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는 1980년 대산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가 우리나라 국민들의 교육과 지식수준을 높이기 위해 설립했다. 1992년 5월 교보문고 재개장 기념 테이프 커팅식에 참석한 신용호 창립자(왼쪽에서 세 번째) 모습. /교보생명 제공 |
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기업들의 최우선 가치도 '돈을 버는 것'을 넘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경영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에 따라 주요 그룹은 경제적 가치를 사회적 가치로 바꾸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주요 그룹의 이런 노력은 아직 일반인에게 생소한 편이다. '반도체' 세계 1위 기업 삼성이 다문화 여성을 대상으로 커피 제조 전문가 바리스타 육성 교육을,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로 나선 현대자동차가 지역 특산물 판매와 유통을, 통신업계의 '맏형' SK가 산림을 가꾸고 나무를 심는 조림사업을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에 따라 <더팩트>는 국내 주요 그룹의 '이색 계열사'를 살펴보고 왜 이런 기업을 운영하는지에 대한 역사와 배경을 시리즈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누구나 꿈 이룰 수 있게"…교보문고, '국민교육' 위한 노력
[더팩트ㅣ파주·광화문=서민지 기자]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서울 대표 명소인 광화문에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곳이 있다. '광화문 글판'으로 유명한 교보생명 본사와 해당 건물 지하에 있는 교보문고다. 이곳은 단순히 책을 판매하는 곳을 넘어 도심 속 하나의 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지난 1991년부터 28년째 거리를 오가는 이들에게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광화문 글판'은 고(故) 대산(大山)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의 경영 철학 정수로 꼽힌다.
1997년 말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고통과 절망을 겪는 이들이 많아지자 신용호 창립자는 당초 계몽적 성격의 직설적 메시지에서 탈피, “기업 홍보는 생각하지 말고 시민들에게 위안을 주는 글판으로 운영하자”고 제안하면서 현재의 감성적 형태의 글판으로 운영되고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2012년 봄편에 내걸린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용기와 희망을 줬다. 2015년 온라인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이 내용에 투표한 한 참가자는 "가족 몰래 8년간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광화문 앞을 지나는 버스 안에서 글판을 보고 가족들을 생각하며 많이 울었다"며 "제 말을 들어줄 이 하나 없을 때 다시 일어설 힘이 돼준 이 글귀는 큰 위안이었다"고 사연을 밝혀 많은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광화문 글판'과 교보문고는 바로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신용호 창립자의 경영 철학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사람과 책의 가치를 알아본 신용호 창립자의 혜안 속에서 탄생한 교보문고는 교보생명이 지분 100%를 보유한 자회사로 금융권에서 찾아보기 힘든 비금융 계열사다. 공익적 목적으로 설립된 교보문고는 교보생명그룹 11개 계열사 가운데 하나로 서점업계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모기업 교보생명보다 오히려 교보문고의 인지도가 더 높을 정도다.
교보문고는 1980년 대산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우측 상단)가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철학으로 설립한 기업이다. /파주=서민지 기자, 교보생명 제공 |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대산 신용호의 철학
교보문고는 신용호 창립자의 신념에서 탄생했다. 신용호 창립자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을 사람을 만든다'는 철학으로 1980년 교보문고를 설립했다. 해당 문구는 서점을 찾는 사람에게 익숙할 수밖에 없다. 교보문고 본사와 매장 곳곳은 물론 종이봉투 등에도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창립 이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신용호 창립자는 생명보험의 원리에 교육을 접목시킨 '교육보험' 제도를 창안하고 보험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세계보험대상'을 수상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국민교육'에 대한 신념 한 가닥이 교보생명으로 구현됐다면 다른 한 가닥은 교보문고를 통해 구현됐다. 그는 국가가 발전하고 선진국이 되려면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국민교육'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처음 광화문 사거리 금싸라기 땅에 돈이 되지 않는 서점을 들이겠다고 했을 때는 임직원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신용호 창립자는 "사통팔달 제일의 목에 청소년을 위한 멍석을 깔아주자. 와서 사람과 만나고, 책과 만나고, 지혜와 만나고, 희망과 만나게 하자"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항상 국민교육 진흥의 실천적 구현, 독서 인구 저변 확대를 통한 국민 정신문화 향상, 사회교육적 기능을 살린 문화공간 창출 등의 이념을 강조했다.
