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재판이 27일 33회차를 맞았지만, 아직 피고인들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핵심적인 증거나 진술은 나오지 않고 있다./문병희 기자 |
[더팩트 | 서재근 기자] '세기의 재판', '역사적 재판', '초미의 관심사' 최근 법조계는 물론 재계 안팎에서 이 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재판이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 공여 혐의 등에 대한 재판이 그것이다.
지난 4월 이후 3개월 가까운 시간 동안 무려 33회차에 걸쳐 진행된 재판을 지켜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그려졌던 '관심'은 어느새 '우려'로 바뀐다. 소위 '이재용 재판'이라고 불리는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큰 틀에서 보면 그리 복잡하지 않다. 무난한 경영 승계를 해야 하는 이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계열사 합병과 지주사 전환 등 굵직한 경영 사안을 원활히 치를 수 있도록 도와달라 청탁했고, 박 전 대통령은 그 대가로 자신의 최측근인 최순실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요구했다는 게 특검이 바라보는 시각이다.
이 같은 의혹을 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열쇠'가 있다.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과 독대 때 이미 최순실의 실체를 알고 있었는지, 실제로 박 전 대통령에게 부정한 청탁을 했고 지금은 해체된 미래전략실 수뇌부에게 뇌물 연결 고리가 되도록 지시했는지를 밝혀내야 한다는 것이다. 혐의를 입증할 만한 핵심 증거 또는 증인의 진술 등이 여태 나오지 않았다는 지적은 이미 숱하게 나왔다. 이를 의식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특검은 "여러 간접사실을 바탕으로 혐의를 입증하겠다"고 말한다.
문제는 특검이 말 하는 '간접사실', '간접증거'를 바라보는 온도차가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 또는 집단에 따라 차이가 너무도 크다는 데 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은 국민연금의 정책 판단을 두고 '자산 증식을 위한 최선책'이라는 평가와 '대주주 편들어주기'라는 상반된 해석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고, 재단 출연금 지원은 '삼성'이라는 특정 기업에만 문제를 제기한다는 지적이 재판정에서도 나온다.
여기에 특검이 보여주는 태도는 이 간극을 더욱 벌리고 같은 법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사회 전반에 또 다른 분열을 키우고 있다. 일례로 지난 24일 김신 삼성물산 상사부문 사장에 대한 증인신문 당시 특검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 이 부회장의 경영 승계를 위한 것이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했다. '승계를 위한 것이죠' '~~라고 볼 때 승계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데 어떻습니까' '상식적으로 봤을 때 이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지 않나요' 항상 같은 패턴이다. 이는 재판부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사항이다.
지난 24일 김신 삼성물산 상사부문 사장에 대한 증인신문 당시 특검이 같은 질문을 수차례 반복하자 재판부는 "분명히 증인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식의 신문 자제하라고 제가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나머지 문항도 같은 취지라면 생략하세요"라며 강한 어조로 지적했다. |
특검이 해야 하는 일은 "그렇다"라는 한마디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관계에 관해 묻고 답변을 듣는 것이다. "증인이 기억나는 대로만 진술하시고,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을 거부하셔도 좋습니다." 어떤 재판이든 증인신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해당 재판부는 증인에게 이같이 말한다. 다시 말해 신문을 하는 것은 검찰이지만,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은 판사의 몫이라는 것이다. 재판부 역시 이날 특검을 향해 "분명히 증인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식의 신문 자제하라고 제가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나머지 문항도 같은 취지라면 생략하세요"라며 강한 어조로 지적했다.
27일 이윤표 전 국민연금 운용전략실장, 채준규 전 국민연금 리서치팀장 등에 대한 신문에서는 "증인, 증인. 제 질문이 아직 안 끝나서요. 제 말부터 듣고 답하시죠" "증인한테 질문한 요지는 그게 아니구요"라는 말을 수십여차례 지속했다. 물론 언급한 두 문장은 재판정에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증인이 사실관계에 대한 설명을 하려 할 때마다 말을 끊고, '청와대 개입이 없었다'는 식의 발언을 할 때마다 '다시 한번 묻겠다'라며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면 이는 말 그대로 '사족'일 뿐이다.
심지어 이달 초부터 약 일주일 동안 금융위원회 관계자들을 상대로 한 증인신문에서는 시종일관 "청와대와 삼성으로부터 특정 지시를 받지 않았다"는 취지의 진술을 이어갔음에도 특검은 마지막 의견 진술에서 '증인들의 진술만 보더라도 삼성과 청와대의 청탁이 있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는 취지로 끝맺음한다.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중대한 재판이 사실상 '청탁을 하려 했다'는 양심 고백에는 면죄부를 주고 '청탁이 아닌 청와대의 강요 때문'이라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몰아붙이는 모양새가 돼서는 안 된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죗값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죗값'을 묻는 과정이 객관적이고 공정해야 한다는 전제가 반드시 지켜지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또 다른 분열과 잡음만 조장할 뿐이다.