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서열 6위 GS그룹 주력 계열사인 GS칼텍스와 GS건설 대표이사가 하도급 일감몰아주기 관련으로 국감 호출을 받았다. 왼쪽은 허진수 GS칼텍스 대표이사 회장, 임병용 GS건설 대표이사 사장./ 각 사 홈페이지 캡처 |
[더팩트 | 성강현 기자] "기업인이 국감장에 나와 하루 종일 기다리게 하거나 면박을 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올해는 안 그랬으면 합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첫 국정감사(국감)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재계의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국감 시즌만 되면 연례행사처럼 반복되던 기업인 대거 호출이 올해도 이어지고 있어서다. 상임위원회별로 기업인 증인·참고인 요청이 잇따르고 있어 역대 최대 규모의 기업인 소환이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대거 소환은 곧 무분별한 호출로 받아들이는 기업 관계자들이 적지 않다. 실제 한 기업 관계자의 위 말은 질의응답이 제대로 될 수 있겠느냐는 비아냥도 섞여있다. 지난 19대 국감에 출석한 기업인 증인 가운데 5분 미만으로 답변한 비중은 76%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중 12%는 발언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10일 최장 열흘의 긴 연휴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가운데 이틀 후인 12일부터 국감이 시작된다. 이달 31일까지 열리는 국감에선 올해도 많은 기업인들이 불려나가 '묻지마 출석'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재계에선 사실상 '국정감사'가 아닌 '기업감사'아니냐는 볼멘 목소리가 나온다.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달 말 한 기업 관계자는 "연휴가 끝나고 국감이 시작되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면서 "연휴 막바지에는 회사에 나가 (국감) 준비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매년 반복되는 국감 스트레스가 상당하다"면서 "정부와 공공기관을 견제·감시하는 국감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기업감사로 변질된 것 같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기업인 증인 채택과 관련해 "국감 대상 기관은 정부와 공공기관으로 명확히 규정돼 있다"면서 "민간기업에 문제가 있으면 관리 감독을 하지 못한 정부를 질책하고, 실정법을 위반했다면 법적으로 처리하면 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 '군기잡기', '호통치기', '벌주기식' 국감 또다시 재연되나
정치권에 따르면 국회 정무위원회를 비롯해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 환경노동위 등이 국감을 앞두고 채택한 증인 명단에 일부 기업 총수들과 최고경영진들 이름이 많이 올랐다.이 때문에 국감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전부터 국회의 '무더기 기업인 증인 채택'이 논란이 일고 있다. 벌써부터 '군기잡기', '호통치기', '벌주기식' 국감이 또다시 재연될 것이라는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정무위는 지난달 28일 여야 합의를 통해 국감장에 나올 명단을 확정됐다. 정무위 국감에 출석하게된 증인 및 참고인은 총 54명으로 이들 중 29명이 기업인이다.
재계 서열 6위 GS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GS칼텍스 허진수 회장이 증인으로 채택돼 눈길을 끈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동생으로, 하도급 일감몰아주기 때문에 국감 호출을 받게 됐다. 특히 정유 4사 중 유일하게 국감장에 서는 불명예까지 안았다. GS칼텍스와 더불어 GS그룹 주력 계열사인 GS건설 사장도 불려나간다. 임병용 GS건설 사장 역시 하도급 일감몰아주기가 국감장에 서게 되는 이유다.
정무위는 이외에도 고동진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사장을 불러 '제조사-이통사 간 단말기 가격 담합 의혹'을, 이해진 전 네이버 의장에게는 '미래에셋과 자사주 맞교환 관련' '대기업집단 지정 관련' '불공정행위 관련',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은 '하도급 불공정행위 관련', 윤갑한 현대차 사장은 '자동차 리콜', '갓뚜기(God+오뚜기)'로 불리는 함영준 오뚜기 회장을 불러 '라면값 담합' 등을 질의한다.
국감장에 기업인들이 소환돼 대기하지만, 정작 질의응답 시간은 짧거나 아예 질의조차 생략되는 경우가 매년 반복돼 왔다. 이 때문에 '묻지마 증인채택' '벌주기식' 등 '국감 갑질'이라는 지적이 쏟아진다. /더팩트 DB |
최근 논란이 된 생리대 문제와 관련해 최규복 유한킴벌리 사장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차명계좌 실명전환 문제와 관련해 이학수 삼성 전 부회장을, 유배당보험 계약자 이익배분·암보험 관련해 방영민 삼성생명 부사장 등을 부르기로 했다. 또한 은산분리와 특혜 인가 의혹과 관련해 이슈가 되는 인터넷전문은행업계의 심성훈 케이뱅크 대표와 윤호영 카카오뱅크 대표도 국감 증인석에 앉는다.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는 이동통신 3사 CEO인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황창규 KT 회장, 권영수 LG유플러스 부회장을 증인으로 채택했으며, 산업통상자원위는 하석주 롯데건설 대표, 김연철 한화 대표이사(기계부문), 윤동준 포스코에너지 대표, 나기용 두산중공업 부사장, 이병선 카카오 부사장 등을 부른다
보건복지위는 ‘햄버거병’과 ‘집단 장염’사태 논란의 중심에 선 조주연 맥도날드 대표를 증인 명단에 올렸다. 생리대 유해성 논란 등과 관련해 김혜숙 유한킴벌리 상무, 최병민 깨끗한나라 대표 등도 증인으로 채택했다. 환경노동위원회는 정일영 인천공항공사 사장, 서장원 넷마블게임즈 부사장 등을 증인으로 부를 예정이다.
기획재정위원회에서는 최순실 국정농단 장본인 최순실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시내면세점 선정 비리 의혹을 파헤칠 예정이다. 관련 기업 총수를 비롯해 국세청 관계자, 면세점 사업자들의 증인 출석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 20대 첫 국감인 지난해 150명 기업인 불러, 올해는 더 많이 부르나
아직도 각 상임위원회 별로 국감 증인 채택을 위한 협의를 진행 중인 점을 감안하면 향후 증인으로 채택되는 기업인들은 더 늘어날 수 있다. 이에 따라 기업인 숫자는 역대 최대를 기록한 지난해 150명을 넘을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문제는 불렀으면 질의를 하고 답변을 들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이다. 국감장에 소환돼 대기하지만, 정작 질의응답 시간은 짧거나 아예 질의조차 생략되는 경우가 매번 거듭돼 왔다. 이 때문에 '묻지마 증인채택' '벌주기식' 등 '국감 갑질'이라는 지적이 쏟아진다.
재계 관계자는 "중국의 사드 보복 조치에 이어 미국의 통상압력 등으로 경기악화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보여주기식 국감이 이뤄질까 걱정"고 말했다. 한 기업 관계자는 "기업을 대표하는 최고경영진이 (국감에) 출석하게 되면 기업 현안은 뒤로 밀려나고 국감 준비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면서 "대내외적으로 기업이 처한 환경도 고려해 기업인들을 무분별하게 소환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다른 기업 관계자는 "국감이 '보여주기식 질책'에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불러놓고 호통 치거나 윽박지르면서 답변도 못하게 구태는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 적폐 아니냐"고 힘주어 말했다.
한편 올해 처음으로 국정감사 증인신청 실명제’가 도입돼 증인 채택 시 신청자의 이름을 함께 밝혀야 한다. 과도한 증인신청 관행을 바로잡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 무부분별한 증인 채택을 막겠다는 취지에서다. 이 같은 내용의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은 지난해 12월 개정된 바 있다. 하지만 일부 의원들이 이를 자신들의 홍보수단으로 역이용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