신용호 창립자는 개점 후 틈만 나면 교보문고를 돌아보며 기뻐했다고 한다. 그는 ▲모든 고객에게 친절하고 초등학생들에게도 반드시 존댓말을 쓸 것 ▲한곳에 오래 서서 책을 읽어도 그냥 둘 것 ▲책을 이것저것 빼보고 사지 않더라도 눈총 주지 말 것 ▲앉아서 책을 노트에 베끼더라도 그냥 둘 것 ▲책을 훔쳐 가더라도 망신 주지 말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좋은 말로 타이를 것 등 5가지 지침을 직원에게 당부했고, 이는 현재까지 운영방침으로 이어지고 있다. 책 판매에 집중하지 않고 누구나 편하게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교보문고 파주 본사 로비는 출판사 등 관계자와 방문객들이 편하게 머무를 수 있는 '북카페' 공간이 마련돼 있다. /파주=서민지 기자 |
◆창립자의 '사람 중심' 이념, 기업 문화에도 적용
교보문고는 2012년 본사를 종로에서 파주 출판단지로 이전했다. 교보문고 파주 본사에 들어가면 천장까지 높이 치솟은 책장이 눈에 들어온다. 1층 로비에는 다양한 책과 함께 차를 마실 수 있는 '북카페'가 마련돼 있다. 출판사 등 관계자들이 기다리거나 방문객들이 편하게 머무르다 갈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다.
사실 본사가 파주로 이전됐을 당시 직원들의 불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의 중심에서 도시 외곽으로 사옥을 옮기니 불편함이 작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파주 특유의 차분하고 아늑한 분위기와 쾌적한 근무환경은 금세 직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실제 파주 출판단지를 방문했을 때 고요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져 저절로 '치유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출판단지에 입주해 있는 서점과 출판사 건물은 대부분 5층 이하로 낮은 편이고, 주변에 나무와 녹지가 많다. 기업들이 모여있다는 느낌보다는 전원주택단지를 연상케 한다.
교보문고는 지난 2012년 본사를 종로에서 파주 출판단지로 이전했다. /파주=서민지 기자 |
교보문고는 사옥 내부에 직원들의 편의를 위해 외부 잔디 공간을 활용해 휴게실을 만들었다. 또한 서울 곳곳에 통근버스를 운영해 정시 출퇴근을 보장하고 있다. 서울 광화문에 모빌오피스를 마련해 급한 일을 처리해야 하는 직원들이 업무를 볼 수 있게 했다.
'리프레시(refresh·재충전) 휴가' 등으로 직원들의 복지와 사기를 충전할 새로운 문화가 조성되기도 했다. 최대 12일간 사용할 수 있는 '리프레시 휴가'는 다른 휴가와 함께 쓸 경우 3주 이상을 쉴 수 있다. 정신적·신체적으로 장기간 휴식이 필요한 직원에게 최대 2개월간의 안식 기간을 제공하고 있다.
가족친화 경영에도 주력하고 있다. 교보문고는 과반수가 여직원인데, 출산전후휴가 90일 외에도 1년간의 육아휴직이 활성화돼있다. 출산예정자들에게 최대 8개월까지 '산전휴직'을 제공하며, 최근에는 난임휴직 제도를 도입해 임신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직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직원들을 위하는 노력을 인정받아 교보문고는 2012년 서울시가 주관하는 근로자지원부문 '가족친화경영우수기업'을 수상하기도 했다.
교보문고 파주 본사에서는 신기한 장면도 구경할 수 있다. 교보문고 물류센터에는 클래식한 서점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첨단 시스템'이 도입돼 있다. 3000여 평, 총 240만여 권의 도서를 보유한 파주 물류센터는 최첨단 자동화 설비로 일일 35만여 권의 도서를 입고·처리하고 있다.
교보문고는 지난 2014년 8월 오프라인 영업점 물류를 한 군데로 합쳤다. 기존 4개 지역, 20개 동으로 분산 운영됐던 물류센터를 파주로 모아 부곡리에 제1물류센터를, 문발동 본사에 제2물류센터를 뒀다. 제1물류센터에서는 오프라인 서점, 제2물류센터에서는 인터넷 교보문고의 도서를 담당하고 있다.
