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서 성추행 혐의' 김준기 전 DB그룹 회장, '미국 생활' 언제까지 하나[더팩트ㅣ서민지 기자] "한국 재벌 총수들은 곤경에 처할 때마다 휠체어를 탄다."
지난 2007년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몸이 아픈 것을 핑계로 위기상황을 모면하는 한국 대기업 총수들을 보며 이렇게 지적했다.
각종 범죄 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는 기업인과 정치인들이 '칭병(稱病:병이 있다고 핑계 대는 것)'을 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위기 해소책이다. 물론 정말 건강에 이상이 있어 치료가 필요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0년 전 해외언론에서 이같은 비판이 나온 걸 보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잘 아는 수법임이 틀림없다.
금융권도 예외는 아니다. DB그룹(옛 동부그룹) 창업자 김준기 전(前) 회장이 대표적인 최근 예다. DB그룹은 DB손해보험과 DB금융투자, DB자산운용, DB저축은행, DB캐피탈 등 금융권에 핵심 계열사를 둔 그룹이다.
김 전 회장 비서를 지냈던 여성 A씨는 지난해 2월부터 7월 김 전 회장에게 상습 추행을 당했다며 같은 해 9월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당시 DB그룹 측은 "일부 신체접촉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강제성은 없었다"고 해명하고 A씨가 이를 빌미로 거액을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고 경찰 발표가 나온 지 이틀 만에 김 전 회장은 전격 사임했다.
경찰은 곧바로 수사에 착수했지만 김 전 회장이 미국에 있는 탓에 차질이 생겼다. 김 전 회장은 지난해 7월 질병 치료 차 미국으로 출국했는데, 경찰의 거듭된 소환 요구에도 귀국하지 않았다. 김 전 회장이 3차례에 걸친 소환에 불응하자 경찰은 법원으로부터 체포 영장을 발부받았다.
경찰은 또한 외교부에 김 전 회장 여권을 무효화해줄 것을 요청하고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에 공조수사를 요구했다. 김 전 회장은 외교부에 여권을 반납했고 이후 정부를 상대로 "여권 발급 제한과 여권 반납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결국 소송에서 패소했고 미국 비자도 올해 1월 기간이 끝나 미국에 더 이상 체류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미국에 머물러 있다.
수사의 진전이 없던 경찰은 지난 5월 김 전 회장을 '기소중지'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다. 기소중지는 피의자 소재를 찾을 수 없어 수사가 어려울 경우 일단 수사를 중단하는 처분을 말한다. 사유가 해소되면 수사가 재개되고 공소시효가 유지된다는 점에서 무혐의에 따른 불기소와는 차이가 있다.
DB그룹 측은 현재 김 전 회장 건강이 심각하다고 전했다. 또한 여권을 반납해 사용 제한이 있긴 하나 '무효화'된 것은 아니며 미국 비자도 만료된 상태가 아니라 합법적 체류라고 설명했다. 구체적인 상황이나 과정에 대한 설명은 피했지만, 비자는 상황에 따라 체류 연장 신청이 가능해 현지에서 체류를 연장한 것으로 예상된다.

일련의 과정을 보고 있자니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김 전 회장이 진정성 있게 사과를 하거나 의혹을 해소하기는커녕 소환 불응과 여권 반납, 비자 만료 등에도 미국에서 버티는 모습은 도피성 출국이라는 오해를 살 만하다.
김 전 회장은 그를 둘러싼 혐의가 사실이 아니라면 의혹이 불거졌을 때 "치료가 끝나고 귀국하는 대로 조사를 받겠다"며 당당한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사임할 때 "개인 문제로 회사에 짐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 동부그룹 회장직과 계열회사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겠다"며 "특히 주주, 투자자, 고객, 그리고 동부그룹 임직원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린다"는 말이 전부였다.
시기적으로도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A씨 주장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은 출국했던 지난해 7월까지 무려 5개월 동안 A씨를 성추행했다. 김 전 회장이 1년 넘게 미국에 머물러 있을 만큼 건강이 악화됐다고 하는데 치료를 받기 전까지 부적절한 행위를 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A씨 측은 고소 전 두 달간 법무팀과 여러 차례 합의를 시도했는데 김 전 회장이 이 과정에서 미국으로 '도피성 출국'을 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또한 A씨가 제출한 영상과 녹취록에서 김 전 회장은 A씨에게 "너는 내 소유물이다", "반항하지 마라" 등의 발언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 전 회장 측이 주장한 '합의'를 통해 이뤄진 행위라면 '반항'이라는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용어다.
김 전 회장은 DB그룹을 한때 재계 순위 10위권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해방세대에서 기업을 10대 그룹으로 일궈낸 사례는 그가 유일하다. 굴지의 그룹을 이끈 김 전 회장이 건강에 이상이 생겨서든, 아니면 수사를 피하기 위해 '칭병'을 이용한 거든 불명예로 물러난 것에 씁쓸할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