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그룹들이 잇달아 부진한 경영 성적표를 내놓으면서 재계 안팎으로 경제 위기에 대한 불안과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더팩트 DB |
이상 신호 켜진 경제…소 잃은 외양간 만들지 말아야
[더팩트 | 서재근 기자] 때 이른 추위가 찾아오면서 사람들의 입에서 "이제는 봄, 가을이 사라졌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비단 날씨 얘기만은 아니다. 우리나라 경제에도 더는 '따사로운' 봄, '풍요로운' 가을이 사라지고 있다. 지난주를 기점으로 삼성과 현대자동차(이하 현대차)·SK·LG그룹 등 국내 주요 대기업들의 핵심 계열사들이 올해 3분기 경영 성적표를 차례로 내놓고 있다.
기업별 성과의 정도에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자동차와 화학 등 나라 경제의 주요 부문에서 '맏형' 노릇을 하는 기업들이 보여준 실적은 '아쉽다'는 평가를 넘어 충격적이다.
현대차의 경우 올해 3분기 영업이익은 2889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무려 76%가 줄었다. 이는 국제회계기준(IFRS)이 도입된 지난 2010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더욱 충격적인 건 '1.2%'의 영업이익률이다. 가장 잘 팔린다는 준대형 세단 '그랜저' 한 대를 팔았을 때 현대차가 거둬들이는 수익이 50만 원도 안 된다는 얘기다. 기아차는 같은 기간 이보다 낮은 0.8%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화학업계에서 '맏형' 역할을 하는 LG화학 역시 올해 3분기 6024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23.7%의 감소율을 기록했고, 곧 실적 공개를 앞둔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국내 조선 업계 역시 마이너스 성장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그나마 '캐시카우' 역할을 하는 반도체 분야도 '고점'에 다다랐다는 평가가 나온 지 오래다.
사업 분야를 막론하고 주력 기업들이 날개 없는 추락을 이어가는 사이 이들의 시가총액도 걷잡을 수 없이 줄어들었다. 최근 재벌닷컴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국내 자산 상위 10대 그룹 계열 94개 상장사의 시가총액(우선주 포함)은 811조2860억 원(지난 26일 종가 기준)이다. 이는 지난해 말 968조290억 원과 비교해 무려 156조7430억 원(16.2%)이 줄어든 수치다.
한가지 눈여겨볼 것은 이들 기업마다 초라한 성적의 배경으로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 유가 강세, 신흥국의 경기 침체 등 '공통된' 분석을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재계 안팎에서 불확실한 대외환경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 것은 이미 최악의 성적 릴레이가 이어지기 전부터 제기돼 왔다.
완성차 업계에서는 미국 트럼프 정부의 25%에 달하는 관세 폭탄 가능성이,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서는 국내 업체들을 상대로 한 중국의 일방적인 보조금 중단 결정에 따른 우려가 끊임없이 나왔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손과 발이 묶인 채로 난타전을 당하는 사이 각 기업 총수들은 서둘러 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급한 불 끄기에 나섰다.
실제로 지난 2월 이후 한 달에 한 번꼴로 주요 시장을 돌며 경쟁력 확보를 위한 담금질에 나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30일에는 베트남으로 건너가 스마트폰 사업 챙기기에 나선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은 지난달 평양서 치러진 제3차 남북정상회담 동행도 뒤로 한 채 미국 출장길에 올라 미국 고위 인사들과 면담에 나서며 관세 부과 위기에 몰린 현대기아차에 대한 '호혜적 조처'를 요청했다.
현대기아차를 비롯해 각 사업 분야에서 '맏형' 노릇을 하는 다수 기업들이 올해 3분기 아쉬운 경영 성적표를 내놓으면서 경제계 전반에 위기감이 확산하고 있다. |
그러나 최근 보여지는 기업들의 경영 실적과 각종 경제지표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듯이 재계에서는 바쁘게 돌아가는 기업 총수들의 경영 시계만으로는 우리 기업들이 처한 작금의 위기를 벗어나기에 역부족이라는 게 중론이다.
최근 현장에서 만난 한 교수는 국내 완성차 업계의 위기 상황에 관해 "이미 우리나라의 경제 산업 전반에 퍼진 위기는 '경고' 수준을 넘어섰다"면서 "경제정책의 근본적인 변화, 정부의 능동적이고 실질적인 태도 변화 없이는 국내 기업들이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며 현실과 동떨어진 정부의 경제 정책을 향해 강한 어조로 지적했다.
기업들에 필요한 것은 '보여주기식' 이벤트가 아니다. 지난해 LG그룹을 시작으로 현대차와 SK, 지난 8월 삼성까지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각 그룹 총수들과 만나 현장 소통 간담회에 나설 때마다 각 기업들은 '00조 원' 투자 0000명 고용'이라는 틀에 맞춰 대규모 투자 계획을 내놨다. 하지만 정작 정부 고위 관료와 기업의 스킨십 이후 기업들이 체감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투자를 위한 실질적인 규제 개혁 등의 변화는 조금도 없었다.
이미 우리 경제는 '비상등'이 켜진 지 오래다. 주식 시장이 요동치고 기업들의 손실이 수천, 수조 원씩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시점에서 '일자리가 모자르니 늘려야 한다' '기름값이 올랐으니 유류세를 낮추겠다'는 식의 대응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외면한 채 탁상(卓上)에서 만들어낸 공감 없는 미봉책은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은 하루하루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경제 사회에서 더는 통하지 않는다. 이제라도 정부가 경제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직접 경제 정책 혁신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