특히 기존의 물류센터 설비 노후화와 협소한 진입 도로로 인한 불편사항을 개선해 신속성을 높였다. 이 과정에서 도입된 게 첨단 시스템이다. 도서 분류부터 운반, 포장 등 대부분 과정이 자동화 설비로 운영된다.
교보문고 광화문 지점은 평일 점심시간에도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광화문=서민지 기자 |
◆교보문고, 책을 찾는 이들을 위한 배려…업계 1위가 되기까지
교보문고는 서점 문화를 '책'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꾼 데도 일조했다. 과거 천장까지 높게 치솟았던 서가에서 원하는 책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책을 찾았다 할지라도 높은 곳까지 손을 뻗어 꺼내기도 힘들었다.
교보문고는 소비자가 책을 편하게 고를 수 있도록 책장을 낮췄다. 전체적으로 통로를 넓히고 전면 진열을 크게 늘려 보다 쉽게 책을 찾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쭈그려 앉아서 책을 보던 소비자들을 위해 그 자리에서 읽을 수 있도록 곳곳에 테이블과 소파, 의자 등을 비치했다. 책을 사지 않더라도 편하게 읽고, 쉴 수 있는 휴식공간을 만든 것이다. 누구나 책을 가까이 즐기라는 배려다. 이는 전반적인 서점의 문화를 변화하게 했다. 교보문고를 따라 다른 서점도 책장을 낮추고, 앉을 곳을 마련했다.
이 같은 배려는 교보문고의 성적표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교보문고는 연간 5500억 원 규모의 매출을 내고, 시장점유율(오프라인 영업점 종이책 판매 기준) 60%대를 기록하며 1위를 지키고 있다. 올해 8월 기준 약 1600만 회원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교보문고의 임직원 수는 1040여 명이며 서울 광화문점을 비롯해 강남·잠실·목동·영등포·합정과 부천·인천·천안·일산·평촌 등 수도권, 대구·부산·창원·울산·대전 등 전국 35개 영업점과 바로드림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대·이화여대·숙명여대·가천대·성균관대· 포항공대·전북대 등 교내서점도 있다.
교보문고는 매장에서의 경험을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교보문고만의 시그니처 향 '책향'을 개발했다. '책향'은 올해 상품화돼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서민지 기자 |
◆서점에도 향기가 있다…'교보문고 향' 열풍
교보문고는 특별한 '향'으로도 소비자에게 각인돼 있다. 교보문고 매장에 들어서면 마치 나무숲을 거니는 듯한 착각을 준다. 이는 교보문고만의 시그니처 향 'The Scent of Page(책향)' 덕분이다.
교보문고는 지난 2014년 말 매장을 방문한 고객들이 매장에서의 경험을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향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다음 해인 2015년부터 일부 교보문고 매장에서 향기 서비스를 시범적으로 제공하기 시작했고, 고객들의 반응을 보며 수차례 배합 비율과 강약을 조절한 끝에 현재의 향기를 만들어냈다.
'향기 마케팅'은 성공적이었다. 각종 SNS와 커뮤니티에서 "교보문고에서 나는 향이 무슨 향이냐", "교보문고 향을 어디서 구할 수 있냐" 등 호기심과 관심이 이어졌다. 고객들의 요구가 많아지자 교보문고는 지난해 10월 분당점 오픈 이벤트를 통해 책향을 디퓨저, 캔들 등으로 상품화해 한정 수량으로 판매했다.
이후 뜨거운 반응이 이어졌고, 올해부터는 정식 상품화해 판매를 시작했다. 호텔 등 일부 프리미엄 브랜드에서 시그니처 향을 개발한 사례는 있지만, 서점업계에서는 '최초'다. 교보문고의 책향은 꾸준하게 팔리며 매진 행진이 이어지고 있다.
곽성준 교보문고 브랜드관리팀장은 "최근 교보문고는 다방면의 변화를 주고 있다. 전통적인 사업이라 여겼던 오프라인 서점에도 변화를 줘 사람들이 오고 싶고, 머물고 싶은 매력적인 매장으로 변화를 꾀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매장과 인터넷·모바일에서 플랫폼 시장을 선도하고 트렌드를 창출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