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광그룹의 배구 사랑은 창업주인 이임용 선대회장에서 시작해 아들인 이호진(사진) 전 회장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 /더팩트 DB |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우승 현장에 오너 일가 아무도 없었다
[더팩트ㅣ장병문 기자]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가 12년 만에 V리그 여자배구 통합 우승을 달성했다. 흥국생명은 지난 27일 김천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18~2019 도드람 V리그 여자부 챔피언결정전 4차전에서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를 세트스코어 3-1로 제압했다. 정규 시즌 1위에 오른 흥국생명은 시리즈 전적 3승1패로 2006~2007시즌 이후 오랜만에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통합 우승에 따라 들뜬 흥국생명과 달리 모회사 태광그룹은 조금 과장하면 무관해보일 정도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핑크스파이더스의 우승은 오너의 수감생활로 침체된 태광그룹의 활력소로 작용할 수 있어 더욱 의미가 있다.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의 전신인 태광산업 여자배구단은 1970년대 여자배구를 독주하던 미도파를 제압할 수 있었던 몇 안되는 구단 중 하나였다. 1974년 이래 170연승으로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웠던 천하무적 팀 미도파는 1983년 태광산업에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당시 미도파를 제압하고 우승한 태광산업은 전성기를 맞았다. 그 밑거름에는 태광그룹 창업주인 일주(一洲) 이임용(1921~1996년) 선대회장의 '아버지 리더십' 있었다.
이 선대회장은 철저히 은둔형 경영을 해온 경제인이다. 회사 경영에서는 외부 활동을 극도로 자제했지만 배구를 만나면서 달라졌다. 이 선대회장은 배구단을 창단할 무렵인 1970년부터 1977년까지 한국실업배구연맹회장을 지내는 등 외부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태광그룹의 '배구 사랑'은 이때부터 시작해 오너가 2세까지 이어졌다.
이 선대회장은 1971년 운영난으로 해체 위기에 놓인 동일방직 여자배구단을 전격 인수했다. 같은 해 태광산업 여자배구단을 창단했다. 그는 평소 축구에 관심이 많아 축구단을 구상한 적이 있었지만 배구단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당시 이낙선 상공부장관이 배구단 운영을 제안했는데 이 선대회장이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태광그룹은 배구와 인연을 맺게됐다.
이 선대회장은 갑자기 배구단을 떠안게 됐지만 팀과 선수들을 끔찍하게 생각했다. 배구단 숙소로 삼선교에 집을 마련해 주고 시간 날 때마다 선수들을 찾아 고기를 실컷 사줬다. 선수들 가족까지 불러서 먹을 땐 230인분을 먹는 날도 있었다. 이 선대회장의 아내 이선애 여사는 김장 때가 되면 선수들을 한데 모아 김치 담그는 법을 알려주는 등 가족처럼 지냈다.
선수들을 딸처럼 챙겼다는 일화도 있다. 배구팀을 만나고 온 한 태광산업 임원이 이 선대회장에게 세탁기를 한 대 사달라고 요구했다. 선수들이 하루에 두 번씩 운동복과 속옷 등을 빨래하는 게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큰돈 드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허락할 줄 알았지만 이 선대회장은 거절했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지금은 운동선수이지만 언젠가 결혼하면 셋방살이부터 시작해야 하는 평범한 주부가 된다. 세탁기로 편하게 지내다가 시집가면 세탁기부터 사달라고 할 텐데 딸을 그렇게 길러서는 안 된다."
이 선대회장은 2년이 지난 뒤 선수단에 세탁기는 물론 청소기까지 마련해 줬다. 국산 생활가전 보급이 확산하면서 일반 가정집에도 세탁기를 쓰는 집이 많아졌다. 그제야 세탁기를 사줘도 문제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선대회장이 "시집 보내기 전까지 모두 내 딸이다"라고 말한 것은 아직도 회자 되는 유명한 일화다.
지난 27일 경북 김천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배구 도드람 2018-2019 V리그 여자부 챔피언결정전 4차전에서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에 승리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선수들이 우승컵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뉴시스 |
◆이호진 전 회장 구속 수감 중 우승, 사기 올릴 기회로
태광산업 배구단의 바통을 이어받은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는 지난 27일 경북 김천체육관에서 열린 2018-2019 V리그 여자부 한국도로공사와 챔피언결정전 4차전에서 세트스코어 3-1로 승리, 상대 전적 3승 1패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우승을 확정하자 선수단은 기쁨의 눈물을 쏟아내면서 서로 얼싸안고 격려했다. 핑크스파이더스는 지난 시즌 최하위로 추락했다가 올 시즌 통합 우승을 차지해 그 기쁨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이 감격의 순간을 태광 오너가는 함께 하지 못했다. 선대회장의 막내아들인 이호진 전 회장은 지난달 15일 200억 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안양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 회장은 수감 전 핑크스파이더스의 경기를 종종 관람하며 선수단을 응원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날엔 오너일가 어느 누구도 핑크스파이더스 우승 현장에 없었다고 한다.
이번 핑크스파이더스의 우승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태광그룹은 그동안 오너 간 재산 분쟁이 이어져 왔고 이 전 회장의 횡령·배임 혐의 등 '오너리스크'에 몸살을 앓았다. 최근 이 전 회장이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회사 분위기는 뒤숭숭했고 직원들의 사기가 땅바닥까지 떨어졌다. 이번 핑크스파이더스의 우승으로 사기를 다시 끌어 올릴 수 있게 됐다.
다만 흥국생명 관계자는 이번 프로배구 우승 소식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거나 마케팅으로 연동할 계획은 없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기업의 프로스포츠 구단이 우승할 경우 일간지나 잡지 등에 우승 자축 광고를 내기도 하지만 흥국생명은 달랐다.
한 재계 관계자는 "태광그룹은 선대회장 시절부터 회사를 알리는 것에 매우 소극적이었다"면서 "최근 들어 변화하는 모습도 있지만 내실경영을 강조하는 기업문화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jangbm@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