일일이 실물로 제작할 필요가 없게 되면서 자원 소모를 줄이고 있다. 또 양산차 디자인을 선정하기 위해 재질, 색상 등을 실제로 구현한 모델을 제작해야 했던 과정도 대부분 생략하면서 차량 제작 비용과 시간을 줄이고 있다.

현재 현대·기아차는 VR 디자인 품평을 거쳐 디자인 관련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다. 앞으로는 일부 모델에 대한 시범 운영을 넘어 개발하는 모든 신차에 VR 검증 과정을 적용한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유럽디자인센터, 미국디자인센터, 중국디자인센터, 인도디자인센터 등과 협업해 전 세계의 디자이너들이 하나의 가상 공간에서 차량을 디자인하고 디자인 평가에 참여하는 원격 VR 디자인 평가 시스템도 구축할 예정이다. 실제 모델에 가상의 모델을 투영시키는 등 증강현실(AR) 기술 도입도 검토하고 있다.

양희원 현대·기아차 바디 담당 전무가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화성시=이성락 기자

VR 디자인 품평을 마친 뒤 '설계 VR 협업룸'을 찾았다. 이곳에서도 자동차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VR이 적극 활용되고 있었다. 차량 설계 부문으로부터 3차원 설계 데이터를 모아 디지털 차량을 만들고 가상의 환경에서 차량의 안전성, 품질, 조작성 등 전반적인 설계 품질을 평가하는 방식이었다. 현대·기아차는 이를 '설계 품질 검증 시스템'이라고 불렀다.

설계 품질 검증 시스템은 정확한 설계 데이터를 기반으로 실제 자동차와 100% 일치하는 가상의 3D 디지털 자동차를 만들 수 있다. 기존에도 디지털 차량 평가는 일부 진행됐지만 큰 화면을 통해 2D 환경에서 주행 화면을 보는 것에 불과해 실제 차량의 성능을 정밀하게 검증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신규 구축된 VR 설계 품질 검증 시스템은 자동차 운행 환경까지 가상으로 구현해 부품 간의 적합성이나 움직임, 간섭, 냉각 성능 등을 입체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가능해 평가의 정확도를 높인 것이 특징이다.

VR 장비를 착용하면 가상의 디지털 자동차를 직접 운행할 수 있었다. 컨트롤러로 운행 중인 차량을 마음대로 절개해 엔진의 움직임이나 부품의 작동 상황을 정밀하게 확인할 수도 있었다. 실물 평가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개발 차량의 문제점 또는 개선 사항을 파악해 설계에 반영하는 것이 이 시스템의 핵심으로 보였다. 현대·기아차 설계 부문은 추후 생산·조립 라인 설계에도 VR을 도입, 조립성을 검증함으로써 보다 인체공학적이고 효율적인 조립 라인 및 작업 환경을 설계한다는 방침이다.

현대·기아차 연구원들이 가상현실을 활용해 가상의 공간에서 설계 품질을 검증하고 있다. /현대·기아차 제공

현대·기아차가 VR를 활용한 디자인 품평장과 설계 검증 시스템을 미디어에 공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자동차 시장 환경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자동차 개발 과정에서부터 혁신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함이다. 혁신의 중심에는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가 있다. 현대·기아차는 지난 7월 연구개발본부 조직체계를 개편해 '버추얼차량개발실'을 신설하는 등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를 준비해왔다.

현대·기아차의 목표는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를 본격 도입해 상품기획 단계에서부터 생산까지 차량 개발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과 시간을 줄이고, 이 자원을 품질 향상에 투입하는 것이다. 회사는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가 R&D 전 과정에 완전 도입될 경우 신차 개발 기간이 약 20%, 개발 비용이 연간 15% 정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알버트 비어만 현대·기아차 연구개발본부 사장은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 강화는 자동차 산업 패러다임 변화와 고객의 요구에 빠르고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한 주요 전략 중 하나"라며 "이를 통해 품질과 수익성을 높여 R&D 투자를 강화하고 미래 모빌리티에 대한 경쟁력을 높일 것"이라고 말했다.

rocky@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